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7.01.09 13:36 수정 : 2007.01.10 11:43

16년 전 홀몸으로 강원도 횡성으로 귀농한 구현석씨가 횡성여성농업인센터에서 아들 민범, 용이, 부인 한영미씨(왼쪽부터)와 나란히 앉아 있다.

[1987년 그 뒤 20년] 386 다섯갈래의 삶 ⑤
학생운동가에서 농민운동가로 구현석씨

절차적 민주주의는 나아졌지만
농촌은 독재정권때보다 더 열악

글을 쓰던 뽀얀 손은 16년 넘게 농기구를 잡으며 건강한 구릿빛으로 변했다. 자취를 하면서도 손수건을 꼬박꼬박 챙기던 깔끔함은, 웬만큼 지저분한 것은 너털웃음으로 넘길 수 있는 넉넉함으로 바뀌었다. 1991년 서울에서 강원도 횡성으로 내려와 농사를 짓고 있는 구현석(41)씨 얘기다. 그 곁에는 농사와 여성농업인센터 일을 함께 하는 부인 한영미(40)씨가 있다.

문학을 전공한 농민 부부
“남편은 고등학교 때 국어를 무척 잘했고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고 시어머님이 말씀하셔요.” 구씨가 국문학을 전공으로 택한 이유를 한씨가 설명했다. 고교 시절 반에서 1등을 도맡던 구씨는 흥사단아카데미 활동을 접하며 성적이 떨어졌다. 어머니는 걱정을 했지만, 흥사단 활동을 그만두지 않았다. 85년 대학에 발을 들여놓은 뒤에는 본격적으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운동 말고는 다른 것을 생각한 적이 별로 없어요. 87년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죠.”

이 때문에 87년 6월 항쟁을 감옥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88년부터는 농민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하고 강원·전남 농촌에서 경험을 쌓았다. 피땀 흘려 농사지어도 삶은 어려워지기만 하는 농촌 현실을 피부로 느끼고, 농민회 ‘형님’들한테서 농사짓는 법도 배웠다. 같은 생각으로 활동을 벌이던 부인 한씨와도 인연을 맺었다.

일문학을 전공한 한씨는 86년 대학에 입학했다. 농사꾼 집안에 태어나 농부를 꿈꿨지만, ‘집안의 감시’가 심해 1~2학년 때는 적극적으로 활동에 나서지 못했다. 그래도 농부의 꿈을 접지 못해 3학년 때부터 차곡차곡 농촌 경험을 쌓았다.


환경농업 포기못해 부채만 1억
FTA시위등 매년 ‘아스팔트 농사’

빚더미 위에서 계속되는 농사
“6월 항쟁을 통해 절차적 민주주의는 나아졌지만 농촌의 삶은 더 악화됐어요. 독재정권 때보다도 더 열악해져만 갔어요.”

구씨가 이곳에 온 이유다. 92년 결혼한 구씨 부부는 2005년까지 농장 귀퉁이의 축사를 고쳐 지냈다. 물이 나오지 않아 제대로 씻지도 못했다. 둘째를 낳을 때는 한씨가 아예 친정집에서 몸을 풀었고, 젖먹이는 두돌까지 한씨 언니 집에서 지내야만 했다.

이런 환경에서도 ‘손해보는 일’을 고집했다. 한번도 환경농업을 포기한 적이 없다. 포도농사를 지으며 ‘천연 추출물’로 벌레를 없애는 일은 농약을 치는 것보다 갑절 이상 품이 들었다. 수확 역시 빈약하기만 했다. 당시만 해도 친환경 작물에 관심이 높지 않던 때라 제값도 못 받았다. 답답한 마음에 한씨는 수확물 겉포장에 천연비료 포장지를 떼어 붙이기까지 했다. 작물 선택에도 애를 먹었다. 토마토를 지으면 토마토 값이, 오이를 하면 오이 값이 폭락했다.

“어찌나 가격이 떨어지는 작물만 골라 지었는지, 동네 사람들이 ‘민범(큰아들 이름)이네가 농사지어 돈 버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할 정도였어요.”

빚은 차곡차곡 쌓였다. 버섯이나 토마토 농사가 실패하면 한해 1천만원씩 빚이 쌓이고 그 결과 생활자금을 빌리면 또 빚이 불어났다. 그렇게 16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부채가 1억여원에 이른다.

올 농사 망쳤다고 포기할수야
“FTA 싸움서 농민이 이깁니다”

구현석씨가 1985년 대학 입학식에서 고교생 티를 채 못벗은 모습으로 부모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아스팔트 농사’
겨울철이면 구씨 부부는 또 하나의 농사를 짓는다. 91년 우루과이라운드 반대 싸움을 시작으로 94~95년 의료보험 일원화 문제, 97년 농가부채 문제 등으로 거의 해마다 상경 시위를 벌였다. 이른바 ‘아스팔트 농사’다. 지난 연말에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시위를 하러 서울에 올라갔다.

2004년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될 때는 국회를 찾아가기도 했다. 80년대를 함께 거리에서 보낸 ‘386 의원들’ 사무실도 방문했다. 임종석·송영길·신계륜 의원 등을 찾았지만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그들이 당론을 바꿀 힘이 없다는 것은 잘 알아요. 그래도 얘기할 건 해야겠기에 찾아갔는데, 못 만났어요. 의원들이 농업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결국 문제는 농민이 해결해야 한다는 게 구씨 생각이다. 해마다 짓는 아스팔트 농사도 흉작을 거듭하지만 매번 새 희망의 씨를 뿌린다. 농사꾼이 한해 농사 망쳤다고 그 다음해 농사를 포기하지 않듯. 한해 농사 중 씨 뿌릴 때가 가장 흥겹다는 구씨는 “한-미 자유무역협정 싸움에서도 당연히 이길 수 있죠”라고 자신했다.

그들의 뜻이 피어날 그날까지
지난해엔 새집을 지어 이사를 갔다. 20평 통나무집을 만드는 데는 농민회원이자 목수인 한영국씨 등의 도움이 컸다. 한씨네는 노동운동을 하다 귀농했다. 이 동네엔 학생운동 출신도 윤종상·오건태씨 등 10여명에 이른다. 토박이 농사꾼 유만영씨 등 농민회 회원들과도 서로 기대며 지낸다.

구씨는 “6월 항쟁 때는 대안을 내놓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싸웠다”며 “농민은 소수자지만 농업의 중요성에 대한 국민의 공감대를 키워 농민운동을 대중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확물이 제값을 못 받아도,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청년 때 품었던 본디 뜻을 꿋꿋이 이어가는 구씨 부부와 그 이웃들은 그들의 뜻이 활짝 피어날 봄이 언젠가 오리라 굳게 믿고 있다. 〈끝〉

횡성/글·사진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20년을 말한다
“노동현장서 20년…조합원들과 대화 즐겁다”
“반공주의등 아직도 남아…민주주의 멀었다”

“군대에 있으며 4·13 호헌조치 등을 텔레비전으로 접했다. 복학한 뒤 학생운동을 계속하다 졸업하자마자 돼지·소를 키우러 이곳에 들어왔다. 87년 이후 형식적 민주주의는 이뤘지만, 내용적으로는 아직 멀었다. 아직도 지역감정이나 반공주의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도 내가 가장 하고 싶은 것을 하니까 뿌듯함을 느낀다. 물론 친구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을 보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가끔씩 부에 대한 유혹도 느낀다. 그래도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고 있어 그다지 흔들리지 않는다.” 김창호(41) 경북 영주시 농민회 회원

“대학을 1년 다니다가 바로 (노동) 현장에 뛰어들었다. 1987년 당시에는 인천민주노동자연합에서 활동했다. 6월 항쟁의 결과물인 6·29 선언이 나오자 노동자 투쟁이 봇물처럼 일어났다. 당시 구호인 ‘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가 그 의미를 정확하게 말해준다. 그때부터 계속 현장에 남아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에 있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다. 학창 시절엔 선생님을 하고 싶었는데, 노동조합 활동에서 조합원 교육도 매우 중요하다. 특히 산별노조의 경우 산별노조가 왜 필요한지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이해가 필요해 여기에 집중하고 있다. 또 다양한 욕구의 조합원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겁다.” 김호규(45) 현대자동차 5공장 노조 조합원

“87년 부산 남포동, 부산역 등을 내달리며 집회·시위에 참여했다. 대학 2학년생으로서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정립되는 시기여서, 당시 경험이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노동현장, 농민현장에서 어떻게 사회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지 고민하는 출발점이 됐다. 아직도 농민들의 의식을 바꾸고 현실에 참여하도록 하는 데 내가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노동하는 것에서도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박기인(39) 경남 함안군 농민회 회원

그 자리: 출정가 불렀던 대학광장 선거유세마저 잦아들어

1988년 11월3일 오후 서울 연세대 도서관 앞 민주광장 앞에서 학생 1천여명이 모인 가운데 ‘전두환씨 부부 체포 출정식’이 열리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대학마다 학생들이 집회를 벌이는 ‘광장’이 있다. 1987년 학생들은 이곳에서 몇천~1만명 이상씩 모여 출정가를 부른 뒤 거리로 나섰다.

서울대 도서관 앞 광장인 ‘아크로폴리스’는 83년 서울 공대생 황정하(당시 23살)씨가 학내에 상주하던 경찰을 피해 도서관에서 밧줄을 타고 시위를 하다 추락사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연세대 도서관 앞 ‘민주광장’은 87년 이한열씨가 최루탄에 맞기 직전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가 열린 곳이다.

각 학교의 광장은 이처럼 온갖 사연을 머금고 있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변화를 겪고 있다. 주로 도서관 앞에 자리잡아서, 이제는 공부하는 학생들로부터 집회가 시끄럽다는 항의가 거세다. 해마다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이뤄지던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 유세도 지난해에는 다른 곳으로 옮겨 열렸다. 서울대 민주노동당 학생위원장 노윤정씨는 “작은 시위의 경우 소리를 줄여가며 하고, 대규모 시위는 사전 공지를 통해 양해를 구하지만 민감한 학생들이 여전히 항의를 한다”고 말했다.

비운동권 총학생회가 늘어나면서 학내 집회 자체가 사라지는 대학도 늘고 있다. 연세대 총학생회 관계자는 “학습권을 저해할 수 있기 때문에 민주광장은 물론 다른 곳에서도 집회는 하지 않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정훈 기자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1987년 그 뒤, 20년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