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5.09 05:03
수정 : 2018.05.09 10:00
네이버에 갇힌 대한민국 언론사 인턴기자의 씁쓸한 하루
실시간 검색어에 맞게 무한 생산
포털에서 일하는 건지 헷갈려
매일 ‘어뷰징’에 자책감 느껴
온종일 수십건의 짜깁기 기사를 써내야 하는 기자의 하루는 어떨까? 한 유명 언론사 전직 인턴기자가 ‘어뷰징’ 기사를 쓰던 지난해 어느 날을 회고한 글을 보내왔다.
언론사에 인턴기자 이름으로 출근한 지 벌써 4개월이다. 이제는 눈 감고 기사를 쓸 수 있을 것도 같다. 오늘은 아침부터 하늘에 구멍 난 것처럼 비가 온다. 어떤 기사들을 ‘생산’해야 할지 각이 ‘딱’ 잡히는데, 그냥 집에 있는 컴퓨터로 일하면 안 되나….
아침 9시. 출근하자마자 모든 포털에 접속한다. 실시간 검색어를 한번 쭉 훑었다. 우리 회사 기사와 내용은 겹치지 않으면서, 트래픽(서버에 전송되는 데이터의 양)이 잘 나오는 기사를 써야 한다. 우리 회사 기사와 내용이 비슷하면 포털에서 ‘어뷰징’으로 제재한다. 입사한 순간부터 언론사가 포털에서 퇴출당하면 큰일이라는 말을 귀에 딱지 생기게 들었다. 항상 주의하고 있다.
모든 기사는 포털이 기준이다. 포털에서 메인에 잘 걸어주는 기사는 적당히 자극적인 사진과 함께 제목·내용에 실시간 검색어를 넣은 것이다. 검색어 하나에 관해 글을 쓰고 말미에 누리꾼 의견을 빙자한 내 생각을 써서 짜깁기하면 곧 트래픽이 잘 나오는 기사가 된다. 이런 식으로 기사 무한 생산이 가능하다.
이날은 ‘폭우’가 계속 검색 순위 1위더니 ‘교통사고’가 새 인기 검색어로 올라왔다. 이 검색어로 기사를 써야 한다. 검색 순위 상위 단어 중에 관련 기사가 올라와 있지 않으면 “왜 일을 하지 않느냐”는 선배(정규직)의 지적이 날아오는 탓이다.
‘폭우’와 ‘교통사고’ 검색어가 들어간 기사를 다 ‘처리’했다. 이제 좀 쉴 수 있나? 선배가 다시 눈치를 준다. 이제 네이버에서 자주 검색될 만한 단어를 넣어 ‘5분에 하나씩’ 쓴다. 당연히 짜깁기다. 내 앞자리 인턴은 기사량이 너무 적다고 상사에게 불려가 지적을 받기도 했다. 내가 입사하기 전에는 주간 회의 때 인턴기자들의 기사 트래픽 순위를 매기고, 순위가 낮은 이에게 압박을 줬다. 그만둔 인턴도 있었다고 한다. 나도 (기사) 트래픽이 적으면 (상사의) 은근한 눈총을 받았다. 공개적으로 질타받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처음 인턴에 합격했을 때 이런 일을 하게 될 거라고 상상도 못 했다. 업무 교육 첫날 가장 먼저 들은 말은 기사의 생명이 ‘스피드’라는 얘기다. 실시간 검색어를 이용해 가장 빨리 쓴 기사가 네이버 메인에 걸리기 때문이다. 스피드를 살려 처음 쓴 내 기사는 메인에는 걸렸지만 오타투성이에다 표절 기사였다. 하지만 난 그 기사로 칭찬을 받았다. 지금은 내가 포털에서 일하는 건지 언론사에서 일하는 건지 헷갈릴 정도다. 나처럼 9시간 내내 앉아서 포털 검색어만 들여다보며 기사를 쓰는 인턴이 우리 사무실에만 6명이나 더 있다. 포털 검색어를 한순간도 놓치지 않기 위해 회사 컴퓨터는 연휴나 주말에도 ‘풀가동’된다.
저녁 6시. 선배(정규직)가 불러서 내가 이날 트래픽 잘 나오는 기사를 많이 썼다고 칭찬했다. 그러다 어떤 기사를 가리키며 이런 제목은 너무 평범하니, 다음에는 더 자극적으로 올려보라는 말을 끝으로 퇴근하라고 한다. 오늘 쓴 기사만 약 40건. ‘포털 바라기’ 선배는 입사 이후 내내 자책하는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구예지 전 유명 언론사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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