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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7.13 11:04 수정 : 2018.07.13 11:21

미자와 옥자. 슈퍼 돼지 옥자는 미자의 말을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동물윤리의 쟁점 중 하나, “인지 능력이 있는 동물을 인간과 차별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떠올리게 만든다. 만약 고전적인 정의처럼 “인간은 생각할 수 있는 동물”이라면, 생각할 수 있는 동물은 최소한 인간과 비슷한 지위를 지녀야 하지 않는가? 또, 기형이나 외상 등으로 사고 능력을 상실한 인간이 사고 능력이 있는 동물보다 더 높은 지위를 지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지만 <옥자>는 이런 질문을 전면적으로 다루지는 않고, 누군가의 말처럼 여러 생각거리를 던지는 데에 충실하다. 출처: 네이버 영화

[김준혁의 의학과 서사]
(9) 물고 물리는 동물윤리

미자와 옥자. 슈퍼 돼지 옥자는 미자의 말을 이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동물윤리의 쟁점 중 하나, “인지 능력이 있는 동물을 인간과 차별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떠올리게 만든다. 만약 고전적인 정의처럼 “인간은 생각할 수 있는 동물”이라면, 생각할 수 있는 동물은 최소한 인간과 비슷한 지위를 지녀야 하지 않는가? 또, 기형이나 외상 등으로 사고 능력을 상실한 인간이 사고 능력이 있는 동물보다 더 높은 지위를 지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지만 <옥자>는 이런 질문을 전면적으로 다루지는 않고, 누군가의 말처럼 여러 생각거리를 던지는 데에 충실하다. 출처: 네이버 영화
이미 <설국열차>로 세계적인 명성을 날린 봉준호 감독이기에, <옥자>는 그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가 택한 배급 방식이 새 세기의 “콘텐츠 공룡” 넷플릭스였다는 점, 그리고 다원화가 치열한 갈등을 여러 지점에서 드러내고 있는 지금 또 하나의 진원(震源) 중 하나인 동물 보호에 관한 논쟁을 건드렸다는 점은 감독의 위치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한편, 이런 두 가지 돌출 점은 <옥자> 상영 이후 기존의 멀티플렉스 배급사가 점차 넷플릭스와 갈등의 골을 넓히게 된 흐름의 조짐으로, 또 채식주의 대 반채식주의 사이의 설전을 지피는 불씨로 타올랐다.

흥미롭게도, 이 지점들은 영화평에 관한 분석으로 이어진다. 네이버 영화의 <옥자> 140자평을 한번 살펴보자. 2018년 6월 25일 현재 <옥자> 140자평에는 17,761건의 평이 등록되어 있다. 아래 그림은 이 중 확인 가능한 10,000건을 모아 텍스트 분석을 한 결과이다.

네이버 영화 140자평의 텍스트 분석 결과. 왼쪽은 평점 9점 이상, 오른쪽은 평점 3점 이하를 준 140자평을 모아 명사를 추출하고서 워드클라우드 기법으로 시각화한 것이다. 긍정적인 의견에는 “생각”, “감동”이 두드러지는 반면, 부정적인 의견에선 “평점”에 대한 반발, “스토리”와 “재미”에 대한 비판이 보인다. 자료는 네이버 영화, 시각화는 필자
영화 <옥자> 개봉 광고. 넷플릭스 배급을 반대하며 멀티플렉스가 개봉을 거부하자 ‘옛’ 영화관들이 복고풍의 영화 광고를 실어 개봉을 홍보했다. 출처: IMDb
특히 10,000건 중 1점의 별점을 주어 영화를 혹평한 140자평 283개를 보면, <옥자>는 “재미없는” 영화다. (물론 영화에 관한 찬사가 훨씬 많다. 예컨대 10,000건 중 별점 10점을 준 평가자는 4,201명이었다.) 140자평이라는 분량의 한계로 재미없음의 이유를 다 알 수는 없지만, 분석 기법을 통해 평을 크게 세 묶음으로 나눠보면 서사에 대한 불만(“억지스럽고 유치하다”), 정서적 반발(“감동이 없다 또는 주장에 공감할 수 없다”), 불쾌감(“허무하고 관람 비용이 아깝다”)이 비친다.

물론 영화를 읽는 방식은 제각각이겠으며 완벽한 영화는 없기에 비판이 가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비판이 핵심 서사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한다면, 그 반발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좀 더 깊이 따져보는 것은 비평적 관점에서 유용한 일일 것이다. 이에 접근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동물윤리의 관점을 통해 곱씹어보려 한다. 이 과정은 동물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담론을 얼핏 살피는 통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먼저 영화의 네 등장인물이 상징하는 동물에 관한 네 가지 입장을 살펴보자. (결말에 관한 언급이 있습니다. 스포일러 주의!)

동물 보호의 두 입장, 동물권 옹호론자와 동물 복지론자

영화의 간략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윤리적 비난을 받던 아버지의 기업, 미란도 코퍼레이션을 회생하기 위한 전략으로 2007년 최고경영자(CEO)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튼 역)는 슈퍼 돼지 프로젝트를 발표한다. 우연히 발견한 슈퍼 돼지는 유전자 조작을 거치지 않고 자연 교배를 통해 26마리의 새끼 돼지로 번식한다. 이들을 전 세계 26개 농가에서 전통 방식으로 길러 10년 뒤 슈퍼 돼지 콘테스트를 열겠다는 것. 여기에 뽑혀 강원도의 산골에서 슈퍼 돼지 옥자를 기르던 주희봉(변희봉 역)의 손녀 미자(안서현 역)는 옥자와 자매처럼 지내왔다. 10년이 지나 콘테스트를 열기 전 슈퍼 돼지의 상태를 확인하러 온 조니 윌콕스(제이크 질렌할 역)는 옥자를 대뜸 최고의 돼지로 선정해, 미국으로 보내고 미자는 옥자를 되찾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대기업에 대항하려는 미자의 행보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로 보이지만, 여기에 에이엘에프(ALF; Animal Liberation Front, 동물 해방 전선)라는 단체가 끼어든다. 단체의 리더 제이(폴 다노 역)는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동물 학대를 고발하기 위해 옥자를 트로이의 목마로 이용하려 한다. 미자는 반대하지만, 통역을 맡은 케이(스티븐 연 역)는 미자가 동의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한편, 미자와 ALF가 옥자를 구하려고 벌인 소동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다. 세평을 염려한 루시는 미자와 옥자를 새 사업의 마스코트로 활용하기로 하고, 옥자는 물론 미자까지 뉴욕으로 불러들인다.

미자와 ALF의 구성원들은 같은 견해를 가지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둘 사이에는 명확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미자가 처한 특수한 상황을 잠시 보류하고, 미자가 동물을 바라보는 태도와 ALF가 동물을 바라보는 태도를 정리해보자.

미자는 옥자를 자신의 가족이라고 생각하며, 따라서 옥자에게는 특별한 권리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가족의 구성원은 다른 가족 성원이 어떤 대접을 받을만한지에 관한 견해를 가지는 법이니까. 이런 입장을 총칭하는 동물윤리의 용어가 동물권(animal rights)이다. 동물이라는 존재는 존재함으로 특별한 권리를 지닌다. 마치 인간이 존재함으로 인권을 지니듯이. 이런 입장을 가진 동물권 옹호론자는, 이 권리를 위반하거나 이를 넘어선 행위를 동물에게 하는 것을 윤리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ALF는 동물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동물을 학대하거나 죽이는 것은 고통의 총량을 증가시킨다. 여기서 이들은 동물을 보호해야 한다고 선언하는데, 이는 선한 것은 행복의 총량과 고통의 총량으로 결정되며, 따라서 고통의 총량을 증가시키는 것은 윤리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고 보는 탓이다. 이런 생각은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기 때문에, 이들의 궤적은 필연적으로 비폭력을 향한다. 이런 입장을 동물윤리에서는 동물 복지(animal welfare)라고 부른다.

둘 사이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옥자에 대한 미자와 ALF의 태도이다.[1] ALF는 다수의 행복을 위해 옥자가 잠깐 고통을 당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현실적인 방식일 것이다. 루시의 계획을 망치는 것은 미자의 항의가 아니라 ALF가 옥자를 통해 몰래 녹화한 사육장 내부의 비참한 풍경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옥자를 가족으로 여기는 미자에게, 옥자의 고통은 허용될 수 없는 일이다. 옥자의 고통이 엄청난 선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해도 말이다.

자본주의의 두 입장, 대중영합주의와 금전만능주의

미자의 반대편에 선 미란도 코퍼레이션은 어떨까? 루시는 아버지에 이어 낸시가 망쳐놓은 기업 이미지를 회생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다가 슈퍼 돼지 프로젝트에 도달한다. 그는 프로젝트 발표에서 슈퍼 돼지가 ‘비 유전자 변형 생물(non-GMO)’이며 ‘친환경’적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프로젝트의 방향성은 동물을 사랑하는 “애니멀 매직 라이브쇼”의 진행자 “닥터 조니”를 내세운 것에서 잘 드러난다. 수의사이자 동물 과학자인 그는 산골에서 살아온 미자까지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로 “티비(TV) 동물농장”과 비슷한 장수 프로그램의 대표 인물 격이었다. 동물을 대상으로 삼는 프로그램은 동물과 사람이 만드는 서사를 바탕으로 하며 동물과 사람의 공존을 통해 감동을 전달하려 한다. 즉, 루시가 이끄는 미란도는 친환경 기업으로 탈바꿈하여, 닥터 조니의 이미지처럼 공존을 표방하여 그동안의 비난을 일소하려 한다.

옥자를 비롯한 슈퍼 돼지는 프로젝트에 안성맞춤이다. 유기농을 찾는 소비자의 기호를 충족하며, 환경 오염에 관한 염려도 종식한다. 무엇보다 10년 간의 슈퍼 돼지 프로젝트 자체가 감동을 유발하는 기제이다(“아메리칸 아이돌”부터 최근 방영 중인 “프로듀스 48”까지, 참가자의 경쟁과 화합이 만들어내는 서사에 주목하는 오디션 프로가 이에 대응한다). 각 나라의 전통적인 사육방법을 찾아가는 지역성과 자연환경에 더해 영특한 슈퍼 돼지와 사육자 사이의 애정까지. “정글의 법칙”은 가볍게 넘어설 수 있는 콘텐츠의 탄생이다. 게다가 어떤 돼지고기보다 맛있기까지 한다면, 루시의 전략은 흠잡을 데 없이 보인다. 여기에 자본의 대중영합적 태도라는 이름을 붙이면 좋겠다.[2]

루시와 낸시, 1인 2역을 소화한 틸다 스윈튼의 캐릭터 포스터. 그는 이상을 가지고 회사의 이미지를 끌어올린 구원자이지만, 도살자, 거짓말쟁이, 소시오패스이기도 하다. 이렇게 영화는 이중성을 가진 여러 인물을 배치하고 그들이 엮어내는 갈등을 소극으로 담아낸다. 인간이 동물에게 취할 수밖에 없는 이중적인 자세를 상기시키며. 출처: IMDb
문제는 이 프로젝트가 기만 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비 유전자 변형 생물이라는 슈퍼 돼지는 사실 수많은 유전자 실험 끝에 탄생한 두말할 나위 없는 GMO 생물이다. 닥터 조니 개인은 동물을 사랑했는지 모르지만, 그는 옥자에게 직접 잔혹한 일을 행한다. 그가 술에 취한 것이 자괴감 때문이라 해도, 그가 매체에서 내보인 모습과 실험실에서 행한 행동 사이의 괴리를 용서받을 수는 없다. 슈퍼 돼지 프로젝트는 친환경과 최상의 맛이라는 두 진실 뒤에 수많은 거짓을 숨기고 있으며, 이 거짓이 폭로되었을 때 허상으로 구축된 이미지는 한순간에 허물어진다.

한편,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CEO 루시에겐 쌍둥이 자매 낸시 미란도(틸다 스윈튼 역)가 있다. 원래 기업을 이끌던 것은 낸시였으나, 낸시가 호수에 독극물을 무단 투기하다 사고가 발생하자 그 자리를 루시가 이어받았다. 낸시에게 모든 것은 상품이다. 행동을 결정할 때 그의 지침은 이익의 존재 여부이다. 이익이 된다면 어떤 일이든 행할 수 있는 낸시를 금전만능주의의 현현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모든 것은 시장의 가격으로 결정되며, 따라서 모든 가치는 수량적이라고 믿는.

그는 철저히 계산적이기에 회사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빠르게 의사결정을 내린다. 더는 시장가치가 없다고 판단된 루시의 프로젝트는 그 순간 폐기되며, 슈퍼 돼지들은 홀로코스트의 재현으로 내몰린다. 하지만, 그 계산식은 서사의 절정에서 옥자를 살리는 답을 내놓기도 한다. 미자는 옥자의 값을 치러 옥자가 자신의 가족이 되었다고 믿었지만, 할아버지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미자에게 옥자의 값이라고 속이고 만든 황금 돼지는, 옥자가 절체절명에 처한 순간 낸시에게 제시되어 본래의 기능을 행사한다. 홀로코스트를 배경으로 한 황금 돼지와 슈퍼 돼지 옥자의 치환은 기독교의 대속(代贖) 서사를 떠올리게 만들지만, 그 구원은 낸시의 시장 논리 없이 성립되지 않는다.

“채식주의” 영화라고 말하기 전에

미자와 ALF, 루시와 낸시 중 어느 쪽이 옳을까? 미자는 결국 옥자만 구했을 뿐, 나머지 모두의 죽음 앞에서 무력하다. ALF의 활동은 루시의 프로젝트를 분쇄했지만, 낸시를 호명하며 더 큰 비극을 끌어낸다. 루시는 친환경 기업으로 이미지를 쇄신하고 환경에 피해를 적게 주는 방식을 제시했지만, 거짓이 폭로되는 순간 허물어진다. 낸시는 돈밖에 모르는 철면피지만, 그의 시장 논리가 옥자를 살린다. 이 물고 무는 원환이 <옥자>를 반자본주의 영화로도, 자본주의를 긍정하는 영화로도 읽을 수 있게 만드는 바탕일 것이다.[3]

그렇다면,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기는 애매하다는 생각이 든다. 위의 논리를 따라간다면, 어느 쪽이 우월하다고 볼 수 없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미자가 ALF보다, 미자와 ALF가 루시보다, 루시가 낸시보다 우월한 처지에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미자와 ALF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길을 걸어갔고, 이질적인 입장이 서로 마주칠 때 나는 소음과 충격을 견뎌냈을 뿐이다. 루시와 낸시는 분명 잘못했지만, 그들이 더 악하다고 보긴 어려울 것 같다.

어쩌면 동물윤리를 둘러싼 논의도, 더 가까이는 채식과 육식을 둘러싼 논의도 비슷한 선상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동물윤리를 주장하는 누군가가 그에 반대하는 누군가에 비교해 윤리적으로 우월한 것은 아니다. 채식을 주장하는 누군가가 육식을 주장하는 누군가에 비교해 윤리적으로 우월한 것은 아니다. 그저 동물에게 권리가 있다는 것이, 또는 동물의 고통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이 그 누군가에게는 당위로 다가올 뿐이며, 그 사람의 삶이나 이야기에 귀 기울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이 그 길을 같이 걸어가게 될 뿐이다. 생명윤리는 항상 그렇게 성장해 왔다. 한쪽 입장이 명명백백하게 옳아서 한순간에 세상이 바뀌는 식은 아니었다. 누군가 새로운 의무나 아픔에 주목하고 변화를 이야기할 때, 잔잔한 수면에 떨어진 조약돌이 되어 파문을 일으켜 왔던 것.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본다. 글쎄, 초록색과 분홍색의 담배를 마주하여 함께 나누는 쌍둥이 자매, 루시와 낸시는 항상 승리하고 있을 것이다. 한 개인이, 작은 단체가 이들에 맞서 환상적인 역전승을 거두는 모습을 떠올리긴 어렵다. 단, 영화 마지막에서 미자는 옥자와 함께 집으로 돌아와 같이 살아가며, 제작진 소개 자막이 지나간 뒤 나오는 후일담에서 출소한 ALF는 다시 새로운 저항을 준비한다. 아마 이 정도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것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것이 우리에게 시급히 던져진 과제가 아닐까?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1] 두 입장은 생명윤리의 두 입장, 의무론(deontology)과 공리주의(utilitarianism)에 상응한다. 공리주의에 기반한 현대 실용 윤리의 거두 피터 싱어가 동물 복지론을 대표하고 있다. 싱어는 인간의 행복과 고통을 다른 차원으로 놓고 구분하는 것을 말한 리처드 라이더의 표현 종 차별주의(speciesism)를 계승, 비판한다. 한편 동물권 이론은 1983년 철학자 톰 리건이 저술한 <동물권의 사례(The case for the animal rights)>에서 출발하며, 악화의 원리(the worst-off principle, 개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개인은 상황이 악화되고 있는 존재를 도와야 한다는 입장)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2] 우리가 흔히 포퓰리즘이라고 부르는 대중영합주의는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 표현이다. 문강형준은 다수 문헌이 ‘인민’을 우선하고 그 대척점에 ‘반인민(엘리트, 외국인, 부유층 등)’을 놓는 것을 대중영합주의의 특징으로 보고 있다고 정리하였다. 글의 제목 “양날의 칼”처럼, 대중영합주의는 양면적이며 서로 반대되는 양상을 띠기도 한다. 여기에선 루시의 친환경 행보가 지닌 양면성에 주목하였다. 문강형준. 양날의 칼: 포퓰리즘, 민주주의, 문화행동. 문화/과학 71호. https://blog.naver.com/caujun/60174312789

[3] 부산에서 봉준호 감독이 가졌던 관객과의 대화가 이런 다양한 독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김성화. 부산 온 봉준호, 영화 ‘옥자’ 결말은… ‘자본주의와 타협한 게 아니라’. 국제신문. 2017년 7월 2일.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70702.99002000020

김준혁/치과의사,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대학원생(의료윤리학) junhewk.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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