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7.06.07 07:39 수정 : 2007.06.16 20:14

서울 상계동 173번지 주민들이 지난 1987년 4월14일 천막집 철거에 나선 철거반원들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20년이 지난 뒤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변모한 상계동 173번지의 현재 모습. 강창광 기자chang@hani.co.kr

1986년부터 1년 남짓 철거반과 세입자 또는 경찰과 세입자들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빚어졌던 ‘상계동’은, 행정구역으로는 노원구 상계5동 173번지 일대를 가리킨다. 지금은 지하철 4호선 상계역 2·3번 출구 앞 벽산아파트가 들어선 자리다.

이 일대에는 60년대 중반부터 서울시가 추진한 ‘불량거주지 정비사업’에 따라 청계천과 한남동, 명동 등지에서 쫓겨난 철거민들이 살았다. 나중에 ‘도시빈민’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온 이농민이나 그 자식들이 주를 이뤘고, 날품팔이나 노점상을 하며 생계를 겨우 이어가는 가구가 많았다. 지하철 4호선이 놓이면서 이곳이 재개발 사업 예정지구로 지정된 85년 4월에는 1524가구(집주인 943가구, 세입자 581가구)가 살고 있었다. 집이래야 4~8평 크기인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수도와 화장실도 공동으로 썼다.

86년 3월 철거 계고장이 나오자 집주인(가옥주)과 세입자의 이해관계는 극한 대립으로 치달았다. 집주인들은 넓은 평수의 아파트를 기대하며 빠른 철거를 바란 반면, 세입자들은 천주교 도시빈민사목협의회의 도움을 받아 대책위원회를 만들고 ‘선 대책 후 철거’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세입자가 160여가구로 줄어든 6월26일 집주인들은 철거반을 동원해 철거를 강행했다. 경찰은 집주인들의 폭력행사를 방조하며 세입자들의 시위를 강력하게 제지했다. 역부족을 절감한 세입자들은 이 무렵부터 외부의 사회운동 단체나 다른 지역 철거민들과 연대를 모색하게 됐고, 시위의 성격도 점차 반정부 투쟁으로 변모했다. 많은 세입자들이 폭행을 당하거나 구속 등 처벌을 받았다.

집주인들은 ‘4·13 호헌조치’가 발표된 바로 다음날인 87년 4월14일 서울시에 행정대집행을 요구해 세입자들이 살던 천막을 완전히 철거했다. 남은 세입자 78가구는 이날부터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하며 6월 항쟁에 참여했다. 이들은 88년 1월을 전후해 두 곳으로 나뉘어 이주했다. 경기도 남양주 배밭으로 간 37가구는 ‘나래마을’을 일궜지만 보름마다 비닐하우스가 철거를 당하는 바람에 ‘보름집’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성당에 마지막까지 남았던 35가구는 부천시 고강동에 ‘보람마을’이라는 공동체를 만들었다. 나래마을에서 보람마을로 다시 옮겨간 사람도 일부 있었다. 19년이 흐른 지금 이 보람마을에는 안은정씨네를 비롯해 3가구가 남아 있다. 강희철 기자 hckang@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1987년 그 뒤, 20년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