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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1.05 07:56 수정 : 2007.01.10 18:41

대학시설 방관자 범생이에서 사회참여 운동가로 변신한 배우 권해효씨. 김정효 기자

[1987년, 그 뒤 20년] 386 다섯갈래의 삶 ② 배우 권해효

가정형편에 쫓겨 소 닭보듯
87년은 가장 기억이 적은 해
민가협 감옥체험 계기로
사회적 실천 참여 늘어나
“지속성이 운동의 필수” 꼽아

‘우리겨레 하나되기 운동본부’ 홍보대사, ‘호주제 폐지 및 평등가족 만들기’ 홍보대사, ‘대추리 평화를 위한 문화인연대’ 회원, ‘민주화실천 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후원회원, 그리고 수많은 집회·시위의 사회자 ….

배우 권해효(42)씨를 설명하는 또다른 단어들이다. 영화나 연극 바깥의 집회·시위 현장에서, 대사가 아닌 자기의 말로 대중과 호흡하는 운동가인 셈이다. 1980년대 대학시절부터 10여년을 사회운동 바깥에서 맴돌던 그가 뒤늦게 그 중심으로 들어선 이유는 무엇일까?

최루탄 피해 등교하던 ‘범생이’

“최루탄 피해 학교 가는 방법을 궁리하면서 잘 피하면 자랑삼아 떠들기도 하고 … 용기가 없어 짱돌은 못 던지던 그런 시절이었죠.”

그가 대학에 입학한 1985년은 대학 학생회가 막 부활하고 교정에는 최루탄 내음이 가실 날 없던 때였다. 하지만 그에게 매캐한 최루탄은 독재정권의 탄압을 상징하기보다는 그저 맵디매운 물질에 불과했다. 수업을 듣고 밤늦게까지 공연하느라 학생운동에는 눈돌릴 틈이 없었다. 아버지가 정년퇴직해 대학생 3남매의 학비를 감당할 형편이 아니었던지라, 그는 수업시간마다 맨 앞자리에 앉아 교수와 ‘눈을 맞추며’ 장학금을 받아내야 했다.

86년 입대한 그는 군에서 87년을 맞았다. “87년은 인생에서 제일 기억이 적은 해입니다. 연초 팀스피리트 훈련을 했고, 4·13 호헌조처가 나온 뒤 매일 밤 정훈교육을 받았고, 5월부터는 충정훈련에 들어갔어요. 산에 올라가 1m짜리 나무를 잘라 와서는 물에 쪄서 진압봉을 만들고 땡볕에서 훈련을 했지요.”


부채의식에 시작한 늦깎이 사회참여

권해효씨(뒷줄 맨 오른쪽)가 대학 새내기 시절인 1985년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친구들과 전남 해남 땅끝마을로 간 모꼬지에서 기타를 치고 있다.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은 가볍게 생각한 일에서 비롯됐어요. 변영주 감독이 ‘형, 민가협에서 하는 하루 감옥체험 한번 해봐’라고 권하기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숨 자고 나오면 되겠다’ 싶어 흔쾌히 수락했죠.”

1996년 서울 명동에서 열린 하루 감옥체험 행사. 손 쉬운 일로 생각했던 것이 막상 해보니 쉽지 않았다. 가짜 간수가 눕지도 못하게 하고, 밖으로 불러내 얼차려를 주기도 했다. 민가협 어머니들이 눈물을 흘리며 가짜 간수에게 달려들었다. 옆 감방에 있던 영화평론가 정성일씨는 “국가보안법 철폐하라”고 외쳤다. 그는 ‘나도 연기를 해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차마 하지는 못했다. 이후 사회적인 ‘실천’에 참여하는 횟수가 늘기 시작했다.

“80년대 대학에 다녔던 이로서 부채의식이 작용했어요. 마음으로 동조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사람으로서 말이죠.”

친구들 가운데 상당수는 학생운동을 했다.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친구도 있었고, 시위 도중 다친 친구도 있었다. 그때 병문안을 가지 못한 미안함은 아직도 남아 있다.

끊임없이 새로운 판을 찾아서

이후 민가협의 ‘인권 콘서트’ 행사에 꼬박꼬박 참여했고, 호주제 철폐운동, 장애인 인권운동, 이주노동자 인권운동 등으로 폭을 넓혀갔다. 이제는 ‘잘 나가는’ 집회 사회자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2001년 가을부터는 사회자 구실을 넘어 본격적인 활동가로 나아갔다.

“강준만 교수 등의 책을 읽으며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중 마침 요청이 와 ‘안티조선’ 운동에 참여했어요. 배우로서는 유일한 참여자여서 인터뷰가 이어졌고, 대학 총학생회에서 강연 요청도 왔어요. 이 일을 계기로 ‘책임을 갖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젠 얘기를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죠. 사실 그전에는 행사에 참여해도 ‘자연인 권해효’로서 발언을 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이때부터는 학교나 단체에서 강연 요청이 오면 한달음에 달려갔다. 이제 민가협에서는 10년 넘게 일하는 ‘장수 활동가’ 축에 든다. 그는 지속성을 운동의 필수요소로 꼽는다.

새해를 맞아 그는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새 판을 또 하나 벌일 계획이다. “청소년단체 문화교실에 참여하다 보니 아이들이 이쪽에 욕구가 많다는 것을 느꼈어요. 청소년 문화예술단체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장을 마련해주고 싶어요. 앞으로 어쩌면 이 일에 더 신경써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늦바람은 참 무서운가 보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20년을 말한다 “80년대 시대정신은 누구에게나 녹아 있다”

“1980년대 학생운동하는 친구들에게 심정적 지지는 보냈지만, 개인적 고민이 많아 함께 운동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80년대 시대정신은 내게도 녹아 있었나 보다. 90년대 초 경북 울진에서 반핵운동을 시작했다. 핵발전소가 세워지면 피해를 보는 이가 민중, 사회적 약자였다. 이들에게 저항의 근거가 되는 정보를 제공하고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내 몫이라고 생각했다.” 김혜정(44)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

“학군단(ROTC) 소속이어서, 시위에는 전혀 참여할 수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제대한 뒤 보험사에 취업했는데, 회사가 직원들을 너무 폭압적으로 대했다. 노조를 설립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80년대에 불의에 저항하는 것을 보고 배웠기 때문이고, 그런 경험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근영(41) 사무금융연맹 노사대책위원장

“작가가 출발할 때는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를 생각하는데, 내게는 그게 80년대 경험이었다. 당시 행동으로 시대에 가담하지는 못했지만, 한발짝 늦게라도 그 시대를 정리하는 사람의 몫을 하려 한다.” 극작가 김명화(41)씨

“대학교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87년 (살던 곳인) 경주에서도 시위가 있어 조금씩 접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사회참여를 하겠다고 생각만 하고 못하다가, 결혼하고 애가 태어나 어느 정도 안정이 돼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큰 일은 아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시민단체의) 인쇄·편집·디자인 등을 돕고 있다.” 회사원 김동훈(39)씨·참여연대 자원봉사자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87년 그 때 그 자리- 치열했던 명동성당 지금은…

87년의 명동성당. 자료사진
87년 6월 뙤약볕에서 750여명의 대학생과 시민이 모여 농성하던 공간이 있었다. 경찰이 이들을 두겹세겹 감쌌지만, 그 밖을 또 애워쌌던 시민들은 그들에게 응원을 보냈다. 농성이 장기화했지만 경찰은 함부로 진입할 수가 없었다. 명동성당이라는 ‘신성한 공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김지현(53)씨는 “경찰, 안기부 등에서 ‘어쩔수 없다’며 쳐들어온다고 할 때, 김수환 추기경 등이 나서서 ‘후회하게 될거다’며 경고해 막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명동성당은 이때부터 ‘민주화의 성지’가 됐다. 84년부터 열린 ‘광주 사진전’, 88년 서울대생 조성만(당시 24살)씨 투신도 여기서 벌어졌다. 숱한 시위와 농성, 집회가 성당 입구와 마당에서 벌어졌다.

요즘은 이런 기억이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다. 천막을 깔고 농성을 하는 단체는 지난 1년여 동안 거의 없었다.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 덕분인지, 명동성당쪽에서 지난 2000년 12월26일부터 사전협의 없는 집회나 농성을 금하고 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허영엽 서울대교구 홍보실장은 “노조가 회사내 문제로 성당에 와 시위를 할 때 집단이기주의로 판단한다”며 “최근에는 성당 쪽과 집회 개최자가 상의해 시위 일시와 장소를 정한다”고 설명했다.

사회적 약자가 제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으로 이곳 명동성당 말고 다른 곳을 떠올리기는 아직 쉽지 않다. 일자리를 빼앗긴 비정규직, 생존권을 위협받는 농민, 그리고 핍박받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어디서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고 있을까.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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