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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4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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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의 ‘의학과 서사’]
(3) 영화 ‘24주’를 통해 본 낙태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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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4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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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무명에서 시작했지만, 이제 전국에서 출연 요청이 쇄도하는 코미디언이다. 매니저인 남편은 당신이 관객 일곱 명 앞에서 공연할 때 혼자서 열정적으로 손뼉을 쳐 주었던, 당신과 모든 것을 함께하고자 하는 헌신적인 사람이다. 비록 떨어져 있을 때가 많지만, 사랑스러운 첫째 아들도 잘 크고 있다. 참, 왜 첫째냐고? 오랫동안 기다리던 둘째가 드디어 자신의 존재를 자궁 속에서 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분간 공연을 쉬겠냐고 사람들이 묻지만, 당신은 불러오기 시작한 배가 잘 드러나는 원피스를 입고 사람들 앞에서 외친다. “뭔가 달라졌나요? (임신했네요!) 맞아요. 구두를 새로 샀어요!” 사람들은 당신의 불러오는 배를 주목하며 임신한 여자 코미디언을 특별한 눈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임신이 자연스러운, 당연한 축복인 당신에겐, 새로 산 구두가 더 특별한 일이다.
하지만 산전 검사는 당신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한다. 태어날 둘째 아들이 다운증후군이라는 것이다. 확률은 100%는 아니더라도 98%가 넘는다. 이 상황을 이해해보려 당신은 다운증후군 환자 모임에 가 본다. 너무도 기다려온 아이라서 포기하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도 둘째를 키우고 싶다는 남편의 의지가 강력하다. 엄마와 친구들, 아들과 보모에게 소식을 전하지만 반응은 싸늘하다.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내뱉은 의지를 꺾고 싶지 않다. 다행히 멀리 살던 엄마가 같이 살면서 도와주기로 했다. 하지만, 정밀 검사에서 당신의 호흡이 턱, 하고 막힌다. 태어날 아이가 고도의 심장 기형이 있어서, 태어나도 큰 수술을 반복하고 계속 어려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소식 앞에 당신의 눈앞은 깜깜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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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4주>의 메인 포스터 스틸컷은 주인공 아스트리드가 품속으로 파고 들어온 첫째 아들을 태중의 둘째 대신 쓰다듬고 있는 장면이다. 다운증후군과 고도의 심장기형이 둘째를 초대받지 못한 존재로 만든 세상에서 아스트리드의 손길은 신학자 윌리엄 메이가 “초대받지 않음으로의 열림”이라고 부른 통제 불가능성 앞의 윤리적 의무를 상기시킨다.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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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개봉한 영화 <24주>는 독일 신예 감독 앤 조라 베라치드의 작품으로, 낙태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룬 수작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전에 낙태를 다룬 영화와는 관점이 매우 다르다. 낙태 반대 운동의 선봉에 서서 과장된 어법으로 낙태 시술을 담아낸 다큐멘터리 <소리 없는 비명>(1984), 낙태가 여성에게 드리운 음영을 20년씩의 간격을 지닌 세 가지의 옴니버스로 풀어낸 영화 <더 월>(1996)은 낙태 찬반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들이다. 한편, 불가리아 차우셰스쿠 정권 아래에서 친구가 불법 낙태 시술을 받는 과정을 돕는 여성의 시선을 통해 독재 정권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차별을 상징적으로 그린 <4개월 3주 그리고 2일>(2007)은 낙태에 대한 문제의식으로도, 더 보편적인 여성 인권의 문제로도 살펴볼 수 있는 영화다. <24주>는 낙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후자보다는 전자에 가깝지만, 낙태에 관한 찬반이 영화의 중심이 아니라는 점에서 전자의 궤를 벗어나고 있다.
영화를 풀어내기 위해, 먼저 낙태에 관한 논쟁을 살필 필요가 있다. 아니, 낙태에 관한 청와대 청원과 그에 대한 조국 민정수석의 답변, 그리고 그 후폭풍을 생각할 때 꼭 영화 때문에 낙태 논쟁을 살핀다고 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간략하게 낙태 논의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에서 논의되는 상황은 어떤지 살펴보는 게 좋겠다. 그래야 지금 우리가, 영화가 던지고 있는 질문의 필요성을 검증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미국 낙태 논란의 종점이자 시점이 된 “로 대 웨이드” 판결
1969년 미국, 21세 여성 노르마 매코비는 이미 두 아이를 출산하였지만, 경제적 문제로 입양 보낸 상태였다. 셋째를 임신한 그는 낙태를 원했지만, 비용을 마련할 수 없었다. 찾아간 의사들은 난색을 보였고, 결국 멀어졌던 아버지에게 돌아가 도움을 청해 다시 의원 문을 두드렸다. 이번에 의사는 낙태 변호사의 조력을 구할 것을 요구했다. 그와 연결된 변호사 헨리 매클러스키는 낙태 승인을 받을 수 없으리라 여겨 요청을 거절하고 대신 아기 입양을 도와주겠다고 권했다.
한편, 헨리의 친구이자 젊은 변호사였던 린다 커피와 사라 웨딩스는 사회 개혁을 목표로 헌법 소원을 준비 중이었지만, 어떤 법을 문제 삼을지, 또 해당 법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이 있는지 찾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다. 헨리가 노르마를 둘에게 소개해주자, 두 변호사는 텍사스주를 대상으로 하여 소송을 제기했다.
주의 낙태 법령을 문제 삼은 그들은 해당 법이 여성의 임신과 관련한 안전, 충실한 의료 서비스를 받을 권리와 임신을 선택할 수 있는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매코비는 제인 로라는 익명을 사용하여 원고가 되었고, 텍사스주를 대표하여 댈러스 카운티 지방 검사였던 헨리 웨이드가 피고가 되었기에, 해당 소송은 훗날 ‘로 대 웨이드’ 소송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었다. 그 끝에서 대법원은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 결정권 중 후자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이 결정은,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는 낙태를 둘러싼 윤리적 논쟁의 시작이기도 했다.
인간이 자신의 생명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는 생명권은 명문적 규정이 있지 않으나 자연권으로 당연하게 인정됐다. 여기에서 출발하는 태아의 생명권은 매우 단순한 논리를 지닌다. 태아는 인간이므로, 따라서 태아 또한 생명권을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은 태아를 언제부터 인간으로 인정할 것이냐 하는 점이다. 수태, 즉 착상 이후 7주까지의 배아 또한 인간으로 봐야 한다는 종교적 관점과 10주까지 임신 초기의 태아는 감각 기능이 발달하지 않았으므로 성숙한 인간과 같은 권리를 누리지 않는다는 과학적 관점, 12주까지의 태아는 독자적 생존 가능성이 없으므로 생명권의 논의가 부적절하다는 의학적 관점이 충돌하나, 12주 이후의 태아는 일반적으로 생명권을 인정받으며 다수 국가에서 정당한 사유 없는 12주 이후의 낙태는 금지되어 있다.
태아의 생명권을 착상 시부터 인정한다면, 정당한 낙태의 범위는 극히 좁아진다. 미국 철학자 쥬디트 자비스 톰슨은 1971년 발표한 논문 “낙태에 대한 옹호(A defense of abortion)”에서 태아 생명권을 전적으로 인정하는 경우에는 낙태가 인정되기 어려우나, 두 가지 경우에서는 낙태가 윤리적으로 타당할 수 있다고 보았다.[1] 첫째, 임신 때문에 산모의 생명이 위험에 처한 경우, 둘째, 강간 등 불법적 행위로 인한 강제적 임신의 경우가 그것이다. 단, 톰슨의 주장은 태아의 생명권이 산모의 생명권과 대립하는 경우, 또는 임신 자체가 불법적인 행위인 경우를 제시한 것일 뿐이다. 흔히 낙태 관련 논의에서 엿보이는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태아의 생명권에 우선한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더 중요할 수 있지만, 그것이 태아의 생명권을 초월한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의 경우는 단지 배아 또는 12주 이전의 태아가 생명권을 지니는지 국가가 판단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뿐이다.
정리하면, 낙태를 둘러싼 논쟁은 두 가지로 벌어져 왔다. 첫째, 여성 권리 향상 운동은 여성이 안전한 낙태 시술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주장했다. 이때, 낙태 시술 가능성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태아의 생명권에 관한 규정이 필수적이었다. 둘째, 미국 대법원은 12주 이전의 태아에 대한 생명권 인정을 보류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낙태 결정은 사적 권리에 속하는 것으로, 국가가 이에 사법적 권력을 적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우리나라의 낙태 관련 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비교적 뒤늦게 관련 논쟁을 시작한 우리나라는 형법 제정 당시인 1953년부터 현행 낙태죄를 유지하고 있었다.[2] 1973년 모자보건법이 낙태 허용 사유를 우생학적 사유, 윤리적 사유, 범죄적 사유, 보건의학적 사유로 명문화했다. 이후 개정을 위한 노력이 몇 차례 있었지만 모두 실현되지 않았고, 한동안 학술적 차원에서 머물던 낙태 관련 논의는 90년대부터 빠르게 확대되어 갔다. 단적으로 2012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합헌 결정을 들 수 있는데, 당시 4대 4로 팽팽하게 의견이 대립하고 있음이 확인되었으나 동수였기에 해당 조항 폐지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당시 합헌 의견은 착상 이후 태아의 생명권을 인정하고, 낙태 처벌이 사라지면 낙태와 생명 경시가 만연할 것을 우려했다. 물론 이미 2008년 헌법재판소는 생명 단계에 따라 다른 법적 효과를 부여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낙태죄와 살인죄가 같지 않다는 사실도 태아의 생명권과 인간의 생명권이 법적으로 같게 취급되지 않는 사례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태아의 생명권 인정이 그대로 낙태의 절대적 범죄화로 귀결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시험관 시술에서 배아의 형성과 폐기가 이뤄진다는 점에서, 배아의 생명권을 근거로 하여 낙태에 죄를 묻는 것은 이제는 정당화되기 어렵다.
결국 문제는 낙태가 허용될 경우 더 많은 낙태 시술이 이뤄지고,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자리 잡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어떻게 답할 것인가이다. 이는 어떤 윤리 원칙이나 사고 실험에 근거한 답이 아닌,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한 확인이 필요한 문제다. 예컨대, 로 대 웨이드 판결 이후 미국의 낙태 시술 건수의 변화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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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 합법화 이후 미국 낙태율의 변화. 1984년 고점(36.4%)에 도달한 낙태율은 이후 꾸준히 감소하여, 2014년에는 로 대 웨이드 판결이 있던 1973년(19.6%)보다 낮은 수치(18.6%)를 나타냈다. 구트마허 연구소(Guttmacher Institute)는 다른 방식으로 낙태 관련 통계를 제시하는데, 이 연구소 또한 1973년 낙태율(16.3%)보다 2014년 낙태율이 낮은(14.6%) 것으로 보고하였다. 통계 자료는 CDC, 시각화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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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 합법화 이후 고공 행진하던 낙태율은 1990년대 이후 계속 감소했다.[3]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으나, 사전, 사후 피임약의 활성화, 피임 기구의 보급과 교육, 낙태 시술 진료소의 감소 등이 중요한 이유로 꼽힌다.
그렇다면, 최소한 미국에서 낙태 합법화가 더 많은 낙태 시술로 귀결되지는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물론 30년 이상 낙태율은 낙태 합법화 이전에 비교해 높았으며, 따라서 낙태 합법화가 낙태율을 줄인다는 주장은 불가능하다. 단, 현재의 추세로 볼 때, 낙태 합법화가 낙태의 만연을 조장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이 자료 또는 비슷한 다른 자료로 이 논쟁을 결론지을 수 있을까? 만약 고개가 끄덕여진다면, 그 이유 중 하나는 저 수치가 제시하는 사회적 선택과 낙태를 결정 내리는 개인적 선택에는 건널 수 없는 틈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삶의 지난한 상황 속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낙태라는 현실 앞에서 “고민하는 힘”
이제 다시 영화로 돌아갈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 낙태 관련 논의는 견해차가 크고, 다양한 함의를 지니고 있으므로 가볍게 접근할 수 없는 탓이다. 관련 논의가 알려주는 게 하나 있다면, 이론과 원칙이란 문제를 둘러싼 입장을 명확히 하여 논의가 타당성과 건전성을 확인하는 적실한 방법이지만, 구체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한 답을 주지는 않는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달리 표현해보자면, 낙태의 찬반을 말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삶의 맥락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겠다.
<24주>의 주인공 아스트리드는 아이를 낳길 원한다. 그것은 남편 마르쿠스 또한 마찬가지다. 영화에서 직접 제시되진 않지만, 그들은 충분한 상의 후에 아이를 가지기로 했다. 한국과는 달리 독일에서는 다운증후군으로 진단된 경우 임신 2기(4~6개월)에도 임신 중절이 가능하다. 즉, 아이가 다운증후군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상황에서 그들이 낙태를 선택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결심이 가볍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적어도 그는 자신의 경력 때문에 아이를 포기하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아들을 봐주던 보모가 그만두자, 멀리 떨어져 살던 엄마에게 손을 내밀어 어떻게든 아이를 돌볼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 했던 그이니만큼.
아스트리드의 결심이 무너지는 것은 자신의 바람이 아이의 미래와 충돌함을 알게 될 때다. 어찌 보면 끔찍한 심장 수술 과정을 재차 심장전문의에게 물어보는 그의 심정은 그것이 얼마나 아이에게 큰 고통일 것인지를 확인하려는 노력, 점차 가라앉아 가는 가족의 미래에서 지푸라기 하나라도 부여잡고 싶은 필사의 몸부림처럼 보인다. 과연, 나는 내 아이에게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나의 선택으로 아이에게 평생의 짐을, 고통을 지우는 것은 타당한 일일까. 어떤 식으로든 살아있기만 한다면, 그것이 무조건 더 좋은 일일까.
그의 결심을 굳힌 것은 심장 기형 아동 전문 센터를 방문해서 본 광경이었을지 모른다. 갓 태어난 아이, 성인의 두 손 크기밖에 안 되는 아이에게 가슴팍을 열고, 뼈를 쪼개고, 심장 수술을 받을 것을 강요할 수 있을까. 여기엔 어떤 답도 없으리라. 이 모든 일을 같이 겪는 마르쿠스가 끝까지 낙태를 반대하는 것, 그리고 낙태를 선택한다고 해도 그들에게 어떤 구원이나 위안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 무게를 오롯이 보여주고 있다. 결국, 선택 앞에서 부모는 고뇌할 수밖에 없다. 어떠한 윤리 이론이나 원칙도 삶을 다 포섭할 수는 없다. 아니, 우리는 삶을 완전히 다 파악할 수 없으며, 우리의 생각 밖에 항상 존재하는 삶의 잔여가 있다. 그저 원칙을 들이밀어 낙태를 금지해도 우리 주변에선 수많은 낙태 시술이 이뤄지고 있으며, 낙태를 허용해도 아스트리드와 마르쿠스는 고뇌한다. 그렇다면 낙태를 범죄라고 규정하는 식으로 단순하게, 너무도 단순하게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삶과 유리된, 헛된 그물망을 치려는 노력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생명윤리 논증으로 볼 때, 낙태 찬성 측과 반대 측은 모두 타당한 근거를 지니고 있다. 태아의 생명권에 대한 지루한 논쟁은, 결국 찬반 어느 쪽에 설 것인가를 결정하는 지표일 뿐 그것이 보편적인 논거가 될 순 없다. 찬성 측은 배아의 생명권을 주장할 것이며 그 또한 일리가 있다. 반대 측은 감각이나 독자 생존 가능성을 토대로 생명권을 부정하고 대신 자기 결정권이나 재생산권을 제시할 것이며 그 또한 타당하다. 여기에서 생명윤리학자 개인의 입장은 존재할지라도, 생명윤리 일반이 이 문제에서 답을 내릴 순 없다. 생명윤리가 해야 하는 역할은, 우리의 말로 다 옮길 수 없는 삶의 복잡다단한 얽힘 앞에서 낙태 결정을 놓고 함께 고민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고민 자체가 삶을 함께 견디어 나갈 힘이 되어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영화는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나는, 그토록 소망하던 아이를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 포기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질문 앞에서, 빌 클린턴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큰 힘을 발휘했던 표어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를 빌려 나에게 외쳐본다. “문제는 삶이야, 바보야.”
[참고문헌]
[1] Thomson JJ. “A defense of abortion.” In Humber JM, Almeder RF eds.
Biomedical Ethics and the Law. Boston: Springer (1976).
[2] 조국. 낙태 비범죄화론. 서울대학교 法學. 2013;54(3):695-728.
[3] Wind R. ″U.S. abortion rate continues to decline, hits historic low.″ Guttmacher Institute. Jan 17, 2017. https://www.guttmacher.org/news-release/2017/us-abortion-rate-continues-decline-hits-historic-low
김준혁/치과의사,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대학원생(의료윤리학)
junhewk.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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