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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6.07 07:51 수정 : 2007.06.16 20:15

6월항쟁 당시 이화여대 정문 앞에서 ‘짱돌’을 던지던 여대생 윤은영씨는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민을 가서 살고 있다. 왼쪽부터 남편 최강석씨, 아들 한뫼, 막내딸 한내 그리고 윤씨. 맏딸 한들은 사진을 찍느라 빠졌다. (왼쪽) 윤은영씨 제공 / 1987년 당시 이화여대 2학년이던 윤은영(맨 왼쪽)씨가 5월26일 학교 들머리에서 교정으로 진입한 경찰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다. 윤석봉 전 기자 제공

[6월 항쟁 20돌] 끝나지 않은 6월
1부-1987년, 그후 20년 ① 다시 만난 6월의 사람들

미국으로 이민 간 ‘짱돌’의 주인공 윤은영씨
“힘들었지만 축복의 시간…서로서로 의지하고 행동했어요”

“어머, 정말이에요? 제가 돌을 던지고 있는 20년 전 사진이 있다구요?”

태평양 너머에서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목소리지만 떨림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1987년 6월 항쟁의 불꽃이 타오르기 직전인 5월26일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이화여대 정문 앞에서 찍힌 한 장의 사진. 4명의 어린 여학생이 ‘짱돌’을 던지고 있는 그 사진 속 주인공 가운데 한 사람인 윤은영(40)씨는 갑작스런 기자의 연락을 받고는 당황해 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86년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그 땐 전경들이 강의실까지 들어와 선배들을 끌고 가곤 했어요.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죠. 불의에 대해 뭔가 얘기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어요.”

부정한 시대에는 가장 온순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열렬한 투사가 나온다고 했던가. 1학년 때 가입한 기독학생회에 더 자주 들르게 됐고, 머지않아 그의 손에는 ‘짱돌’이 들려 있었다.

운동권에 투신한 윤씨는 88년 8월에는 전대협의 판문점 남북학생회담 추진 사업을 하다 붙들려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사흘 동안 구류를 살기도 했다. 대학을 마친 뒤 청년단체에서 일하다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92년 3월 시댁이 있는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민을 갔다. 20년 전 풋풋하던 젊음은 무상한 세월 앞에서 다시 찾아보기 어렵지만, 그 사이 보배 같은 아이 셋을 얻었다.

남편의 가게 일을 뒷바라지 하며 전업주부로 지내는 그는, 늘 6월 항쟁에 대한 자부심을 품고 산다고 했다. “힘들었지만 학생운동을 하던 때가 축복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는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행동하는 것을 올바른 것으로 봤고, 서로 서로 의지하고 부추겨 움직이게 했어요. 아이들한테도 엄마가 살았던 시대를 자주 얘기해 줍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도움이 돼야 한다는 얘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엄마가 하는 얘기는 뻔하다’고 하지만.”

사진을 이메일로 받아 보고 본인임을 확인한 윤씨는 “전화를 받고 그 때 기억들로 행복했다”며 감사의 뜻을 전하는 답신을 보내왔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6월항쟁 당시 서울 종로5가에서 시위를 벌였던 최훈(오른쪽)씨가 뉴질랜드로 출국하기 1달 앞선 지난 1월5일 오랜만에 동기생들을 만나 자세를 잡았다. 5면 위에서 세번쩨 사진에서 실선으로 표시된 이가 최훈씨다. (왼쪽) 최훈씨 제공 / 1987년 6월18일 고려대생들이 서울 종로5가에서 단체로 드러누워 시위를 벌이고 있다. 최훈씨가 드러누운 학생들 쪽으로 걸어들어오고 있다. 고대신문사 제공

뉴질랜드 거주 최훈씨
“민중의 삶은 여전히 각박한데…영광의 포즈는 내키질 않는다”

사진을 먼저 보내고 전화는 나중에 걸었다. 그는 처음에 “쑥스럽네요”라고 말했다. “이러저러한 감정과 기억들이 한꺼번에 덮쳐 오는 통에, 그 사진을 앞에 두고 한동안 감회에 젖어 있었다”고 했다.

뉴질랜드 웰링턴에 살고 있는 최훈(42)씨의 목소리는 그다지 반가운 기색이 아니었다. 1987년 6월18일 서울 종로5가에서 단체로 누워 시위를 벌이고 있는 고려대생 사진에서 맨 오른쪽, 사진 속으로 걸어들어오고 있는 이가 바로 최씨다. 당시 안암동 네거리에서 종로5가까지 도로를 따라 행진한 수천명이 전투경찰의 저지선 앞에 앉거나 누워 구호를 외칠 즈음, 이 사진이 찍힌 직후 최루탄이 발사되었던 것으로 그는 기억한다.

당시 부총학생회장이던 최씨는 졸업 뒤인 89년 전교조 선배와 함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을 살았다. 90년부터 학원강사 일을 시작한 그는 이듬해 경찰의 강경대씨 치사 사건이 터지고 학생들이 다시 거리로 나섰을 때 ‘넥타이 부대’의 일원으로 그 대열에 참여한 기억을 갖고 있다. 그 사이 최씨는 ‘딸딸이 아빠’가 됐다. 지금은 일 때문에 바다 건너간 부인과 아이들을 따라가 “집사람 뒷바라지하고, 애들한테 잔소리 해가며, ‘주부’로 살고” 있다. 딸아이는 20년 전 사진 속 아빠를 보며 “아빠, 그땐 머리 숱이 많았네?”라고 한마디 했단다.

최씨는 ‘시대에 대한 부채 의식’을 얘기하면서 말을 아꼈다. 인터뷰가 짧아졌다. 그는 말 대신 동기생들이 모이는 인터넷 카페에다 이런 글을 썼다. “국가보안법이 엄존한다는데, 그동안 그 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우리들이 무슨 사냥꾼들처럼 영광의 순간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의기양양한 청춘을 잊지 않기 위해 사진 한 컷을 남기는 것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 그 포획물 앞에 ‘우리만’ 포즈를 취하고 서기엔, 우리 삶이 그리고 우리가 함께하자고 했던 민중의 삶이 여전히 너무 각박하다. … 이런 현실들을 뒤로 하고, 지난 청춘을 박제로 한 조형물 앞에서 ‘우리만’ 포즈를 취하고 선다는 것이 나는 아무래도 내키질 않는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87년 6월’사진 속 주인공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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