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8.11.30 06:02 수정 : 2018.11.30 10:17

국내외에서 성별 논란에 자주 휩싸였던 여자 축구선수 박은선. 한겨레 제공

[최강의 약물의 유혹, 도핑의 과학]
(11) 운동경기와 성
① 여장 남성에서 염색체 검사까지

국내외에서 성별 논란에 자주 휩싸였던 여자 축구선수 박은선. 한겨레 제공

2003년 5월 만 16세 선수가 우리나라 여자 축구 국가대표로 발탁됐다. 한 달 뒤 방콕 여자 아시안컵에 출전한 그는 홍콩과의 예선 첫 경기에서 무려 4골을 터뜨리며 8-0 대승을 이끌었다. 큰 키, 다부진 체격, 탁월한 골 감각을 지닌 대형 골잡이(스트라이커)의 등장에 많은 축구 관계자의 이목이 쏠렸다.

박은선은 2003년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예선, 2005년 동아시아 연맹컵 등에 잇따라 참가하며 우리나라가 좋은 성적을 거두는 데 크게 기여했다. 뛰어난 활약 덕분에 2005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FIFA가 선정하는 ‘올해의 선수'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대표팀 경력은 거기까지였고, 9년이 지난 2014년에야 다시 태극표지(마크)를 달 수 있었다. 선수 경력에 굴곡이 많았던 이유는 남성 같은 외모와 체형 때문이었다. 잊을 만하면 제기되는 논란과 잡음으로 인해 운동에 전념하기 어려웠다. 쉽게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방황하면서 숙소를 무단 이탈하고 잠적하기 일쑤였다.

운동경기 역사를 살펴보면 박은선의 경우처럼 성별 논란이 자주 있었다. 남성은 근육과 뼈를 강화시키는 남성호르몬 덕분에 대개 여성보다 뛰어난 운동 능력을 갖고 있다. 남성이 성별을 속이고 여성으로 경기에 나선다면 이는 엄연히 상대방을 속이는 행위이다. 마치 약물이나 도구의 도움으로 경기의 공정성을 해치는 도핑처럼 말이다. 일반적 통념과 달리 성별은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의 맨 첫 숫자인 1과 2처럼 명쾌하게 나뉘지 않기 때문에 운동경기 분야에서 성별 논란은 현재 진행형이다.

여장 남자 의혹을 받았던 선수들의 진실

선수 시절 스텔라 월시의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1980년 12월 미국 클리블랜드의 한 대형 상가(쇼핑몰) 주차장에서 강도 사건이 발생했다. 두 명의 남성이 지갑을 뺐던 도중에 저항하는 70대 여성에게 총을 쏴 죽게 하였다. 희생자의 이름은 스텔라 월시(Stella Walsh)로, 오래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육상 선수였다. 얼마 뒤 부검 결과에서 깜짝 놀랄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기능이 거의 없는 남성의 생식기와 여성 생식기를 함께 갖고 있던 간성(間性; intersex)이었다. 사람들은 오래 전 그가 다른 선수를 남장 여성이라고 비난했던 사건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 폴란드의 스텔라 월시와 미국의 헬렌 스티븐스(Helen Stephens)를 둘러싸고 여자인지 남자인지 논란이 일었다. 각진 얼굴과 남성 못지않은 근육을 가진 이들의 기량이 워낙 압도적이기 때문이었다. 100m 달리기 경주에서 스티븐스가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하자 간발의 차로 2위에 그친 월시는 스티븐스가 남성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폴란드 언론까지 논쟁에 가세하자 대회 주최 측은 스티븐스의 성기를 맨눈으로 확인한 뒤 여성이 맞는다고 밝혔다. 간성인 월시가 여성인 스티븐스에게 적반하장의 소동을 벌인 셈이었다.

2년 뒤 또 다른 성별 논란이 발생했다. 1938년 독일 경찰에 여장을 한 듯한 수상스러운 남자가 기차에 타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되었다. 출동한 경찰에게 붙잡힌 사람은 도라 라첸(Dora Ratjen)으로 2년 전 올림픽 높이뛰기에서 4위, 유럽 육상 선수권에서 1위에 오른 여성 선수였다. 독일 당국은 그가 받은 메달을 즉시 반납했지만, 남자가 여자 종목에 참가했다는 소문은 멈추지 않고 계속 퍼져나갔다. 나치 치하의 독일이 올림픽을 통해 국가의 위상을 높이려 했던 것은 익히 알려진 일이었기에 많은 사람이 여장 사기꾼 이야기에 오랫동안 고개를 끄덕였다.

선수 시절 도라 라첸의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사실 라첸은 남성이 아니었다. 진실은 2009년 독일의 주간지 <슈피겔>이 당시의 의무 기록과 경찰 보고서를 입수하면서 밝혀졌다.[1] 라첸은 모호한 생식기를 갖고 태어났는데, 부모는 산파의 조언을 받아 여자 옷을 입히고, 여학교에 보내는 식으로 양육했다. 그는 10대 시절부터 자신을 남자로 여겼지만, 이미 사회에서 여자로 받아들여졌기에 어쩔 수 없이 계속 여자로 살았다고 주장했다. 성기가 비전형적인 모습이라는 기록을 남긴 경찰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후 라첸은 ‘도라'라는 여자 이름을 ‘하인리히'라는 남자 이름으로 바꿨다.

스텔라 월시와 도라 라첸은 외관상 성별이 모호한 간성일 뿐 여장 남성은 아니었지만, 이런 사실이 밝혀진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여장 사기꾼이 존재한다는 우려는 1952년 소련이 올림픽에 참여하면서 증폭되었다. 소련은 2위에 그쳤지만, 여자 선수들이 메달 71개 중 24개를 획득하는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반면 1위 미국은 76개 중 13개에 불과했다). 이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힘을 겨루던 냉전의 정세 속에 운동경기 분야에서도 양측의 경쟁이 격화되었고, 더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남자 선수들이 여장을 한 채 경기에 나선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1966년 개별 국가들의 여성 증명서를 더는 믿을 수 없다는 판단 아래, 국제육상경기연맹(IAAF)은 여성 선수의 성별 검사를 의무화했다. 검사를 통과한 여성에게만 주관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여성 증명서’(Certificate of Femininity)가 발행되었다. 하지만 초기에 도입한 검사 방식은 매우 수치스러웠다. 여성 선수들은 의사들 앞에서 아랫도리를 내리는 소위 ‘나체 행진’(누드 퍼레이드)을 하거나 침대에 등을 대고 누운 채 무릎을 가슴까지 끌어당겨 의사들이 좀 더 자세히 성기를 살펴볼 수 있도록 해야 했다.
1964년 올림픽에서의 에바 크워부코스카의 모습.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당연히 성별 검사가 여성 선수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한다는 비난이 속출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이를 반면교사 삼아 1968년 염색체(chromosome) 검사를 도입했다. 남성과 여성의 상염색체 22쌍은 동일하지만, 성염색체는 각각 XY와 XX로 차이가 나는 과학적 사실에 바탕을 둔 결정이었다. 방법 역시 면봉으로 볼 안쪽을 긁는 방식(구강점막 도말검사)이어서 윤리적 논란에서 자유로웠다.

염색체 검사를 처음으로 통과하지 못한 선수는 폴란드 육상 선수 에바 크워부코스카(Ewa Klobukowska)였다.[2] ‘염색체 검사가 꽤 정확하게 개인의 성별을 알려준다'는 IOC의 주장처럼 드디어 여장 남자 선수를 과학의 힘으로 적발한 것이었을까? 기대와 달리 크워부코스카는 XX/XXY 염색체 섞임증(모자이스즘: mosaicism)을 갖고 있었고, 은퇴한 이듬해 건강하게 아들을 출산했다. 국제 운동경기 기구는 성별을 구분하기 위해 과학을 들고 나왔지만,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셈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염색체 유무로 성별을 구분하는 무모한 시도는 이후로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자연이 긋기를 거부한 성별의 선

"가장 완벽한 여성은 남성이다(The ultimate woman is a man)."

- 미국 드라마 <닥터 하우스> 시즌2 13화에서-

1985년 8월 스페인의 육상선수 마리아 파티뇨(Maria Patino)는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 고베에 도착했다.[3] 깜빡하고 여성 증명서를 놓고 왔기에 통상적인 절차대로 염색체 검사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경기 전날 밤, 대표팀 의사가 검사 결과에 이상이 있다며 경기에 출전할 수 없다는 소식을 전했다. 귀국한 뒤 정밀 검사를 받았지만,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은 힘들었다. 혹시 에이즈에 걸린 것은 아닌지, 죽은 오빠처럼 백혈병이 생긴 것인지 염려가 되었다. 그는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전후 사정을 알리지 않고 혼자서 끙끙대며 시간을 보냈다.

파티뇨의 여성 증명서. 란셋 제공
두 달 뒤 파티뇨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검사 결과를 받아 들었다. 염색체 검사상 그는 XY, 즉 남성이었으며, 몸 안에 남성 호르몬을 생성하는 고환이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평생을 여성으로 살아온 그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는 고환에서 안드로겐(남성 호르몬)이 생성되지만, 유전자 변형으로 세포의 안드로겐 수용체가 이에 반응하지 않아 남성인데도 남성의 특징이 전혀 발달하지 않는, 이른바 안드로겐 불감성 증후군(androgen insensitivity syndrome; AIS)을 갖고 있었다.

고환에서 안드로겐이 정상적으로 생성되어도 신체는 반응을 하지 않기 때문에 AIS 환자의 몸에서는 남성으로서의 발달이 일어나지 않는다. 일할 곳을 찾지 못한 채 쌓여만 가는 안드로겐은 이내 방향화효소(aromatase)에 의해 에스트로겐(여성 호르몬)으로 변환된다. 순수하게 에스트로겐의 효과만 나타나기 때문에 소량의 안드로겐이 체내에 존재하는 일반 여성보다 AIS 환자가 더욱 여성스러운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큰 키, 긴 팔다리, 투명한 피부, 풍만한 가슴, 고운 얼굴과 같은 외모 때문에 이들은 연예계나 화류계에 종종 종사한다. 유전형은 남성, 표현형은 여성,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특징 때문에 어려운 증례를 푸는 의학 드라마 <닥터 하우스>나 가늠하기 힘든 범인을 추적하는 수사 드라마 <시에스아이(CSI) 마이애미>의 소재로 사용되기도 했다.

2017년 안드로겐 불감 증후군으로 태어났음을 고백한 모델 가비 오딜.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1986년 1월 파티뇨는 스페인 전국 체전 여자 종목에 참가하려고 했다. 평생 여성으로 살아왔으니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육상 연맹의 생각은 달랐다. 부상을 입은 척하고 조용히, 우아하게, 그리고 영원히 육상계를 떠나라고 종용했다. 그는 소신을 꺾지 않고 60미터 허들 경기에서 출전해 당당히 우승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저항의 대가는 컸다. 남자가 여자 경기에서 뛰었다는 이유로 그는 국가대표 숙소에서 쫓겨났고, 장학금이 취소되었으며, 과거에 작성했던 기록은 모두 지워졌고, 주변의 친구들과 약혼자마저 그를 떠났다.

하지만 파티뇨는 굴하지 않았다. 기자 회견을 열어 자신이 분명한 여성임을 밝히며 선수 자격과 명예를 되찾기 위한 싸움에 나섰다. 그의 소식을 듣고 멀리서 도움의 손길이 다가왔다. 핀란드의 유전학자 알베르트 드 라 샤펠(Albert de la Chapelle)이었다. XX 염색체를 지니면서도 남성으로 성장하는 사람들을 연구한 그는 남성과 여성이 반드시 염색체에 따라 나뉘지 않는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4] 더욱이 파티뇨의 몸은 안드로겐에 반응하지 않기 때문에 애초에 경기력 강화 효과를 얻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결국 2년 뒤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릴 때 IOC 의무분과위원회는 논의 끝에 그를 복권시키기로 결정했다.

여성으로 다시 운동선수로 활동할 수 있게 된 파티뇨는 1992년 모국 스페인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출전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성별 구분 소동을 겪으면서 이미 전성기를 흘려보낸 탓인지 대표 선발전에서 0.1초 차이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그는 선수로서는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했지만, 대신 염색체 검사에 처음 저항한 여성으로서 이름을 남겼다. 예기치 않게 부딪힌 인생의 암초에 좌절하지 않고 싸움을 이어나간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운동경기 정신의 발로이지 않을까?

염색체 검사는 없어졌지만…아직 끝나지 않은 논란

고등학생 때 참석한 수련회에서 여장 남자 선발 대회가 열린 적이 있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친구가 긴 머리 가발을 쓰고, 곱게 화장하고, 나풀거리는 치마를 입자 여자보다 더 여자처럼 보여 깜짝 놀랐다. 물론 말을 시켜보니까 금세 표시가 나긴 했지만. 경기 중에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일까? 운동경기 역사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여장 남자가 출전한다는 소문은 오랫동안 존재했다. 하지만 ‘성 분화 이상’(disorders of sexual development : DSD)을 갖고 있던 선수들이 있었을 뿐 소위 여장 사기꾼이 실제로 적발된 적은 없었다.

여장 남자 선수에 대한 염려는 오랫동안 성별 검사가 지속되는 데에 일조했다. 도입 초기에는 소위 ‘나체 행진'과 같은 굴욕적인 방식 때문에 크게 비난을 받았다. 인권 침해와 검사의 객관성 논란에 부딪힌 국제운동기구들은 보다 과학적으로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겠다며 1960년대 후반에 염색체 검사를 도입했다. 당시 과학계는 성별은 염색체 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칼로 무 자르듯이 나눠지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5] 하지만 나름의 신념으로 뭉친 그들에게는 마이동풍일 뿐이었다.

1988년 마리아 파티뇨의 복권을 계기로 국제운동기구는 염색체로 성별을 나누는 낡은 방식을 없애기 위한 첫걸음을 뗐다. 하지만 여러 정치적인 이유로 결정은 쉽게 내려지지 않았고, 200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여성 선수에게 기계적으로 시행하던 염색체 검사가 중단되었다. 단 완전히 철폐하지 않고 합리적 의심이 있을 때에는 성별 검사 시행이 가능하다는 여지를 남겨뒀다. 기대했던 대로 논란은 사라졌을까? 평화로운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2009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여성 선수의 폭발적인 질주를 계기로 운동 선수의 성별 논란은 다시 크게 타올랐다. (②부에서 계속)

최강/정신과 의사·서울명병원 정신과장 ironchoi@hanmail.net

1. Berg, S., How Dora the Man Competed in the Woman's High Jump. Der Spiegel, 2009. http://www.spiegel.de/international/germany/1936-berlin-olympics-how-dora-the-man-competed-in-the-woman-s-high-jump-a-649104-2.html.

2. Schultz, J., Qualifying Times: Points of Change in U.S. Women's Sport.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2014: p. 109-10.

3. Martinez-Patino, M.J., Personal account: A woman tried and tested. Lancet, 2005. 366 Suppl 1: p. S38.

4. de la Chapelle, A., The use and misuse of sex chromatin screening for 'gender identification' of female athletes. Jama, 1986. 256(14): p. 1920-3.

5. Moore, K.L., The sexual identity of athletes. Jama, 1968. 205(11): p. 787-8.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최강의 약물의 유혹, 도핑의 과학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