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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7.07 10:59 수정 : 2018.07.08 22:41

[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 (25회) ‘수사반장-범행동기를 찾아서’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글로 털어놓는다.

1978년 고석만은 1971년 첫 방송 이래 문화방송 인기 수사극으로 장수하고 있던 <수사반장> 연출을 맡아 안팎의 견제 속에 연극연출가 김상열을 작가로 발탁하고, 드라마 성격을 ‘본격 사회극’으로 개편하는 시도를 했다. 연습시간이 되면 문을 잠가 지각하는 배우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 최불암을 비롯해 기존 출연진의 군기부터 다잡았다. 방송 14년째인 84년 10월 ‘1차 종영’ 무렵의 ‘박 반장’ 최불암. 사진 엠비시 제공

국내 첫 수사극 <수사반장>은 고석만 연출 시기 최불암·김상순·조경환·남성훈, 네명의 형사역 배우들이 명예경찰로 계급을 받을 정도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짜자자잔, 짜자자잔” 윤영남 작곡의 드라마 <수사반장> 주제곡은 명곡이 되었다. 라틴 퍼커션과 경쾌한 나팔들이 혼합된 재즈 축제. 그 시대를 관통한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그 주제곡이다. 100장이 넘는 사건 현장 형사들의 스틸사진으로 조각된 배경화면에 얹혀 전국에 퍼졌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타이틀백이었다. 매주 일요일 저녁 8시, 주제곡이 울려 퍼질 때면 서울 시내 택시가 올스톱할 정도였다. 기사식당은 초만원이었다. 대통령도 꼭 시청했다고 한다. 이 드라마를 통해서 민심을 파악했다는 것이다. 1970년대 후반 문화방송은 ‘황금의 주말 편성’을 누렸다. 일요일 오후 7시 <웃으면 복이 와요>, 8시 <수사반장>, 9시 <뉴스데스크>, 10시 <엠비시(MBC)권투>, 11시 <명화극장>. 일요일을 장악했다. 스테이션 이미지는 탄탄히 구축되어가고 있고, <수사반장>은 ‘만나면 좋은 친구~’였다.

1971년 국내 첫 수사 드라마로 시작한 <수사반장>의 초기 대본. 허규 연출·김정헌 극본. 최중락 총경 소장본.

1978년 고석만 이전 이연헌 연출 시절 금요드라마로 방영되던 <수사반장>의 광고. <한겨레> 자료사진
왜 <수사반장>인가?

처음 방송되던 1971년 3월만 해도 텔레비전이 귀하던 시절이다.(1971년 12월 티브이 수상기 61만6392대, 총인구 3088만2386명, 총가구수 586만3440가구, 텔레비전 보급률 10%) 외화를 통해서만 수사물을 접하던 시절이다. <수사반장>은 우리 텔레비전의 본격 수사물로는 최초다. 우리 형사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으리라. 첫 연출은 허규 선생이 맡았고 자리를 잡은 것은 이연헌 선배 때였다. <수사반장>은 인과응보나 사필귀정의 원리에 입각하여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는 ‘한국적 수사물의 모델’을 만들어냈다. 당시 범죄는 대부분 우발적이고, 피살자가 오히려 못된 인간형으로 귀결되어 시청자로 하여금 이성을 되찾게 하고 죄와 벌의 한계를 인식시키는 ‘인정극’이 많았다.

‘어느 집에서 아기의 백일잔치가 열렸다. 아기의 아빠는 그날 밤 손님들이 권하는 축하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다. 손님들이 모두 떠나고 통금이 임박한 시간에 아기가 불덩이가 되더니 경기를 하며 울기 시작했다. 젊은 새댁은 남편을 깨웠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새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차를 가지고 있는 3층 아저씨에게 사정했다. “아저씨, 우리 아기가 위독해요. 죄송하지만 병원까지만 차로 태워 주세요.” 그러나 그는 통금시간이 되어 태워다 줄 수 없다고 매정하게 거절했다. 그래서 새댁이 아기를 둘러업고 병원으로 달려갔으나 아기는 이미 숨져 있었다. 그 충격으로 아기의 엄마는 정신이상을 보여 가끔 3층으로 내려와 눈물을 흘리며 훌쩍이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뒤 밤이면 밤마다 3층의 유리창이 깨지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형사들은 신고를 받고 범인을 잡기 위해 잠복근무에 들어갔다. 막상 범인을 잡고 보니 정신이상을 보이고 있는 새댁이 아니라 어이없게도 동네 꼬마들이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꼬마들은 3층 아저씨가 미워서 밤마다 돌을 던졌던 것이다. 철없는 아이들의 대답을 듣고 있던 수사반장 최불암은 그 아이를 덥석 품에 안는다. 꼭 껴안고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최불암과 <수사반장>. 인정극으로서 <수사반장>은 그렇게 서민들에게 다가갔다. 유신정권 보도통제하의 방송에서 한줄기 돌파구였다. 그 시절 상당수는 생계범죄였고 단순 우발범죄이며, 하나같이 누선을 자극하고 있었다.

1978년 고석만이 연출로 발탁됐을 때 <수사반장> 출연진과 드라마 자문 경찰들이 함께 했다. 왼쪽부터 최불암, 남광현 경위, 이금복, 김상순, 조경환, 김호정, 최중락 총경. ‘서 형사’ 김호정은 78년 8월 별세해 그뒤 남성훈이 새로 합류했다. 엠비시 제공
<수사반장>의 역사는 쌓여왔다. 사회현상이 복잡다난해짐에 따라 범죄의 양상도 다양해졌다. 폭력화되고 지능화되어갔다. <수사반장>도 이제 고비를 맞았다. 변곡점에 도달한 것이다. 이때 1978년, 고석만 연출이 발탁되었다. 그에게 주어진 책무는 현장성 강화였다. 그는 시대변화에 따른 사회성에 착안했다. <제3교실>에서 보여준 사회적 접근과 과감한 현장 중심이 그것이었다. 그는 모든 강력범죄에서 범행동기를 첫번째 문제로 제기하고 나섰다. 범인의 성장 배경, 환경, 사회구조는 범행의 동기를 잉태하고 있다. ‘길을 찾아서’ 나서듯, 범행동기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연극연출가 김상열을 만났다. 극단 ‘현대극장’의 상임연출가였다. 극단 대표 김의경·최문경 부부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김상열 작가와 고석만 연출은 의기투합했고 ‘수사반장 전환’의 대장정에 나섰다.

1978년 <수사반장>으로 의기투합한 고석만(오른쪽)·김상열(왼쪽) 콤비는 이후 여러 작품에서 호흡을 맞춘다. 사진은 1984년 세계일주여행 때 모습. 고석만 제공
‘한 소녀가 이화여대에 합격하고, 그 어머니는 행복하다. 행상하는 어머니는 가재를 털어 입학등록금을 마련하였다. 기분 좋게 버스를 타고 이대 앞에서 내려 양쪽에 상가를 이루고 있는 이대 입구 길에 들어서자 뒤따르고 있던 괴한이 핸드백을 낚아챈다. 소녀는 백을 놓치지 않고 매달린다. 달아나는 괴한과 소녀. 봄눈이 녹은 길바닥은 질퍽했고 소녀는 죽기를 각오하고 괴한의 발목에 매달려 땅바닥에 끌려갔다. 괴한은 칼을 꺼내 위협한다. 스치는 사람들, 구경하는 상가의 상인들, 만신창이가 되어 끌려가는 소녀, 살려달라 악을 쓰는 소녀는 50m를 끌려왔다. 괴한은 소녀를 세차게 발길질한다. 그래도 매달려 울부짖는 소녀를 무자비하게 뿌리치고 달아난다. 구경하는 몇몇 사람들, 지나치는 사람들, 질퍽한 내리막길을 울며 기어가는 소녀.’

<수사반장>은 사회물로 전환하고 소재 발굴과 현장성에 매진하였다. ‘사회와 인간의 관계’를 그려나갔다. 형사들은 이대 앞 소녀가 끌려간 현장을 찾아 탐문수사에 나섰다. 50m 전후방의 상가를 중심으로 당시 상황과 범인의 인상착의를 탐문하는 동안 형사들은 점차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불의를 외면하고 있는 시민들을 마주하며 절망하고 만다. ‘방관자 효과’라는 게 있다. 주위에 사람이 많을수록 책임감이 분산되어 도와주기를 주저한다는 현상이다. 1964년 미국 뉴욕 주택가에서 키티 제노비스라는 여성이 새벽에 칼에 찔려 죽어가는 35분 동안 38명이 보고도 지나쳤다는 사건에서 비롯돼 ‘제노비스 신드롬’이라 불렸다. 그러나 ‘바르게 사는 사람’을 이야기할 때의 ‘바르게’는 다른 측면의 의미도 갖는다. 바르게 사는 사람은 용기있는 사람이다. 삶 앞에, 문제 앞에 용기있게 서는 사람이다.

‘소녀는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응급실을 뛰쳐나와 이대 앞 골목을 뒤지고 다녔다. 형사들의 위압적인 탐문을 피하던 상가의 상인들이 소녀의 하소연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소녀는 어느 행상에게 듣게 된 작은 단서를 잡아 뒷골목 우범지역을 파고들어갔다. 형사들도 뒤따라 우범지역에 잠입한다. 그 뒤를 엄마가 또 쫓고…, 단순 액션물이 아닌 사회구조를 파고드는 추적이었다. 조직이 드러나고 또다른 범죄들이 밝혀질 때, 소녀는 괴한과 마주한다. 짧지만 강렬한 둘의 외마디. “돌려주세요.” “죽고 싶어?” 무릎 꿇고 매달리는 소녀의 폐부를 칼이 찌른다. 한발 늦게 달려든 형사들에게 괴한 청년은 체포되지만 소녀는 치명적이다. 첫 탐문 때 포착되었다면, 2차 범행은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뒤늦게 달려온 엄마의 품에서 소녀는 숨을 거둔다.’

1978년 수사극 ‘수사반장’ 연출 발탁
택시 올스톱시킨 인기 주말 간판극

현대극단 상임연출가 김상열 작가로
주변 반대 속에도 ‘대전환’ 의기투합
인과응보 ‘인정극’에서 ‘사회극’으로

새 드라마부장 “고석만이가 어떻게?”
연극판 출신 작가들은 ‘김상열 시기’
“미운오리새끼처럼 오기와 의욕 다져”

연극배우들 출연에 탤런트들 텃새도
정시에 연습실문 잠근 채 리허설 강행
10분씩 늦던 ‘반장 최불암’ 태도 변화
최불암 자서전 “그때 가장 잘 맞았다”

형사들은 시민정신의 실종에 절망하고 분노하였다. <수사반장>은 사회와 인간의 관계를 그려나갔다. 시청자들은 <수사반장>의 새로움에 감동하고 찬사를 보냈다. 그런데 김상열은 씹혔다. 방송사 내부 드라마 파트에서 김 작가를 비판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김 작가 또래의 같은 연극계 출신들이다. 한 작가의 특정 프로그램 독점과 성공에 시기심이 발동할 수 있다. 새로운 접근법을 놓고도 연극 같네, 번역극 대사 같네…, 방송의 구어체와 리얼리티라는 미명 앞에 고급스러운 ‘시어’-시적 대사는 생경했을 법하다. 드라마란 필요하면 고품위의 대사도 읖조려야 하고, 난해한 상황 전개도 그려야 하는데도 말이다. <수사반장>을 맡은 직후, 사내 인사 이동으로 새로운 드라마부장이 부임하였다. 첫날 드라마 파트의 연출들을 앉혀놓고 프로그램을 점검하던 중 “고석만이가 <수사반장>을 해? 이걸 어떻게 해”.

그 한마디는 묘한 오기와 의욕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부장은 다음주 회의에서 다시 한번 <수사반장>을 비판했다. “뷰 포인트가 안 맞아. 또 범행동기가 중요한 게 아니고 범인의 뉘우침이 중요해!” 비드라마 출신의 분석으로는 꽤 전문적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날 방송사 로비에서 <수사반장>을 오랫동안 집필해왔던 작가 선생을 만났는데, 그 부장의 코멘트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비판해오는 것이다. 그 작가와 그 부장은 서울 강남의 같은 아파트에 살며 왕래가 빈번하다고 들어서 웃고 말았다. 그 작가도 연극 출신이다. 김상열 작가와 그 주변의 연극 출신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든다.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가 오리들 틈에서 돋보이는 백조가 되는 반면, 키르케고르의 ‘기러기’에선 날 수 있는 기러기가 날지 못하는 거위들을 날게 해주려고 돕다가 결국은 ‘공상적 바보’라는 비난을 거위에게 듣는다. 이런 비난 앞에 기러기는 의기소침해져 날지 못하는 거위처럼 돼버린다.

1975년 8월15일 <수사반장> 광고. 협찬 기업들 역시 추억을 돋게 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상열 작가는 당시의 방송문법 체계 속에서는 독특했다. 자기만의 색깔을 갖는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이 따르는 일이다. 군중 속에서 하나의 모양, 하나의 숫자, 하나의 생각이 되는 것이 훨씬 쉽다.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할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아무리 훌륭한 철학을 주장한다 해도, 내가 그 속에서 살고 있지 않다면, 그것이 나의 실존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인간이란 관계 맺는 존재”라는 키르케고르의 말이 옳다. “행복의 90%는 인간관계에 달려 있다.”

안데르센과 키르케고르는 동시대인이자 비판을 주고받는 사이였는데, 재미있게도 키르케고르의 첫번째 책은 안데르센에 대한 혹독한 문학비평서인 <아직도 살아 있는 자의 수기>(1838년)다.

김상열 작가는 연극 출신이면서도 영상화에 밝았다. 가급적이면 영화적 방식을 적극 도입했고 새로운 텔레비전 문법을 창안하려 애썼다. 예를 들면, 장면 전환이 도식적으로 이뤄지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시청자가 한 장면이 끝난다는 것을 감지하게 할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연극에서 무대 구조상 어쩔 수 없는 장면 전환이 텔레비전에서도 그대로 연극 관습처럼 모방되고 있는 것이 불만이라 했다. 성격 창조에 대해서도 혁신책을 끊임없이 제시하였다.

<수사반장>의 ‘주연 4인방’ 가운데 김상순(김 형사·맨 오른쪽)을 비롯한 출연진과 리허설을 진행하고 있는 고석만(맨왼쪽) 연출. 사진 엠비시 제공
또한 연극배우들을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연극 쪽의 훌륭한 배우들이 교류되면 문화계 전체의 풍성함으로 발전할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때 첫발을 내디딘 배우들이 박인환·최주봉·윤문식·양재성·김갑수·오인환이었고 강계식·고설봉 선생도 모셨다. 방송사의 탤런트들은 배타적이었다. 연극배우들은 산전수전 겪은 노병사들처럼 능수능란하였다. 연습실의 분위기는 ‘형사’들이 잡는다. 그들의 좌석은 항상 상석으로 남아 있고 그들이 없으면 연습 자체가 진행되지 못했다. 최불암은 연달아 연습시간 10분씩 지각이다. 모두 모여 기다리고 있을 때 주인처럼 시선을 받고 들어와 앉으면 연습이 시작된다. 연출자는 다음 연습시간부터 시간 엄수를 진지하게 강조했다. 그다음 연습시간엔 미리 준비하고 기다렸다. 오늘도 최불암은 지각이다. 정시가 되자 연습실 문을 잠그도록 했다. 그리고 책읽기 연습에 돌입했다. 다른 배우들이 당황해했다. 그날 최불암은 문 밖에 서 있다 돌아갔을 것이고, <수사반장>은 ‘수사반장’ 없이 연습이 진행되었다. 그 후 연습시간에 늦게 오는 형사들은 없었다.

최불암에겐 장점이 있다. 본인이 작품에 애착이 가면 연습 때부터 아이디어 백출이다. 계속해서 본인의 아이디어가 관철되길 바라며 끊임없이 얘기한다. 기발한 아이디어도 많고 작품에 대한 분석도 뛰어나며 애정도 넘쳐난다. 연습 때부터 주장해오던 아이디어를 끝까지 밀고 나가 작품에 녹여낼 땐 신기에 가깝다. 연출자마다 다르겠지만 의견이 대립될 때도 많다. 그런데 드라마엔 최종본인 ‘콘티’라는 대본이 있다. 이 콘티는 녹화 직전 리허설 때 나온다. 최불암은 이 콘티에 본인의 주장이 반영되지 않으면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지만, 막상 녹화에 돌입하면 연출자의 의도를 십분 소화하는 것이다. 이처럼 즉각 변형을 해내는 배우를 본 적이 거의 없다. 최불암, 그를 통해서 많은 배우들이 민주주의의 기본을 배우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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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반장>의 열기는 대단했다. 녹화 현장은 활기찼고 주제곡의 리듬과 멜로디처럼 박진감이 넘쳐났다. 지방 촬영을 하기 위해 대형 버스에 오르면 신났다. 버스 옆에 ‘수사실화극 <수사반장> 촬영’ 플래카드를 크게 달고 지방도로를 달리면 길가의 모든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반겨주었다. 지방에서의 환대는 분에 넘쳤다. 경찰서의 간부들은 물론 지역 유지들까지 즐거워했다. 우리의 형사들은 힘든 일정에도 불구하고 지방 출장을 자청하고 나섰다. <수사반장>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최불암의 자서전에는 “역대 연출자가 15명이 넘지만 고석만이 연출할 때가 제일 좋았다. 시청률도 역대 최고를 누렸고, 호흡이 잘 맞아 일도 잘되었다. 고석만은 청와대나 문공부의 간섭에도 맞서 이겨냈다”고 술회하고 있다.

[%%IMAGE12%%] 이대 앞 사건을 정리해보자. 이 사건은 ‘한국 현실의 증언’이다. 범행동기를 보자. 빈부격차, 우범자 격리수용, 초동수사 미비, 탐문수사 미비 그리고 시민정신 결여다. 그때 알았다. 모든 사건, 경영, 인생… 초동수사가 기본이다. 일본 수사대의 철칙이 있다. “모든 범죄의 단서는 사건 현장에 다 있다. 초동수사에 승부를 걸어라. 현장을 혀로 핥아라.”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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