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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5.18 08:57 수정 : 2018.05.18 09:23

“과거 우리 사회가 농업에서 산업 사회로 넘어갈 때 즉, 정부가 빠른 실행을 발휘해야 하던 시절에 유효한 체계를 4차 산업혁명을 부르짖는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2017년 10월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 에스플렉스센터에서 열린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 출범식 및 1차 회의에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유영민 장관이 발표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조천호의 파란하늘]
국립연구기관 내부역량 향상 집중토록
인력 채용 통제 걷고 자율 보장 필요
허울뿐인 책임운영기관 홍보·숫자에 매몰
국가 문제 해결하는 전위로 바로 세워야

“과거 우리 사회가 농업에서 산업 사회로 넘어갈 때 즉, 정부가 빠른 실행을 발휘해야 하던 시절에 유효한 체계를 4차 산업혁명을 부르짖는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2017년 10월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상암동 에스플렉스센터에서 열린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 출범식 및 1차 회의에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유영민 장관이 발표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올해 2월, 정부는 ‘제4차 과학기술 기본계획(2018-2022)’에서 현재 드러나는 국가적 문제를 과학기술을 통해 해결하겠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우리나라 과학기술은 집권한 정부가 정책을 집행하는 수단이다. 따라서 녹색혁명, 창조경제, 4차 산업혁명 같은 구호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이 강하다. 국가 과학기술 체계의 구체적인 문제는 다루지 않고, 어느 정부나 그러했듯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를 늘리겠다, 과학기술인을 우대하겠다 등 시혜성 공약이 제시되었다. 내용에서는 이전 정부와 뚜렷한 차이가 없는 기술 항목이 나열되었다. 그리고 기본계획의 4대 전략 중 하나인 ‘과학기술로 모두가 행복한 삶 구현’은 국립연구기관이 주도해야 하는 분야이지만 그 역할을 다루지 않았다.

항상 문제는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이다. 국가 과학기술 정책은 개별 연구기관의 개발 프로그램을 수집하고 조정하는 것만으로 될 수 없다. 과학기술 정책은 오랫동안 적체된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해결 방안 제시, 통합과 집중이 이루어지는 전략과 우수한 연구원을 키워낼 수 있는 조직이 핵심이다. 이를 기반으로 하지 않은 정책은 구호를 내걸었으되 그것을 추진할 역량을 가질 수 없다.

국립연구기관은 민간부문에서 담당하기 어려운 공공복리 증진 및 국가행정 목표의 구현에 필요한 기상·기후, 방재, 보건, 환경, 농업, 수산, 산림, 축산 등의 연구개발을 수행한다. 이 분야는 국가의 기본적인 임무인 시민의 안전, 건강과 생존을 담당하며 그 사회적 파급력과 불확실성이 점차 커짐에 따라 그 역할도 중요해지고 있다.

국립연구기관은 각 부처에 소속되어 관료에 의해 지배를 받으므로 국가 과학기술 체계에서는 그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과학기술 정책은 연구개발 경험이 없는 관료가 주도한다. 과거 우리 사회가 농업에서 산업 사회로 넘어갈 때 즉, 정부가 빠른 실행을 발휘해야 하던 시절에 유효한 체계를 4차 산업혁명을 부르짖는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오늘날 과학기술로 해결해야 할 국가적 문제는 복합적이므로 개별 과학기술로는 대부분 해결할 수 없다. 전문성이 낮으면 아무리 모으고 연결하더라도 수준 자체가 떨어진다. 즉, 관료가 주도할 일이 아니다. 실질적 가치 창출을 할 능력이 없다 보니, 연구개발 전략은 개발도상국형 기획 방식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던 개발시대에나 유효했던 기관 설립에 몰두한다. 소속기관, 산하기관, 사업단이나 특화센터 등을 만들어 댄다. 뭔가 일을 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데는 효과적일 수 있으나, 비슷한 연구개발을 하는 조직의 난립으로 인재의 역량을 모을 수 없고 기관 간에 업무 충돌과 혼란이 일어난다.

이른바 선진국의 국립연구기관은 내부 역량을 키우는 데 집중한다. 국가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구개발은 각 부분의 연결에 중점을 둔 시스템적인 지식이 필수적이다. 융합 과학기술의 그 깊이가 깊으면 깊을수록 창조적이고 유연한 적용이 가능하여 새롭고 다양한 정책을 펼칠 수 있다. 그러므로 국립연구기관의 역량을 결정하는 시스템 차원의 기술은 아웃소싱 대상이 될 수 없다.

행정기구이자 연구조직의 성격을 동시에 지닌 기관의 경우에는 그 핵심조직을 연구개발에 둘 필요가 있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의 홍성주 박사는 실력기반의 연구조직이 갖는 문화적 특수성을 존중하는 것이 관료 통제에 두는 것보다 과학기술 성과의 우수성을 더 높일 방안이라고 주장했다. 이미 영국 기상청, 미국 국립보건원(NIH)과 국립항공우주국(NASA)은 이러한 체계를 갖추고 있다.

영국 기상·기후 최고는 대학 아닌 기상청

연구개발에서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연구수준은 인력수준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 예로 기상·기후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 기관은 대학이 아니라 영국 기상청이다. 영국 기상청은 이를 바탕으로 대국민 기상서비스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즉, 연구개발 수준이 국가적 문제 해결 수준을 결정한다. 이 때문에 다른 선진국 기상청도 우수인력 확보에 집중하고 있다.

우리나라 국립연구기관의 연구원 채용은 우수한 사람을 뽑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으로 운영된다. 연구관과 연구사를 채용하는 경우, 객관성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사전 섭외가 불법이고 연구기관 자체에서 채용을 목적으로 발표와 토론도 할 수 없고 채용 심사 위원을 외부인으로만 구성한다. 함께 연구할 사람을 사전에 평가할 수 없게 하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계약직 연구원도 최고 수준의 인력을 채용하기 어렵다. 연구비가 있다 해도 연구원 숫자와 인건비를 통제받는다. 계약직 박사인 경우는 연구관, 석사인 경우는 연구사에 따르는 인건비로 정해져 있다. 이는 출연연구소에 비교해 약 3분의 2 이하이다. 국립연구기관은 최고 수준의 연구인력을 유인할 수 없다.

국립기관 연구개발이 투자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거라면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사람’을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부족한 것은 연구비가 아니라 창의적인 인재들이다. 인재를 채용하고 인재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연구지원을 목표로 한다면 성과는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현재 국가 연구개발은 경쟁원리 아래에서 획일적인 지표로 평가한다. 이를 위해 책임운영기관으로 여러 국립연구기관을 지정하였다. 책임운영기관은 정부 기관 중 공공성을 유지하면서도 경쟁원리에 따라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거나, 성과관리를 강화할 필요가 있어 별도로 지정하였다. 유독 국립연구기관이 다른 국가기관과 달리, 경쟁원리로 운영해야 하며 성과관리를 강화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다.

책임운영기관은 일반 행정기관보다 조직·정원 관리, 인사관리, 예산집행 등에 자율성이 보장되어 정책여건과 상황변화에 따라 기관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법률 조항일 뿐이다. 국립연구기관은 본부의 소속기관으로 인사와 예산에 있어 독립적일 수 없는 구조에 놓여 있다. 이 제도를 처음 시행한 영국의 경우 인사와 예산이 독립된 ‘청’이 책임 기관이다.

각 국립연구기관의 성과 순위를 매기기 위해 행정 관련 학회에 맡겨 행정 프로세스와 드러난 성과를 평가한다. 이러다 보니 성과지표 관리와 성과에 대해 포장하는 역량만을 키울 뿐이다. 예를 들어 언론에 연구기관 성과가 소개될 때 연구기관 이름 앞에 ‘책임운영기관’이 포함되어야 제대로 된 홍보 실적으로 평가받는다. 연구성과가 언론에 소개될 때마다 기자 또는 프로듀서(PD)에게 책임운영기관을 언급해 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실질적 가치 창출과는 상관없는 제도이지만, 이 평가에 인력과 세금을 투입해야만 한다.

연구개발에서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성과는 설 자리를 잃는다. 숫자로는 과학기술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미리 설정된 지표 달성에 집중하기 때문에 근원적이고 긴 호흡을 해야 하는 탐구를 무시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가치관과 태도가 팽배해진다. 연구자의 호기심과 상상력은 저평가되고 당장 소용이 없어 보이는 주제는 설 자리를 찾기 어렵다. ?

“과학이 독단적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지난 50년 동안 완전히 뒤바뀌지 않은 과학 분야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을 과학이 채우고 있는 것은 과학이 새로운 생각을 용납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며 무한히 개방적이기 때문이다. 진리와 민주적 방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과학의 믿음, 그것이 과학의 힘이었다”라고 브로노우스키가 <과학과 인간의 미래>에서 주장했다.

우리나라 과학기술 정책은 1960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당시 과학기술은 산업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이 정책을 관료가 주도하는 틀이 만들어졌다. 이 틀은 초기 그대로 50년을 넘었다. 그동안 모든 과학은 뒤바뀌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니 캐나다 오타와대학 김우재 교수는 전두환 시절 이후 각 정부의 과학기술정책을 블라인드 테스트하면 다 똑같다고 했다. 이제 틀을 전복해야 할 시점이다.

국립연구기관은 국가적 문제 해결을 위한 과학기술의 전위로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 정책이 구호와 바람을 넘어 실질적인 변화의 힘으로 작용할 수 있으려면 민주적이고 개방적이어야 한다. 끝없이 새로운 세계를 열어나가는 과학 정신을 수용하지 않는 것은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다. 미래는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만들어 가야 하기 때문이다. 과학이 과학다워야 우수한 연구원을 키워내고 그들이 새로운 미래 세계를 열 것이다.

대기과학자 cch070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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