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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월 고석만(왼쪽) 연출은 백남준(오른쪽)의 요청으로 뉴욕에서 마지막 인터뷰를 직접 진행했다. 친조카 켄 백 하쿠타와 고석만에게 페인트를 뿌리고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도 펼쳤다. 이 내용은 2006년 1월 백 선생이 별세한 뒤 <이비에스>에서 추모 다큐 ‘백남준, 그 꺼지지 않는 예술혼’으로 제작돼 재방송될 만큼 화제를 모았다. 이비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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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선생이 유언 남기겠다’ 연락
2005년 1월 스튜디오 퍼포먼스 촬영
친조카 켄 백 하쿠타·고석만 모델로
양복 위에 뿌린 페인트 몰래 닦아내자
큐레이터 “그 옷 남기면 값이…” 힐책
플럭서스운동 창안한 백남준 예술혼
이비에스 ‘3·3·3 전략’에도 반영
‘아이디어 3일·기획 3주·첫삽 3개월’
‘60분 부모’ ‘극한직업’ ‘지식채널 이’…
‘교육중심 방송’ 빛낸 프로들 쏟아져
‘뽀롱뽀롱 뽀로로’ 국산 캐릭터 대성공
“돌연 사표…이비에스 후배들에 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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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월 고석만(왼쪽) 연출은 백남준(오른쪽)의 요청으로 뉴욕에서 마지막 인터뷰를 직접 진행했다. 친조카 켄 백 하쿠타와 고석만에게 페인트를 뿌리고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도 펼쳤다. 이 내용은 2006년 1월 백 선생이 별세한 뒤 <이비에스>에서 추모 다큐 ‘백남준, 그 꺼지지 않는 예술혼’으로 제작돼 재방송될 만큼 화제를 모았다. 이비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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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고석만의 첨병 (48회) ‘이비에스 3.·3·3 전략’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21번째 주인공은 고석만 프로듀서다. 1973년 <문화방송>(MBC)에 입사한 이래 그는 30여년간 숱한 화제작을 제조했다. ‘정치드라마의 대부’ ‘스타 피디 1세대’ 같은 명성과 더불어 ‘문제 피디’라는 시비도 따라다녔다. 특히 ‘공화국 시리즈’와 ‘재벌 시리즈’는 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환부를 정면으로 드러낸 까닭에 대부분 ‘조기 종영’을 해야 했다. 끝내지 못한 드라마의 숨은 이야기들을 ‘고석만의 첨병’에서 마침내 직접 글로 털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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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2004년 10월 뉴욕 소호의 스튜디오에서 친조카 켄 백 하쿠타(오른쪽)의 머리 위에 페이트칠을 하는 등 생전 마지막 공식 기자회견과 공식 퍼포먼스를 펼쳤다. 이듬해 1월 고석만 연출과 인터뷰에서도 약식으로 비슷한 퍼포먼스를 해보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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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선생 쪽에서 연락이 왔다. 가능한 한 이른 시일 안에 미국 뉴욕으로 오라는 거다. ‘백남준 선생이 당신에게 유언을 하겠다’는 메시지다. 백 선생과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두번 인사를 나누었고, 뉴욕의 한식집에서 같이 곰탕을 먹은 적이 있다. 그런데 왜 내게 ‘유언’을 남긴다는 것인가? 이모저모 생각해보니, 그것은 아마도 이비에스(EBS)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리라. 곧 뉴욕으로 가겠다고 답신을 보낸 뒤, 백 선생에 대해 틈나는 대로 공부를 했다. 두 달이 지나자 일정을 재촉하더니, 개인적인 유언 발표 대신 공개 기자회견과 퍼포먼스로 전환하겠다고 알려왔다. 실제로 2004년 10월 백 선생은 마지막 공식 퍼포먼스를 했다.
2005년 1월, 백 선생이 세상을 떠나시기 꼭 1년 전이다. 뉴욕 소호거리의 ‘백남준 메인 스튜디오’. 창고를 개조한 듯 거친 목조건물에 100명 정도의 기자가 꽉 찼다. 매니저인 켄 백 하쿠타는 76개 나라에서 150명이 왔다고 했다. ‘켄’은 형의 아들로, 백 선생의 친조카다. 이윽고 백 선생이 켄과 나를 중심에 불러 세우더니 1970년대 선보였던 풍금을 넘어뜨려 부수고 페인트통을 붓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내 양복 위로 붉은색과 노란색 페인트가 뿌려졌다. 켄에게는 머리 위에 뿌렸다. 당황스러웠다. 퍼포먼스가 계속 진행 중일 때 뒤켠으로 나와 양복의 페인트를 닦아내고 있었다. 그러자 50대의 키 큰 큐레이터 ‘미스 최’가 나를 힐책했다. “그 옷을 마네킹에 입히면 가격이 얼마나 나갈지 모르는데 무슨 짓이냐?” “출장 왔기 때문에 내일 당장 입을 옷이 없다.” 그 꼴을 2층 난간에서 지켜보던 고양이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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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월 뉴욕에서 자신의 4개 스튜디오를 돌며 마지막 인터뷰를 한 백남준(오른쪽)은 ‘일생을 한마디로 표현해달라’는 고석만(왼쪽) 연출의 요청에 “나는 바보야”라고 답했다. 사진 왼쪽 구석으로, 큐레이터 최아무개씨와 친조카 켄 백 하쿠타의 모습도 보인다. 이비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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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백 선생은 우리에게 하루 종일 시간을 할애했다. 선생의 휠체어를 밀어주는 흑인 여성과 부인 구보타 시게코, 켄, 그리고 켄의 아들이 기록촬영을 하며 뉴욕에 있는 4개의 백남준 스튜디오를 다 돌았다. 활동 연대별로 작품이 채워져 있었다. 설명은 주로 켄이 하고 백 선생은 끄덕끄덕 확인하고 간혹 거드는 식이었다. 이때 이미 모든 저작권은 켄에게 양도한 듯 보였다. 켄과 구보타 시게코 사이에 냉기류가 느껴졌다. 백 선생의 말씀, “예술은 사유재산이 아니다”. 투어의 마지막, 노을빛이 깊게 드리우는 그곳을 ‘제4 스튜디오’라 불렀다. 작지만 초창기 작품이 모아져 있어 정감이 넘쳤다. 선생께 마지막 인터뷰를 하겠노라며 자리를 잡았다. “우매한 질문 같습니다만, 선생님의 일생을 한마디로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선생은 의외의 질문에 잠시 멈칫하더니 “내 일생? 내 일생? 나는… 나는, (절규) 나는 바보야~.” 그 순간 카메라로 얼굴을 줌 인 하고 싶었다. 사인을 주려고 카메라 쪽을 보니 이미 줌 인 하고 있었다. 고개를 반쯤 젖히며 기성에 가깝게 ‘바보야~’를 길게 내뱉는 백 선생 자신이 연출자였다. ‘백남준 다큐’의 마지막 장면을 예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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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월 뉴욕에서 고석만과 이비에스 촬영팀이 찾아간 백남준의 한 스튜디오의 벽에도 그는 낙서처럼 ‘백남준은 바보다’를 써놓았다. 이비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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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이 활약하던 유럽의 1960년대는 황폐했다. 현대미술은 답보 상태였다. 개념미술 아니면 설치미술, 그도 아니면 개념 플러스알파 수준이었다. 동의어 반복이었다. 다들 말했다. “예술은 죽었다.” 참담했다. 그때 치고 나온 것이 ‘플럭서스 운동’이었다. 백남준이 존 케이지, 요제프 보이스 등과 함께 움직이는 미술, 변화하는 미술, 플럭서스 운동을 제창하고 나온 것이다. 무대에서 미술과 퍼포먼스가 이뤄지고, 비디오아트가 창안되었다. 현대미술은 ‘형’의 빈곤과 ‘관념’의 과잉이지만 ‘현대인’은 지성의 빈약과 물질의 과잉이었다. 예술이란 세상을 내 시각, 내 철학으로 보고 이미지화하는 것 아니겠는가? 백남준은 나아가 물리학에서 ‘프랙털 이론’을 끌어들여 파도 같은 “프랙털 아트”를 창안해냈다. 거북선의 이미지를 프랙털 아트로 풀어낸 ‘터틀십’이 대표작이다. 그때 이미 백남준은 주창했다. ‘기술의 발전이 예술을 구원한다.’ 오늘날 ‘키네틱 아트’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헤드라이트를 수십개 모아 소형차만하게 만든 다음, 그 속에 정보기술(IT)을 접목하면 괴물체가 형형색색으로 변하며 움직인다. 최우람의 작품이다. 미래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다가온다. 1960년대의 백남준은 오늘을 내다보고 있었고, 그 융합정신을 오늘의 이비에스에서 꽃피우고 싶었다.
‘3·3·3 전략이 뭔가?’ 아이디어는 끙끙댄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번뜩이는 것이다. 그러려면 기초가 튼튼하고 철학이 뚜렷하고 트렌드를 읽는 안목이 확실해야 한다. 아이디어 내는 데 3일. 그리고 3주 안에 기획이 정립되어야 하고, 3개월 안에 첫 삽을 뜰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이른바 ‘3·3·3 전략’이다.
사내문화를 바꾸자. 회사에 들어서는 순간 새로운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비에스에는 <문화, 문화인>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과 회사의 로비를 적절하게 연결시키는 기획을 했다. 월 2회 정도 미술 분야의 예술가가 출연하는데 그의 작품을 특색있게 전시하는 것이다. 전시 기간은 2주일을 넘지 않게, 장르는 가급적 다양하게, ‘문화, 문화인’의 중심 배경으로 활용하고 일반인 전시도 하고, 특히 사내의 집회도 열릴 수 있도록 했다. 어느날 월요일 출근을 하면 입구가 막혀 있고 돌아서면 다른 문이 열리며 다양한 터널이 되어 이층으로 올랐다가 자기 사무실에 가기도 하는 경이로움을 맛보게 했다. 매일 여행을 떠난다. 다른 인간의 영혼을 만난다. 간디가 독립보다 더 중요한 것이 화장실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비에스 사옥은 작은 공간이지만 신비롭게 변해가고 있었다. 일류가 되어가고 있었다. 스페이스를 관람하러 오는 젊은 관객들도 놀라워했다. 이 땅의 청년문화가 새롭게 쓰이고 있었다.
‘3·3·3 전략’은 또 있다. 나의 사장 취임 제일성 ‘시청률표 배포금지령’에 구성원들은 멘붕이었다. 그 뒤 3개월. 금단현상 같은 것이 생겼을 것이다. 삶의 기준이 없는 것은 기준이 잘못된 것보다는 좋다. 손이 떨리고 안절부절못하고, 서점에 책을 사러 갔다가 오락가락하다 그냥 돌아오거나 쓸데없는 책만 여러권 사들고 오는 현상이 생긴다. 그 기간을 침착하게 연마하는 데 3개월쯤 지나고, 또 3개월 시행착오를 겪은 뒤 이제 잠재실력이 나온다. ‘3·3·3 전략’. 이 단순함은 치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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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만 사장 시절 ‘3·3·3전략’에 따라 제작된 여러 프로그램들은 교육 중심 방송으로서 이비에스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살렸다는 호평 속에 장수했다. 책 시리즈로도 널리 익힌 <부모 60분>도 대표적이다. 이비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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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빛나는 프로그램들이 나왔다. <60분 부모> <하나뿐인 지구> <극한직업> <지식채널 이(e)> 등이 각광을 받았고 ‘스폿(SPOT) 다큐’ 그리고 ‘예고편의 다양화’ 등이 이뤄졌다. 문화사 시리즈 다큐드라마 <명동백작>은 다른 의미의 빛나는 프로그램이었다. 뜻있는 많은 사람들이 격려를 해주었다. 한번은 국회에 출석했는데 독설로 유명한 다선 의원이 연단에 불러 세웠다. 주어진 발언 시간 7분 가운데 6분50초쯤 <명동백작>을 칭찬하더니 남은 10초간 내게 감회를 이야기하라고 했다. 고맙다고 말했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2004년 ‘문화사 시리즈 2편’은 ‘100인의 문화 증언’ 인터뷰를 통해 1960년대의 ‘문화’를 재생했다. 4편에서는 70~80년대를 말하는 ‘문화 증언’을 드라마와 교차 편성했다. 시대 배경과 드라마의 조합. 교육방송다운 신선한 편성이었다. 그리고 ‘제3편―지금도 마로니에는’. 32부작으로 2005년 1~5월 방송했다. ‘절망 끝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시인’ 김지하를 중심으로 <무진기행>의 김승옥, ‘의식의 힘’을 보여주었던 김중태, 3인의 시인을 대표로 60년대 대학가의 치열한 청년정신을 그렸다. 참혹했던 ‘명동시대’는 밝고 맑은 데 비해 ‘지금도 마로니에는’은 60~70년대 무겁고 암울한 회색의 빛이었다. 자연스럽게 군사문화의 폐해가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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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비에스에서는 첫 시도한 다큐드라마 ‘명동백작’의 성공에 힘입어 ‘문화사 시리즈’는 4편까지 이어졌다. 2005년 1월 방영된 ‘제3편-지금도 마로니에는’에서는 서울대 문리대 시절 ‘김중태(최철호·왼쪽)·김지하(이병욱·가운데)·김승옥(한범희·오른쪽)’을 중심으로 1960년대 청년 저항정신을 재현했다. 이비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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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스페이스 공감>은 꽉 찼다. 개관 초 2주일치 예약이 밀리더니, 6개월이 지나자 3개월치 예약이 밀리는 기염을 토했다. 3개월 대기는 최고 기록이다. 이 땅의 언더그라운드문화를 끌어내어 청년문화의 다양성을 추구하자는 뜻이 있었다. ‘스페이스 공감’은 텐트폴 현상으로 이비에스를 일으켜 세웠다. ‘스페이스공감’ 팀에는 “목표 달성에 과도하게 의미 부여 말고 과정 자체를 아름답고 자부심있게, 그 자체를 즐겁게 만들자… 우리끼리 더불어 작은 숲을 꾸미자” 했다. 179석의 작은 숲은 아름다웠다.
수능 강의를 비롯한 ‘이-러닝’에 대한 동남아 쪽의 관심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교육 교재의 수출. 국가적 사업이다. 교재를 요청하는 나라들은 비교적 후진국이었다. 교육부와 협의하고 내부 숙의를 거친 끝에 ‘국회의원 사절단’을 구성했다. 황우여·정봉주 의원 등 국회 교육위원회 의원 4명과 교육방송팀이 베트남,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등을 답사했다. 모두가 컴퓨터를 켜면 부팅까지 30분쯤 걸리는 나라다. 우리의 이-러닝 시스템과 콘텐츠를 절박하게 요구했다. 답사는 효과적이었다. 국가적 차원에서 국회가 지원을 약속했다. ‘이비에스 동남아 교육벨트’의 구상이 그때 나왔다. 동남아의 뒤처진 나라들, 그들은 파도가 밀려오는데 조가비를 줍고 있었다.
‘이비에스 국제다큐영화제’는 국내보다는 국제적으로 화제였다. 다큐멘터리스트들은 가난하다. 그러나 말발은 세다. 그들의 말발 덕분에 덴마크의 국영 라디오 방송국 개축식 귀빈 초청을 받았다. 개축의 핵심은 세계 최고의 음향스튜디오 건립이다. 최신 장비의 콘서트홀은 웅장하다 못해 신비로웠다. 사양산업 라디오가 최고의 스튜디오를 꿈꾸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그들에게 최고를 꿈꾸게 하는가? 최고의 예술이 일상화되었을 때 문화가 된다. 유럽은 ‘키즈 콘텐츠’에 열광하고 있었다.
<해리 포터>를 만들어낸 유럽이다. 영국의 경제를 흔들었던 ‘해리 포터’. 작가 조앤 롤링은 지금도 하루에 최소 1억원을 번다. 문화와 산업, 둘 다 잡은 모범 콘텐츠다. 2000년 ‘해리 포터’ 한편이 현대자동차 수출 총액보다 높고, 우리나라 아이티 국외 수출 총액보다 높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미국에서도 ‘무기 장사’ 다음은 문화콘텐츠 산업이다. 20년 뒤 미래 먹거리는 무엇인가? 문화는 미래 산업이다.
이비에스에 ‘뽀로로’가 찾아왔다. 어느날 오콘의 김일호 사장이 ‘뽀로로’ 스케치 몇장을 들고 왔다. ‘뽀로로’, 그놈 참 예뻤다. 다음날 170장의 스케치를 사장실과 접견실에 쭉 늘어놓고 감상했다. 그때 제안했다. ‘사람마다 기업마다 특성이 따로 있다. 독식하면 체한다. 분야별로 합리적 컨소시엄을 하자.’ ‘4개사가 정확히 25%씩, 권리와 의무를 균등하게, 갑질 못 하게 배분하여 각자 소임을 다하자.’ 절대 독식금지. 오콘은 원소스 창안자로, 이비에스는 2차 저작권을 포기하기로 하고, 마케팅과 투자자를 찾아 나섰다. 하나로통신에서 투자하고 아이코닉스(최정호)가 국내외 마케팅을 책임지는 균등배치가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 ‘10년 계약’을 하기로 했다. 그런 장치가 북한과의 주문자생산방식(OEM)도 가능하게 한 것이다. 문화가 산업으로 자리잡아가는 험난한 역경에 한가닥 지혜를 이비에스가 펼쳐 보였다. 어린이 애니메이션 시리즈 <뽀롱뽀롱 뽀로로>는 대성공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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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고석만 사장 시절 오콘·아이코닉스 등과 합작투자 계약을 마무리 짓고 이비에스에서 본격 방영하기 시작한 <뽀롱뽀롱 뽀로로>는 어린이들 사이에 ‘뽀통령’으로 불리며, 지금까지 가장 성공적인 국산 캐릭터 프로젝트로 꼽힌다. 이비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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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 취임 때 ‘소득과 분배’를 약속했다. 출판은 수능연계율과 직결되어 있다 ‘이-러닝’으로 수능교재 출판 수입이 생겼다. 한국방송(KBS) 대비 54% 월급을 1년 사이 90%대로 끌어올렸다. 전광석화처럼 이뤄졌다. 이사회에서 반발했다. 급기야 청와대에서 기획실장(김준한)을 호출했다. 사막에서 물을 떠 올 만큼 기개가 있는 그였지만 머리카락이 뽑히는 듯한 수모를 당했다고 했다. 우리의 위기를 막아준 것은 ‘교육방송 시청자위원회’였다. 백낙청 선생을 삼고초려하여 위원장으로 모셨다. 시청자위원회는 회의 전체를 녹화해 전국에 방송했다. 자율기구인 시청자위원회는 우리를 엄중 모니터하는 동시에 어젠다를 제시했고, 밖으로는 천하를 호령하듯 방패막이가 돼주었다.
이비에스의 원천적인 고민은 재원이었다. 한국방송이 시청료 인상 캠페인을 할 때면 이비에스의 동참을 요구했다. 불편하지만 참여한다. 20여년 전 ‘케이비에스 3티브이’가 ‘교육방송’으로 독립할 때, 시청료의 3% 배분율이 아직도 작동하고 있는 기현상이다. 다른 돌파구를 찾아나섰다. 문화방송(MBC)의 대주주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의 이상희 이사장을 만나 진지한 협조를 구했다. 엠비시와 이비에스의 설립 목적엔 공통적으로 ‘교육’이 있다. 공식 지원을 요청했고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다. 그즈음 해묵은 ‘엠비시-이비에스 통합론’이 다시 방송가에 회자되었다. 찬반 의견이 비등했다. 그 와중에 엠비시 차기 사장 추대 움직임이 나를 갈등에 빠지게 했다. 방문진 이사인 김형태 변호사가 가장 적극적이었고 임국희 이사도 우호적이었다. 이수호 이사와 뜻을 같이하는 방문진 이사 5명의 요청으로 비밀회동을 하기도 했다. 솔직히 심하게 흔들렸다. 그들은 ‘사탄’이 아니다. 고향 회귀 본능을 자극한 것이었다. 그때 알게 모르게 정치적, 정치 외적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급기야 ‘이비에스 사장’ 사의를 표명했다. 내 생애 최악의 패착이었다. 지금, 새삼 고개 숙여 이비에스 후배들에게 참회록을 바친다. “밖의 황금을 쫓는 자는 그 빛에 눈이 멀고, 안의 황금을 캐는 자는 그 빛에 눈을 뜬다.”
집필 고석만,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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