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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6.02 09:49 수정 : 2018.06.02 13:49

[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 (20회) ‘야망의 25시-쎄울 꼬레아’

▶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글로 털어놓는다.

1987년 다큐드라마 <기업인> ‘정주영 편’ 제작 때 고석만 연출은 현대건설의 이라크 공사 현장까지 답사해 노동자들의 애환을 담고자 애썼다. 수백수천명씩 집단으로 파견되던 노동자들이 대한항공의 군사독재식 통제에 반발해 현대쪽에서 국적기 이용을 중단한 일화도 확인했다. 사진은 70년대 중반 현대 노동자들이 대한항공을 타고 중동으로 떠나는 모습. 아산정주영닷컴 제공

‘제24회 88올림픽대회’를 서울로 유치하겠다는 정부 방침 결정은 1979년 9월 박정희 때였다. 1981년 3월 실제로 조사단이 내한해 둘러보고 가자, ‘올림픽 망국론’을 주창하던 총리(남덕우)를 제키고 이규호 문교부 장관의 제안으로 전두환은 현대의 정주영을 88올림픽 유치 민간추진위원장에 임명한다. 정주영 위원장 밑에 각부 장관들이 전부 위원으로 들어 있었는데, 회의장에 나온 장관은 이규호뿐이었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 한국위원(김택수)조차도 불참, 서울시는 국장급을 한 사람 내보냈다. 조상호 체육회장, 최만립 총무 등은 체육회로서는 밑져야 본전이고, 또 혹여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잡는 수도 있다는 셈으로, 나와 있었다. 이때 정주영은 “모든 일은 인간이 계획할 탓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적자가 나도록 계획하면 적자가 나고 국가재정이 파탄이 나도록 계획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라며, “82명 아이오시 위원의 과반수 42명을 확보 못하랴” 하는 심정으로 도전에 나섰다.

1979년 10월8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회의실에서 정상천 서울시장이 국내외 기자회견을 열고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 계획’을 공식 발표하고 있다. 직후 ‘10·26’으로 박정희가 피살되면서 무산됐던 유치 계획은 80년말 전두환 정권에 의해 재추진되면서 정주영에게 유치 민간위원장의 책임을 맡긴다. 맨왼쪽부터 정주영 전경련 회장, 박충훈 무역협회장, 김택수 IOC 한국위원, 정 시장 등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81년 9월 독일 바덴바덴으로 출발할 무렵, 정주영은 정부에서 지정한 추진위원 가운데 안이한 사고방식으로 여행이나 즐길 것 같은, 목적에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일부위원을 빼고 대신 유창순, 이원경 등 유능한 몇몇 인사를 영입했다. 통역으로라도 따라가겠다는 김운용(대한태권도협회 회장)도 합류시켰다. “사적으로는 몽준이가 독일어를 좀해서 쓸모가 있을까 해서 데리고 가고, 독일에서 유학시절을 보낸 다섯째 계수(고 정신영 기자의 부인 장정자 서울현대학원 이사장))도 함께 가자고 했다.” 정주영은 프랑크프르트 현대지사에 지시하여, 지점의 전 직원과 그 부인들, 주방 조리사들까지 이미 바덴바덴으로 아예 옮겨 현지 사무소와 임시 저택을 확보해 놓고 있었다.

1983년 <야망의 25시> 제작 때 고석만 연출은 정주영의 ‘88서울올림픽 유치 내막’을 취재했다. 1981년 전두환 정부의 정략에 따라 ‘올림픽 유치 민간위원장’으로 임명된 정주영(오른쪽 셋째)은 9월 국제올림픽위원회의 88올림픽 개최지 선정이 이뤄지는 독일 바덴바덴에 미국 유학을 막마친 아들 정몽준(맨왼쪽)과 현대상선 사장 정몽헌(왼쪽 둘째)을 비롯해 현대 지사 직원과 가족 등 인력을 총출동시켜 또 한번 ‘기적 같은 반전’을 이뤄냈다. 아산정주영닷컴 제공
그때 아이오시 한국위원은 뒤늦게 도착해서 공공연하게 “서울은 세표밖에 못 얻는다. 한 표는 내 표·한 표는 대만·한 표는 미국”이라며 찬물을 끼얹곤 한다. ‘꽃바구니 작전’도 체면문제라며 극구만류한다. 하지만 준비단은 ‘정주영’ 이름으로 아침마다 각국 아이오시 위원의 호텔방에 꽃바구니를 돌렸다. 꽃바구니는 의외의 감사 반응을 보여주었다. 이에 힘입어 적극 공세에 들어갔다. 투표전략에서 주효했던 것은 전 세계 아이오시 위원들에 대한 세밀한 신상 파악으로 성향 분석을 하고 경쟁 유치국인 일본 나고야의 활동 상황까지 조사해서 일대일 로비를 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있는 중동 및 아프리카 등 저개발국가 아이오시 위원들에게도 겸허하게, 그리고 성심으로 개최 능력을 소개하고, 후진국도 언젠가는 올림픽을 열 수 있다는 희망을 북돋아 넣었다. 호의적인 방향으로 그들을 선회시켰다. 우리 경제인들도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와 자기 호주머니 돈을 쓰면서 열심히 홍보에 나섰다. 정부 관리들에 비해 경제인들의 노력은 눈부실 정도였다. 100여명의 대표단은 현대 프랑크푸르트지사에서 온 조리사들이 해주는 밥을 먹으며 처음으로 만난 사람들끼리 혼연일체가 되어, 각자 정성을 다해 목표를 향하는 것이다.

1981년 9월30일 독일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사마란치 위원장이 ‘서울 52표, 나고야 27표를 얻어 서울이 압도적으로 1988년도 올림픽 개최도시로 선정되었다’며 “쎄울 코레아”를 발표하는 장면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1년 9월30일 바덴바덴 IOC 총회에서 사마란치 위원장 “쎄울 코레아”를 발표한 순간, 정주영 유치위원장과 조상호 KOC 위원장 사이에서 박영수 서울시장이 두 팔을 들고 환성을 지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마침내 81년 9월 30일 오후 4시. 사마란치 아이오시 위원장이 프랑스어로 “쎄울 꼬레아!”를 선언했다. 모두, 너나할 것 없이 얼싸안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득표는 예상 46표보다 6표나 추가된 52표였다.

한국전쟁의 참화를 딛고 일어섰으나 아직도 남북 대치중인 분단국, 한국이 예상을 뒤엎고 올림픽 개최국으로 선정된 소식에 세계가 놀라고 우리 스스로도 놀랐다. 경제인들의 힘으로 획득한 쾌거였다. 정주영은 그때를 회고하며 “지극 정성을 다하면 못 이룰 일이 별로 없다”고 장담하곤 했다.

1981년 9월30일 IOC 총회에서 88올림픽 개최도시로 서울이 선정된 직후 정주영은 유치위원장으로 가장 먼저 ‘유치확정서’에 서명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훗날 독일 취재차 프랑크푸르트 현대 지사에 머물면서 뒷얘기를 집요하게 추적해봤다. “투표 하루 전, 은행에서 따블빽으로 세 덩어리를 짊어지고와 호텔방에 미리 준비해놓은 ‘007빽’ 58개를 쭉 벌려놓고, 딸라를 하나 가득씩 쏟아 붓고 흔들며 탁탁탁탁 가득 차면 (세어보지 않아도 가방 크기와 돈의 액수는 정확하다) 뚜껑을 닫고 각자 배당에 따라 들고 나갔다.” 확인 할 수 없는 무책임한 회고담이지만, 정부가 못하는 일을 기업이 해냈다는 얘기다. ‘뇌물공화국’이란 불명예, 박정희 고도성장과 독재의 끝에 자리잡은 신군부의 속성·성과주의는 ‘로비 문화’까지 흔들고 있었다. 뇌물의 일상화를 개탄해 보지만, 타성이 되어버린 현실이 무섭다. 특히 서민들에겐 두려운 일이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88서울올림픽 확정 이후 한국을 수십차례 방문하는 등 ‘친한파’로 유명해져 첫번째 ‘서울평화상’도 받았으나 훗날 ‘뇌물 스캔들’로 불명예 퇴진했다. 사진은 83년 고 김택수 아이오시 한국위원 별세 때로, 왼쪽부터 노태우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사마란치, 정주영 등이 함께 했다. 사진 윤강로의 스포츠세상 갈무리
1983년 4월 첫 기업드라마 <야망의 25시>를 3주째에 ‘자체 결방’한 이후 여러모로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그런 어느날 아침, 집으로 난데없이 예쁜 포장의 케익 상자가 배달되었다. 열어보니 현대의 홍보실에서 보냈다. 반갑기보다는 겁이 더럭 났다. 오늘이 아내의 생일이다. <제1공화국> 때 ‘안기부 조사 사건’ 이후 줄곧 감시의 눈길이 두려운 때라 더욱 그렇다. 아내의 생일까지 꿰고 있으니 어린 자식들은 어찌 보호해야 한단 말인가.

초여름의 햇살이 유독 밝다고 느꼈던 날 오후, 현대 홍보실 간부가 정동 방송사 앞 상가 1층의 제과점에서 기다린다는 전화가 왔다. 며칠 전에도 자료 점검차 만났는데, 2층 커피숍이 아니고 빵집이라니…, 의아한 기분으로 만났다. “하하하, 시골에서 하지감자를 첫 수확했다고 보내왔어요.” 탁자 밑에 ‘푸대자루’가 있다. 느낌이 나쁘다. “맛있게 드세요” 하며 나가는 그를 붙잡고 자루를 풀렀다. 현금 다발이 감자처럼 뒤섞여 있다. 부드럽게, 그러나 준엄하게 타일렀다. 그리고 빵집을 나왔다. 하루종일 찝찝했다. 밤늦게 집에 도착하니, 현대에서 왔다 갔다며 이번에는 꿀단지가 놓여 있다. 같이 살던 맘좋은 동서 형님이 한마디 한다. “지리산 토종꿀이라면 몇백만원 해~.”

이튿날 아침 출근길에 새끼줄로 꼬아 묶은 꿀단지를 들고나가 텔레비전 담당 국장 책상 위에 턱 내려놓으며, 현대 쪽에 돌려주라 하고 나왔다. 그 꿀단지는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도 국장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보름이 지나서야 ‘그놈’이 없어졌다. 그제서야 맘놓고 현대맨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삼성은 ‘이병철’ 배역을 맡은 정욱에게 안양골프장 회원권을 주고, 그가 운영하는 특수인쇄업체에 독점하청을 주었다고 귓속말로 자랑하곤 했다. ‘김우중’ 역의 조경환이 대우 초청으로 본사를 방문하면, 회장 전용 엘리베이터에 태워 곧바로 김우중 회장실로 모셨단다. 김우중은 모든 선약을 깨고 긴 시간 환담을 나누곤 했다. 그 다음 얘기는 함구한다.

정주영의 인생을 건 경영 결단은, 1980년 이른바 ‘9월 전쟁’으로 알려진 이란-이라크 분쟁 때 이라크를 선택한 것이다. 그뒤 중동의 사업 판도는 크게 바뀌고,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도 달라졌다. 이라크에서 현대는 혈맹의 동지로 영향력이 대단했다.

1981년 ‘올림픽 유치’ 떠맡은 정주영
IOC한국위원·장관들 모두 시큰둥
“모든 일은 인간이 계획할 탓” 도전

독일 현대지사 바덴바덴으로 총출동
추진위원·경제인·체육인도 ‘한솥밥’

IOC위원들 방에 아침마다 꽃바구니
사마란치 위원장 “쎄울 코레아” 반전
훗날 ‘따블백 달러 뇌물설’에 개탄도

83년 방송사 앞으로 찾아온 현대 간부
“농사지은 감자” 포대 가득 현금다발

87년 ‘기업인’ 다큐때 이라크 현장 취재
현대 파견 노동자들 ‘대한항공 탑승’ 거부
“승무원들의 군대식 집단통제에 모멸감”

1987년 다큐드라마 <기업인> 촬영 때, 수도 바그다드공항에서 카메라 장비가 압류되어 촬영을 포기할 위기였을 때, 현대의 전화 한 통으로 두 시간 만에 장비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바그다드 북쪽 유프라데스강과 티그리스강을 잇는 키르쿠크~베이지~하디다 유전지대 550Km의 철도 공사 현장. 우리로 치면 압록강과 두만강을 뚫는 운하같은 것이다. 이것을 기차로 연결하는 공사다. 바야흐로 중동붐의 절정이다. 여기에 동원된 우리 노동자만 5천명. 바그다드는 그 유프라데스강과 티그리스강이 합류하여 바다로 빠지는 옥토에 위치해 있다. 바그다드에서 육로로 6시간을 달리면 현장 캠프가 나온다. 마른 사막 언덕과 언덕 사이로 1개 연대급의 막사 100여채가 천연요새처럼 진을 치고 있고, 모래바람은 끊임없이 날아와 캠프를 덮고 있다. 지금은 뚝공사가 50% 이상 진척되고 있는데 꽤 안정적으로 진행되는 상태라 한다. 2년 전 모두의 생각을 뒤집는 정주영식 역발상이 있었다. 그것은 공사 전 수도공사를 먼저 시행하자는 것이다. 두 강을 잇는 초대형 수도관이 선행되는 것이다. 수도공사는 시방서에도 없고 공사계획서에도 없는 것이다. 식수는 물론 공사용수의 부족 현상을 예견한 것이다. 수도공사 6개월째 건기를 만났다. 그때야 선견지명에 모두가 탄복했다 한다. 공사 착공은 1년 늦어졌으나 결과적으로 2년을 번 셈이었다.

다음날 아침 공사현장 촬영에 나섰다가 특이한 현상을 보았다. 5천명의 노동자가 배치된 현장에서 사람들을 발견할 수가 없다. 5천명을 550Km에 뿌려보아라. 차를 타고 5분, 10분을 달려야 겨우 한 사람, 산소용접 불빛이 보이는, 이 적막감을 어찌 표현할 것인가? 뙤약볕과 모래 바람에 덮쳐진 엄청난 노동 하중, 그것보다 더 힘든 것은 고독이다. 처절한 외로움, 그곳이 중동이다.

1978년 현대건설의 중동 공사 현장을 방문한 정주영(맨가운데) 회장이 사원 운동회에서 파견 노동자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아산정주영닷컴
그렇게 피땀 흘려 모은 돈을 노동자 대부분은 고국으로 송금한다. 보낸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 이곳에선 알 길이 없다. 부러 돈의 행방에 대해선 공통적으로 알려들지 않는다. 편지 왕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고국의 아내를 믿지 못한다. 대다수가 “아내가 바람났을 것이란 전재 하에, 귀국하면 어찌해서 내 사람으로 다시 만드나”를 고민하고 있다. 취재에 응한 노동자들마다 그런 병리현상에 시달린다. 회사는 이런 심각한 상황을 이해하고, 본사에 ‘인력개발본부’를 설치해놓고 중동으로부터 날아온 하소연을 정리해서 흥신소 요원처럼 탐문하고 뒷조사를 한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고국의 아내들은 의심하는 이상으로 타락하고, 황당할 정도로 사기를 당하고 있었다. 조사에 나선 직원들이 가슴을 치며 분개할 정도였다.

늦은 밤 막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몇 사람과 우정 어린 교감을 나눴다. 그 고독감의 첫번째 증상은 말이 없는 것이다. 군대 막사처럼 줄줄이 침대와 개인 사물함이 있다. 의아한 것은 그 캐비넷 속에 크고 작은 사진들을 붙여놓는데 공통적으로 부인이나 아이들 대신 여자 탤런트들뿐이다. 사진 속에서 웃고 앉아 있는 탤런트 이경진은 그들에게 무엇인가. 우리가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오일달러’를 벌어 조국을 부흥시킨다는 중동 파견 노동자들의 현실이다.

캠프 중앙에 있는 노무과를 찾아갔다. 전체 사무직원 중 유일하게 ‘촌지’가 오가는 곳이라 한다. 노동자들이 1년 혹은 2년 현 장근무를 마치고 귀국할 때 ‘대한항공(KAL)만 타지 않게 배려해달라’고 꼬불쳐둔 100달러 혹은 50달러를 ‘촌지’로 찔러준단다. 일종의 귀국 보너스로, 일주일의 유럽여행을 한 뒤 들어가는데, 대한항공을 타면 한국인 스튜어디스에게 심한 모멸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항공사 직원이 탑승 전 공항 로비에서 노동자들에게 단체로 ‘앉어, 일어섯’ 명령을 한다는 것이다. 100여명의 질서와 절차를 위해서라지만, 다른 외국 승객들이 보고 있다. 미모를 뽑내는 스튜어디스들도 어김없이 ‘앉어, 일어섯’ 그리고 ‘번호’를 외치게 한다. 아주 숙달되어 있다.

우리 제작진도 귀국길 노동자들과 같은 대한항공 비행기에 탑승해 보았다. 노동자들은 맨뒷좌석에 몰려 앉게 했다. 전 좌석에 적절히 섞어 앉히면 될 일을 한구석에 몰아넣으니 문제다. 무질서하다. 사들고 가는 중형 녹음기의 음향을 크게 틀어 제키고, 흡연도 예사롭게 해댄다. 스튜어디스 통제권을 벗어났다. 지금 노동자들은 화났다. 노동자 문제는 <야망의 25시 >의 주요 과제다.

현대그룹과 한진그룹은 1970~80년대 중동 특수를 함께 누렸으나 ‘국적기 탑승 거부 사태’와 5공화국 시절 ‘전두환 비자금 상납’을 둘러싼 오해로 악연을 맺기도 했다. 사진은 1982년 7월 전경련 회장단이 대한항공 부산 사업본부를 방문했을 때로, 왼쪽부터 현대 정주영, 한진 조중훈, 삼성 이병철 회장 등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현대는 급기야 국적기 대한항공을 버린다. 한진은 이제야 당황한다. 현대와 한진의 해묵은 싸움의 발단이다. 정주영에게 전두환의 청와대로부터 숙제가 떨어졌다. 대기업에서 선별하여 정해진 시한까지 정해진 액수를 모금해오라는 것이다. 아주 흔한 일상처럼, 전화하고 수금하고 갖다 받치고…, 정주영이 한진 조중훈에게 전화해 전후사정을 간략히 설명했다. 조중훈 “얼마를 하면 될까요?”, 정주영 “한 장이면 되지 않을까요?” 얼마 뒤, 조중훈이 청와대에 불려 들어가자 그의 얼굴에 수표뭉치가 던져지고, 험한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 ‘한 장’에 착오가 있었다. ‘10억’ 한 장을 ‘1억’ 한 장으로 알았다는 것이다. 그뒤 현대와 한진의 관계는 더욱 미묘해졌다. 정경유착 문제 또한 <야망의 25시>의 핵심과제다.

건설시장은 난타전이다. 극동의 김 회장·대동의 박 회장·동아의 최 회장·대림의 이 회장이 모여 ‘공사 일감’ 하나를 두고 회의가 벌어졌다. 동아의 최 회장이 그 공사를 기어코 자기네가 해야겠다고 부득부득 우겨 다른 회장들의 양보를 차례로 받았는데 대림의 이 회장만 요지부동이다. 불꽃 튀는 설전 끝에 최 회장이 갑자기 얼굴이 벌겋게 되면서 “내가 고혈압인데…” 쓰러지듯 누워 버린다. 대림의 이 회장이 깜짝 놀라, 거두절미하고 “그래, 그 공사 너 가져” 했다. 그제서야 최 회장은 “음, 조금 낫군” 하면서 부스스 일어나는 것이다. 그뒤 최 회장이 답례의 저녁 식사 대접을 하려고 날을 잡았는데, 이 회장이 약속을 깨고 안 나왔다. 날이 어둑해지자 이 회장은 지프에 자갈을 한 가마니 싣고 가서는 최 회장 집에 실컷 던졌단다 . 그것으로 끝이다. 쿠데타나 정변과 다르게, 업계의 진흙탕 싸움은 샤워 한번 하고 나면 깨끗해진다. 늑대가 새끼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염소와 함께 지내야 한다.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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