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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7.11 07:59 수정 : 2019.07.12 09:58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출처: IMDb

김준혁의 의학과 서사 (20)
드라마 ‘킹덤’과 음식 윤리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출처: IMDb
2019년 초 유료 인터넷 비디오 스트리밍 서비스인 넷플릭스는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국내 진출한 지 2년 동안 큰 인기를 끌지 못했던 넷플릭스가 2018년에서 2019년 넘어가면서 500% 성장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1월 독점 공개작이었던 드라마 ‘킹덤’이 큰 역할을 했지요. 많은 분이 보셨겠지만, ‘킹덤’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좀비가 나오는 장르 드라마입니다. 이 드라마가 사람들을 사로잡은 것은 ‘싸인’, ‘시그널’ 등 유명 작품을 쓴 김은희 작가가 각본을 맡아 그 진가를 잘 드러냈기 때문이겠지요. 연출도 연출이지만, 무엇보다 드라마 전체 줄거리가 사람들에게 강렬하게 다가왔으니까요.

실제 역사와는 조금 다른 ‘킹덤’ 속 조선은 끔찍한 굶주림에 처해 있습니다. 모두 먹을 것이 없어 그야말로 사람이라도 잡아먹으려고 하는 상황에서, 정치적 다툼이 극심하여 패권을 잡으려는 영의정 조학주(류승룡 분)와 세자 이창(주지훈 분)이 서로 칼을 겨누고 있지요. 이런 상황 속에서 드라마는 한 의원의 모습을 잡아내며 시작합니다. 이미 시작 부분에서 수많은 침이 박혀 있고 향이 피워진 누군가를 카메라가 여러 각도에서 비췄기에, 의원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해 보여요. 그런데, 제자인 것으로 보이는 어린 소년과 함께 비밀스럽게 어딘가를 방문하는 그들의 모습은 어딘지 의심스러운 구석을 띠고 있습니다.

조학주가 요청하여 의원 이승희(권범택 분)가 이미 죽은 왕을 살려내기 위해 ‘생사초’라는 약초를 사용해 약을 만들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 약을 먹고 되살아난 왕은 살아있지만 산 것이 아닌 ‘언데드(undead)’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서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의원 곁에 있던 제자 또한 왕에게 공격을 당해 죽게 되지요. 이 제자의 시신 때문에 사람들은 죽었으되 죽지 않은 자, 좀비가 되어 사람들을 공격하고 감염시키지요.

작품을 통해 김은희 작가는 ‘배고픔’을 핵심어로 하여 지배층과 서민 모두를 관통하고 있는 욕망을 그려내고 싶었다고 해요.[1] 결국 모두 좀비가 되어 어떤 의미에선 평등해진 세상을요. 이렇게 먹는 것에 관한 이야기판 위에서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생각해봅니다. 물론 세계 각지엔 굶주리고, 기아로 고통받고 죽어가는 사회가 있지요. 우리 주변에도 배고픔에 허덕이는 사람이 있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이자 세계 10위 경제 대국인 한국은 배고픔을 어느 정도 해결한 상태라고 보아도 좋겠지요. 하지만 배고픔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음식과 관련된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이제 우리 앞엔 ‘음식 윤리’라는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음식 윤리란, 우리가 먹는 음식에 관해서,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대상에 관해 질문해요. 우리는 어떤 것을 먹고 있는지, 그것은 어떻게 하여 우리 식탁에 올라오는지를 문제 삼지요. 매일 식탁에 올라오는 음식은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걸까요? 이 질문과 관련 있는 이야기를 ‘킹덤’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왜 이렇게 이야기가 이어지느냐고 생각하시는 분들께 드라마 한 장면을 그려드리려 해요.

음식에 대한 금기와 인간성

다시 제자의 시신 이야기로 돌아갈게요. 의원과 한양길을 함께 한 제자 단이(김현빈 분)는 왕에게 살해당하고, 의원은 제자의 시신을 수레에 싣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고향 동래에서 지율헌이라는 의료 시설을 운영하고 있지요. 시설에는 의원에게 치료를 받는 여러 병자가 모여 있습니다. 문제는 말씀드린 것처럼, 시설에 지내고 있는 모두가, 아니 드라마에 그려지고 있는 조선 사회 전체가 배를 곯고 있다는 상황이라는 거예요. 묘사된 장면은 조선 현종 때 일어난 경신 대기근(1670~1671년)을 떠올리죠. 17세기 소빙하기 기후 영향이었다고 하는 이 사태로 전국에 흉작으로 90만~150만 명이 사망합니다. 당시 인구가 1200만~1400만명이었음을 고려할 때 이는 사회를 뒤흔드는 파멸적인 사태였지요.

시설을 찾아온 인물 중에는 영신(김성규 분)이라는 인물도 포함되어 있지요. 영신이 사슴을 잡아왔다며 사슴 고기 국을 돌리기 시작합니다. 한편, 의원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지율헌에서 일하던 의녀 서비(배두나 분)는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병자들을 돌보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서비는 약초를 캐러 나갔다가 돌아와서 사람들이 음식을 먹고 있는 광경에 놀라죠. 자신 또한 오랫동안 굶주려 있었거든요. 부엌에서 영신을 만난 서비는 같이 음식을 먹을 뻔하지만 참고, 영신에게 출처를 캐묻습니다. 하지만 그는 당당합니다. 산에서 사슴을 잡았다는 거지요. 그 말에 음식을 들려던 서비는 그릇에서 엄지손가락을 보고 놀라서 그릇을 떨어뜨리고 맙니다. 사슴 고기라던 음식은 사실 단이의 시신이었어요.

어떻게 사람을 먹을 수 있느냐고 서비가 추궁하지만, 영신은 다 굶어 죽게 생겼는데 어떤 방법이 있냐고 되묻습니다. 안 그래도 병약해져 있는 사람들한테 음식도 못 주면 다 죽을 텐데 의원이 무슨 소용이냐는 거지요. 서비는 답을 찾지 못합니다. 이미 푸지게 먹은 사람들한테 진실을 알려봐야 오히려 불편만 끼칠 것은 자명한 사실이기도 하지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이렇게 먹은 것이 사람들에게 문제를 일으킵니다. 시체를 먹은 사람들이 밤에 갑자기 쓰러져 죽더니 좀비로 되살아난 것이죠.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은 지율헌의 병자들은 좀비로 화한다. 주어진 음식이 어떤 것이며 어디에서 왔는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음식을 만든 사람이 아닌 음식을 먹는 자에게 돌아온다는 섬뜩한 경고로 읽을 수 있는 장면이다. 출처: IMDb
사실 ‘킹덤’에 나오는 좀비는 대응하기 쉬운 편이죠. 낮에는 어두운 곳에 숨어 있고 밤에만 움직이는 데다가 잠복기(감염 이후 발병할 때까지 시간)가 매우 짧기 때문에, 적절히 격리하기만 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보이는 무지함과 정치적 상황이 겹치면서 ‘킹덤’의 서사는 날 선 차가움으로 흘러갑니다.

나중 이야기는 놓아두고, 여기까지를 정리해볼게요. 한 의원이 ‘생사초’를 가지고 죽은 왕을 되살립니다. 되살아난 왕은 살았으되 산 것이 아닌 상태로 있으면서 사람들을 공격하지요. 한 아이가 공격당하고, 이 시신이 부산 동래 땅까지 옮겨집니다. 이 시신 자체는 문제가 없었어요. 사람들이 시신을 먹기 전까지는. 시신을 먹은 사람들은 죽지만, 완전히 죽지 않은 상태로 다른 사람들에게 덤벼들어 물어뜯지요. 왕을 되살리는 사건이 정치적 음모였다면, 시신을 먹는 사건은 윤리적 파국입니다. 결국, 좀비가 되는 것은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은 사람들에게 돌아온 화(禍)였던 것이죠.

사람을 먹는 것이 그렇게 잘못일까요? 아시겠지만 식인 풍습은 고대 사회 전 세계에서 발견됩니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사람을 먹는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긴 어렵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먹는 것’이 어떤 자연적, 신적 법칙을 위배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해당 사회가 지닌 규칙이겠지요. 적어도 고대 이후 모든 사회는 식인 풍습을 멀리했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인간을 먹을 것으로 상정하는 일이 지니는 파괴적인 힘이 크게 작용했다고 보여요.

우리가 대상을 분류하는 방식 중에는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의 분류가 있지요. 현대에서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분류되는 대상은 가공, 처리하는 산업적 과정을 적용하는 것이 허용됩니다. 반면, 먹을 수 없는 대상은(독이 있거나 해서 먹지 않는 대상과는 달리) 이렇게 처리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요. 개를 둘러싼 논쟁을 생각해보면, 개를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분류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 충돌이 근저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나 돼지를 애완용으로 기를 수 있지만, 이들은 다수가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분류하기에 애완동물로 기르는 것은 선택이고 축산법에 따라 가공과 처리를 규제받습니다. 반면, 서구 영향이겠습니다만 개는 먹을 수 없는 것으로 분류하기에 축산법에 관련 규제가 없지요.

사람을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분류하는 것은 문화적 금기 사항입니다. 이 금기 위반과 정치적 음모가 우연히 결합했을 때, 사람들은 ‘죽지 않은’ 존재로 변화하지요. 사실, 드라마 속 서사적 요소로 볼 때 이 변화를 나쁜 것으로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킹덤’에서 좀비로 변화한 사람들은 사회의 변화를 가져오는 외부적 압력으로 작용하게 되니까요. 하지만 윤리적 층위에서 볼 때, 이 변화는 잘못에 대한 고발입니다. 먹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먹지 말아야 합니다. 심지어 자신이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 해도.

이런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의 구분은 2008년 한국 사회를 흔들었던 광우병 논란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결국 충분치 않은 자료를 바탕으로 논쟁이 확산하면서 빚어진 정치적 충돌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과학적 소통이 부재하여 발생한 논란이라고 봐야 할 사건 뒤에는 식량 주권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식량 주권, 즉 먹을 것을 우리가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 또한 먹어야 할 것을 구분하는 연장선에 있습니다.

공장식 축산업이 가져오는 피해와 음식 윤리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하고 먹지 말아야 할까요? 오랜 채식주의 논쟁을 떠올리시는 분들이 많겠지만, 여기에선 ‘고기를 먹으면 안 돼’라는 주장을 내놓지는 않을 겁니다. 단지, 우리가 먹는 음식이 필요 이상 해를 끼치고 있으며, 같은 식자재를 얻을 수 있는 대안이 있다면 대안을 선택하는 것이 윤리적이지 않을까요?

이런 주장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윤리학자 피터 싱어(Peter Singer)겠지요. 그가 쓴 “동물 해방”은 동물 또한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는 동물권(animal rights)을 정립한 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그가 기대고 있는 것은 종차별주의(speciesism)라는 견해인데요, 이는 인간의 이익을 비인간의 이익보다, 인간의 위해를 비인간의 위해보다 우선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생각입니다. 인간과 동물은 모두 고통을 받으며 이 고통 감각은 동물, 특히 척추동물에서는 같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신체적 고통에 있어 외상 부위에서 발생한 고통 신경 신호가 뇌로 전달되는 것은 척추동물에서 공히 같은 방식으로 일어나니까요. 그렇다면, 동물이 느끼는 고통을 가치 없는 것이라 보는 일은 인간을 특권화하기에 나타나는 현상일 겁니다.

현재, 고기를 먹는 일은 많은 경우 고통을 필요 이상으로 수반하고 있습니다. 특히, 공장식 사육을 통해 고기를 생산하는 현재의 방식은 동물에게 과도한 고통을 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동물을 먹는 일을 피하는 선택이 윤리적일 겁니다. 이것은 채식주의를 지지하는 윤리적 근거 중 하나지만, 이 주장이 채식주의와 같은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자연스럽게 죽은 동물의 고기를 먹는 일은 동물에게 어떠한 고통도 가하지 않는 것이죠.

오히려 생각해봐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는가가 아닐까요. 아시겠지만 우리가 필요한 것을 위해 동물에게 고통을 가하는 과정은 우리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식탁에 올라온 소고기가, 돼지고기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는 가려져 있지요. 심지어 우리는 먹은 동물을 직접 본 적도 없습니다. 직접 동물을 키우거나 사냥해야 했고, 따라서 동물을 직접 대면해야 했던 고대 수렵채집사회 구성원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에서 사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우리는 먹을 것이 어떻게 우리 손에 들어오는지, 그것을 처리하는 과정이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피터 싱어와 짐 메이슨(Jim Mason)이 공저한 “죽음의 밥상”에는 식탁으로 올라오는 고기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관한 생생한 보고들이 담겨 있습니다.[2] 예를 들면, 미국에서 닭은 A4 용지 한 장 크기도 안 되는 닭장에서 길러집니다. 닭은 빠르게 성장하도록 개량되었기 때문에 뼈가 상대적으로 약해 대다수의 닭이 다리를 절고, 골 질환으로 고생합니다. 닭장에서 배설물을 치우지 않기 때문에 호흡기 질환에 걸립니다. 서로 쪼지 못하게 닭은 부리를 자르는데, 부리는 인간의 혀처럼 많은 감각 신경이 모여 있는 부위입니다. 이를 편의를 위해 마취 없이 자르는 것이 태반이라는 거지요.

공장식 축산업은 고기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비용을 줄이기 위해 동물에게 과도한 고통을 가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위 사진은 2014년 다큐멘터리 ‘소에 대한 음모(Cowspiracy)’의 한 장면으로, 그야말로 발 디딜 틈 없이 빽빽한 공간에서 사육되고 있는 닭이 보인다. 출처: IMDb
업체에서 나오는 배설물과 폐기물은 주변 환경이 처리할 수 있는 양을 넘어섭니다. 싱어와 메이슨이 제시하는 예를 살펴보면, “서섹스 카운티에서는 매년 2억 3200만 마리의 닭을 생산하며 … 해당 카운티는 겨우 400만 마리의 닭에서 나오는 닭똥만을 처리할 수 있음이 밝혀졌다. 닭똥에 함유된 영양소의 약 절반은 물에 녹아서 강물에 흘러들거나, 지하수에 스민다. … 이 지역의 강과 해역은 이 과잉 영양소들 때문에 조류(藻類)로 뒤덮이고 있다 … 이제 체사피크 만은 물고기나 게, 굴, 그리고 다른 생태적 대표 종들이 생존할 수 없는 ‘죽음의 바다’가 되고 말았다.”

소와 돼지 또한 같은 상황에 부닥쳐 있습니다. 비위생적 환경에서 사육하다 보니 항생제 없이 키울 수 없고, 이들이 환경에 미치는 위해도 막대합니다. 더구나, 알려져 있다시피 축산업에서 일하는 것은 고된 일에 보수도 적어 국내도 외국인 노동자의 노동력에 많이 기대고 있는 형편이죠. 이들에게 적절한 노동 환경이 주어지는 일은 요원합니다.[3] 국제앰네스티는 2014년 한국 농축산업 이주노동자 실태에 관한 보고서에서 상황을 “인신매매, 강제노동, 노동착취”로 요약했지요.

그렇다면, 현재 우리 밥상에 올라오는 것들은 많은 것들을 대가로 치르고 있는 셈입니다. 먼저 가혹한 고통이 일상화된 환경에서 동물들은 편의를 이유로 고통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환경 오염은 생산 비용에 누락되어 있고 이를 당장 우리가 지급하진 않을지라도, 후손들에게 엄청난 빚으로 돌아올 겁니다. 큰 이자와 함께 말이죠. 더구나, 현재 공장식 축산업을 유지하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는 열악한 조건에 내몰리고 있습니다.[4] 그렇다면, 이렇게 큰 피해를 주면서 우리 식탁에 올라온 고기는 피하고 이를 ‘먹지 말아야 할 것’으로 분류하는 것, 고통을 최소화하고 환경을 보호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방식으로 사육된 고기를 선택하는 것이 최소한의 윤리는 아닐까요.

가축과 인간이 함께 행복하기 위하여

“가축이 행복해야 인간이 건강하다”를 쓴 박상표 수의사는 책에서 가축이 행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윤리적 이상일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건강을 지키기 위한 현실적 필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5] 좋은 고기를 먹기 위해 가축에게 복지를 제공하는 것은 필수적이라는 것이지요.

결국, 동물 복지와 노동자 인권은 우리가 어떤 음식을 먹을 것인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동물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가하지 않는 대안적인 농축산업 모형이 있지요. 소위 ‘유기농’이라는 이름이 붙는 것이 아니라도, 동물 복지를 상당히 보장할 수 있는 선을 정하고 이를 지키는 축산농가에 인증을 주며 이런 제품의 생산과 판매를 촉진하는 방안이 있겠지요. 고기를 안 먹을 필요는 없지만, 조금 줄이고 좋은 고기를 먹기 위한 소비를 선택하는 것은 건강을 위해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회식 때마다 삼겹살로 배를 채워야 할 이유는 없지요.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은 윤리적 당위와 실용적 선택 모두를 위한 선택이다. 2004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슈퍼 사이즈 미’는 한 달 동안 맥도널드에서 햄버거와 함께 슈퍼 사이즈(super-size, 한때 미국 등지 패스트푸드에서 제공한 프렌치프라이, 탄산음료 크기 선택지로 엄청난 양의 감자와 콜라를 제공했다)만을 먹은 주인공의 몸이 금방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이런 논의는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점차 비만 지수가 높아지고 ‘배부름’이 문제가 되는 현재, 이런 ‘배부른 소리’도 점차 많이 들려야 하는 시점이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의식주가 인간에게 필요한 3대 요소라면, 그중 하나인 음식에 관해 깊이 고민하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일 테니까요.

다시 ‘킹덤’의 장면을 떠올립니다. 내 앞에 있는 먹을 것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지 않고 그저 허기를 채우는 데 바빴던 사람들은, 결국 인간으로 남아 있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거꾸로 말하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말할 때 그가 무엇을 먹는지 또한 무척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라는 이야기이기도 하겠지요. 우리는 좀 더 좋은 음식을 선택해야 할 때가 된 것은 아닐까요. 단지 우리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이 지속 가능할 수 있기 위한 방법으로 말입니다.

김준혁/치과의사·부산대 의료인문학교실 박사과정(의료윤리학) junhewk.kim@gmail.com

참고문헌

1. 김윤정. 좀비돼 ‘식욕’만 남은 왕, ‘킹덤’ 김은희가 여기 숨긴 의도. 오마이스타 [Internet]. 19년 1월 31일 [cited 19년 7월 5일]. Retrieved from: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_w.aspx?CNTN_CD=A0002508435.

2. Singer P, Mason J. The Ethics of What We Eat. 함규진, 옮김. 죽음의 밥상. 파주: 웅진씽크빅; 2008.

3. 이문영. “한국은 이주노동자 인신매매국”. 한겨레21 [Internet]. 14년 10월 22일 [cited 19년 7월 8일]. Retrieved from: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38161.html.

4. 정준호. “한국의 인권은 왜 외국인에겐 적용 안 될까요”. 한국일보 [Internet]. 18년 2월 20일 [cited 19년 7월 8일]. Retrieved from: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802200442029486.

5. 박상표. 가축이 행복해야 인간이 건강하다. 일산: 개마고원;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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