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9월 고석만 연출은 한국 방송으로는 처음 연길시 연변예술극장에서 ‘연변 조선족 자치주 설립 39돌 교포 위문 공연’을 맡아 한-중 수교 1년 앞서 ‘문화 첨병’ 구실을 했다. 수많은 우여곡절과 동포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공연이 성황을 이뤄 연변 청소년회관 건립 기금 10만달러를 기증했다. 그때 국내 최정상 가수 이선희는 ‘링거 수액’을 맞으며 ‘열창 투혼’을 발휘하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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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9월 고석만 연출은 한국 방송으로는 처음 연길시 연변예술극장에서 ‘연변 조선족 자치주 설립 39돌 교포 위문 공연’을 맡아 한-중 수교 1년 앞서 ‘문화 첨병’ 구실을 했다. 수많은 우여곡절과 동포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 공연이 성황을 이뤄 연변 청소년회관 건립 기금 10만달러를 기증했다. 그때 국내 최정상 가수 이선희는 ‘링거 수액’을 맞으며 ‘열창 투혼’을 발휘하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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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연변 대공연 때 가수·무용단·합창단·악단 등 32명의 한국 공연단은 연변가무단과 함께 2시간동안 합동공연을 펼쳤다. 공연 실황은 ‘녹화테이프 극비 운송 작전’으로 중국 공안의 감시를 뚫고그해 9월 23일 <문화방송>에서 무사히 방송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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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연변 대공연 때 이덕화가 엠시를 맡아 쇼를 진행하고 있다. 연변쪽 주최자들과 프로그램을 두고 논쟁이 벌어져 공연은 무려 10시간 늦은 밤 12시에 시작할 수 있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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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연변 공연 때 ‘화교 가수’ 주현미(오른쪽)는 3개월된 첫 아들과 남편(임동신·왼쪽)까지 동행해야 했다. 동포들이 그의 트로트를 따라 부르자 현지 공무원들이 제지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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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청소년회관 건립기금 ‘명분’ 태진아 최진희 이선희 이상은 등등
‘화교’ 주현미 출산 직후 가족동반
출연·제작진 총 53명 대규모 ‘장관’ 서울 중계차 ‘베이징공항 통과’ 불가
현지 단체 스튜디오 해체해 연변으로
중량초과 ‘176개 트렁크’ 군용기로 전날 밤샘 조선족 동포들 ‘만원사례’
‘성금 비공개’ 주최쪽과 육박전 방불
자정 넘어서야 이덕화 사회로 시작
관객들 따라 부르자 요원들 가로막아 ‘만능해결사 이규성’ 알고보니 무기상 ‘쇼는 즐거운 인생이다. 보름 전에 심은 구근에서 싹이 나왔다. 대여섯 군데에서 경쟁하듯 흙을 뚫고 나온 떡잎, 그 생명력이 신기하다.’ 선발대 4명이 먼저 나섰다. 선발대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중계용 기자재를 무난히 베이징공항을 거쳐 연변까지 옮기는 일이다. 이규성은 조치가 끝났다고 했지만 전자기재의 반입·반출은 어느 공항이건 규제가 까다롭다. 베이징공항이 가까워지자 궁리를 해냈다. ‘선발대가 들고 가는 이엔지(ENG) 카메라를 공공연하게 노출시키자.’ 베이징공항 입국심사를 마치고 첫 검색대는 무사통과. 이에 자신감이 생긴 김영철 카메라맨은 워킹벨트를 걸어오며 카메라를 어깨에 둘러멨다. 언뜻 보기에 촬영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최종 검색대 앞에서 걸렸다. 뺏겼다. 일행은 일단 입국문을 통과해 공항 로비로 나왔다. 밖에서는 이규성이 우리 일행을 맞았다. 우리는 심히 불쾌감을 토로했다. 이규성은 당황했다. 일단 우리를 안심시키며 검색대 쪽으로 들어가려 했다. 당연히 제지당했다. 그때 이규성은 윗옷 조그만 주머니에서 무슨 신분증을 꺼내 관리에게 숨기듯 보여주었다. 그 공항 관리는 가볍게 위아래로 훑어본 뒤 통과시켰다. 웬 신분증 하나에 무사통과? 우리는 이규성의 정체에 대해 갖가지 추측을 하며 30분쯤 기다렸다. 이규성은 다시 나왔다. 빈손이다.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오늘 중으로 카메라를 빼낼 테니, 일단 호텔에서 쉬라고 했다. 호텔에서 체크인을 한 뒤 진지한 숙의에 들어갔다. 우리로선 대안이 없다. 저녁 무렵 이규성이 돌아왔다. “중국의 조직은 특이하다. 다섯 군데가 동시에 동의해야 해결이 된다. 우리 정부 구조로 치면, 집권당·경찰·안기부·국회 그리고 세관이란다. 그런데 어느 한 군데가 조율이 되지 않았다. 세관으로 보인다.” 그리고 우리를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내일 오전엔 해결된다.” 일단 서울에 연락해 일정을 중지시켰다. 특히 김포 컨테이너박스의 중계차를 철수시켜야 한다. 휴대용 카메라 한 대조차 영치되는 마당에 중계차급의 장비 도입은 어림없다. 깊은 고민에 빠졌다. ‘쇼는 즐거운 인생인가? 비가 많이 왔다. 떡잎이 네 개씩 붙어버렸다.’ 이튿날 오전 내내 초조하게 기다렸다. 정오 무렵 이규성은 영치됐던 카메라를 들고 호텔에 나타났다. 그러나 우리는 ‘궤도 수정’을 통보했다. 이규성의 표정은 무너졌다. 본대의 출발은 5일 남았다. <중국중앙텔레비전>(CCTV) 중계차를 대여하는 것, 수준은 떨어지지만 <연변방송>의 중계차를 대여하는 것, 아니면 휴대용 카메라 6대 이상을 카메라맨·녹화기·음향장비까지 포함해 대여하는 것, 셋 중 어느 것도 시간상으로 불가능한 발상이다. 이규성에게 우리가 준비한 큐시트를 보여주었다. 120분짜리 프로그램의 정교한 중계용 큐시트다. 중계차만이 녹화 가능한 큐시트다. 이규성은 크게 놀라는 듯했다. 뒷날 얘기하길 “초 단위의 큐시트를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이렇게까지 만반의 준비를 했을 줄 몰랐다”고 했다. 그날 밤 이규성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마친 우리 일행은 호텔 로비에서 이규성을 찾았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첫 발의부터 오늘까지 반추해보았다. ‘구근식물은 까다로워 썩기 쉽다.’ 그 순간 호텔문을 밀고 들어서는 이규성을 보자, 오히려 반가웠다. 그는 우리를 미니버스에 태우고 어디론가 달렸다. 한적한 교외로 빠졌다. 모두 침묵이다. 도착한 곳은 2층의 예쁜 신식 양옥. 들어서는 현관에 한자와 일어로 ‘중·일문화교류중심’이라는 간판이 보이고, 우리는 안쪽 복도 끝으로 안내되었다. 문을 열자 좌담용 스튜디오가 단정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규성은 ‘이 스튜디오를 분해하면 녹화가 가능한가요?’라고 물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제대로 된 스튜디오용 카메라가 4대, 완전한 콘솔과 스위처 박스까지 잘 갖춰진 스튜디오다. “이 스튜디오를 완전하게 분해해 3일 안에 연변에 도착시키겠다.” 이규성의 정체는 무엇인가? ‘쇼는 즐거운 인생이다. 참나리 언덕에 차광막을 쳤다. 검정 비닐의 푸대자루형 차광막은 햇볕과 바람을 인위적으로 차단, 땅의 온도를 낮춰 개화 시기를 조절하는 것이다. 통풍되는 비닐하우스다. 인큐베이터 같다.’ 서울 본사로 연락했다. “예정대로 본대가 출발해도 된다.” 기술감독 한백수와는 수시로 전화를 주고받았다. 기자재 박스 하나하나가 체크되며, 분해 이동되었다. 우리 기자재와의 호환성을 다양하게 체크했다. ‘차광막 속은 내부순환이 일어나 웃자라는 녀석을 막아주고, 바람과 대화하도록 감싸 안아준다. 참나리는 짙은 노란색으로 삐져나오더니 군락을 이루며 초록의 언덕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1991년 연변 대공연 때 김완선은 현란한 춤으로 조선족 젊은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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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강변가요제 대상의 ‘대학생 스타’ 이상은은 91년 연변 공연 때 자전거로 연길 거리를 돌며 연변 풍속도를 그리는 뮤직비디오 <담다디>를 찍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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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한국 연예인의 첫 대규모 공연 때 연변예술극장은 1500석 규모였으나 전날 밤샘까지 한 동포 관객들 수만명이 몰려 대성황을 이뤘다. 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 연길감옥이 있던 자리로 알려졌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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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9월 연변 대공연 때 마지막 무대는 이선희의 히트곡 ‘아름다운 강산’을 출연 가수들의 모두 함께 나와 부르는 것이었다.(위) 왼쪽부터 이상은, 이선희, 김완선.(아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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