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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6.07 08:16 수정 : 2007.06.16 20:13

[6월 항쟁 20돌] 끝나지 않은 6월
1부-1987년, 그후 20년 ① 다시 만난 6월의 사람들

‘사진속 신애엄마’ 안은정씨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2가 1번지 야트막한 언덕에 장중한 고딕식 건물 하나가 우뚝 솟아 있다. 명동성당이다. 한국 가톨릭을 대표하는 이 성소는 지어진 지 79년째 되던 1977년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 제258호로 지정됐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87년 6월, 명동성당은 민주화를 향한 진통의 한복판에 있었다.

‘신애 엄마’ 안은정(54)씨도 그때 그곳에 있었다. “4월14일로 기억합니다. 새벽에 천막집들을 전부 철거당하면서 아무 것도 없이 몸만 (성당으로) 들어갔어요.” 이주대책을 요구하며 ‘상계동 173번지’에서 농성하던 세입자들은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잃었다. 2년 남짓 철거반에 얻어맞고 차여가며 지켰던 천막과 세간은 포클레인 삽날에 남김없이 짓뭉개졌다. 안씨와 남편(강태희씨·당시 38살) 큰딸(14살) 둘째딸(10살) 막내 신애(7살), 이렇게 다섯 식구가 머문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며칠 지내면 떠날 수 있으려니 생각했어요. 눌러 살려고 들어온 게 아니었으니까요.” 현실은 기대대로 풀려가지 않았다. 성당을 찾았던 78가구는 정문 옆 사도회관 공터(지금 별관 자리)에 커다란 천막집 두 동을 짓고 남·여로 나뉘어 함께 살았다. 안씨 부부는 아이 둘을 상계동에 있는 학교까지 통학시키면서 막내 신애를 데리고 데모가 벌어지는 곳이라면 어디든 다 쫓아다녔다. 자신들의 암담한 처지와 주장을 알리기 위해서.

철거민 뭉개진 삶…군사독재의 현실…광주의 진실
“‘호헌철폐·독재타도’ 한동안은 잠결에도 들립디다”


천막살이가 두 달 가까이 되어가던 6월10일 저녁, 서울역 등에서 시위를 하던 대학생 200~300명이 경찰에 쫓겨 성당 안마당으로 들어왔다. 6월 항쟁의 ‘허리’를 이어간 명동성당 농성의 시작이었다.

“그날 한밤중에 큰 솥단지를 걸고 라면을 삶아서 학생들에게 먹이는데, 다 불어터진 라면을 어찌나 맛있게 먹던지 ….” 지난 1일 남편의 손을 잡고 명동성당을 찾은 안씨는 그때 기억을 어제 일처럼 떠올렸다. 성당을 오르는 계단은 꼭 20년 만에 다시 밟아본다고 했다. “그때 학생들이나 우리나 다 같이 외친 구호가 ‘호헌철폐, 독재타도’였는데, 얼마나 많이 듣고 따라했던지 한동안은 잠결에도 들립디다.”

‘신애 엄마’ 안은정(54)씨가 6일 오후 경기도 시흥시 장현동 비닐하우스 안에서 방금 수확해온 미나리를 지하수 물로 씻어내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명동성당에서 이들은 차츰 저절로 투사가 되어갔다. 대책 없는 철거가 마음을 움직였고, 광주항쟁 비디오가 행동하게 만들었다. “광주항쟁 때 화면을 성당에서 처음 봤는데,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저럴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다들 분노했어요. 학생들의 주장이 다 이해가 됐지요.”(남편 강씨) “민주화가 안 되면 이주대책 마련이라는 우리 목적도 달성할 수 없겠구나, 민주화가 돼야만 우리같이 가난한 사람도 인간대접을 받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겠구나 생각하게 됐어요.”(안씨) 이들이 기억하는 6월에 시민과 학생의 구분은 의미가 없었다.

“그 사진은 이한열 학생 빨리 깨어나라고 묵념하고 있었어요”
“어린 것이 자고 일어나면 눈물 콧물 뒤범벅”

막내딸 신애와 안씨가 사진에 찍힌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 때 사진을 보니까 …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기도 하고, 뿌듯하고 그러네요.” 6월18일 성당 앞마당에서 열린 ‘최루탄 추방 결의대회’ 때 신애는 태극기를 들고 묵념하는 엄마 앞에 앉아 어딘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최루탄에 맞아 의식을 잃은 연세대 이한열 학생이 빨리 깨어나라고 묵념을 하고 있었어요.”

신애는 형제 중 유일하게 상계동에서 태어났다. 학생이던 두 언니가 상계동에서 쫓겨나서도 그곳으로 통학을 할 때 신애는 늘 시위 현장에서 엄마 곁을 지켰다. 철거와 철거반대 싸움이 시작된 다섯 살 무렵부터 엄마가 경찰에 연행되면 경찰서 보호실에서 함께했고, 바깥과 연락이 필요할 때는 쪽지를 전해주는 전령 노릇을 했다. 하루종일 최루탄 연기를 쏘이는 날이 늘어나면서 “어린 것이 자고 나면 눈물 콧물 범벅이 돼 있어” 부모를 안쓰럽게 만든 적도 많았다.

87년이 폭풍처럼 지나간 이듬해 1월, 성당을 찾았던 78가구 중 35가구가 부천 고강동으로 옮겨갔다. 애옥살이에 힘겹게 모은 돈으로 땅 820평을 사들여 오붓한 공동체를 꿈꾸며 동네이름도 ‘보람마을’이라고 지었다. 하지만 그곳은 보금자리가 되지 못했다. 애초 임시건물 건축을 허용하기로 약속했던 중구청은 마을 옆으로 지나갈 88올림픽 횃불 봉송로의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건물을 모두 밀어냈다. 이번에는 천막이 아니라 땅굴을 파고 원시인들처럼 1년 가까이 살았다.

신애는 부천에서 맞은 성장기를 무척 힘들게 보냈다. “걔가 크면서 우울증 비슷한 증상을 겪고 나서는 쾌활하던 성격이 내성적인 쪽으로 완전히 바뀌었어요. 지금도 사진 찍히기를 꺼릴 정도예요.” 개발바람을 타고 부천 땅값이 오르면서 보람마을도 해체 운명을 피해가지 못했다. 자기 몫의 땅 지분을 팔고 떠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안씨네는 96년 식당과 건축 일로 조금씩 저축한 종자돈에 은행빚을 얹어 경기도 시흥에서 미나리 농장을 시작했다. “생판 모르던 미나리 농사를 짓자니 힘들 수밖에요. 우리 애들 생각하면서 정말 죽을 뚱 살 뚱 모르고 열심히 일했어요.”

부천 고강동서 공동체 ‘보람마을’ 꾸렸지만 그마저…
지금은 17가구와 함께 미나리영농조합 이끌어

안은정씨가 지난 2일 남편 강태희씨와 함께 서울 명동성당을 다시 찾아 1987년 6월 항쟁 당시를 회상하며 걷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처음 3천평이던 농장은 이제 2만평으로 늘었다. 베트남인 산업연수생 일곱을 포함해 직원 11명이 하루 미나리 500~600상자(4㎏ 들이)를 베어 서울 가락동시장에 내다 판다. 남편 강씨는 17가구가 참여한 참채미나리 영농조합의 ‘사장님’이 됐고, 안씨는 ‘사모님’으로 불린다. 올해 스물일곱이 된 막내 신애씨는 11월에 결혼 날짜를 잡았다. 20년 전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변화다. 그러나 안씨 내외는 지금도 농장 옆 하우스를 개조한 거처에 산다.

“그때 철거반대 싸움하고, 6월에 명동성당에서 겪은 일들은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어요.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내 작은 욕심을 버리고 남들과 같이 살아가는 게 소중하다는 걸 배웠어요. 나눔이란 것도 그때 처음 알았고요. 철거로 힘들고 아픈 기억이 많이 있지만 잃은 것보다 얻은 게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철거반대 싸움을 하면서 가장 크고 많은 가르침을 준 사람으로 고 제정구 의원을 떠올리는 안씨네는, 제 의원의 유지를 이어가는 ‘복음자리’ 재단에 ‘얼마 안 되는 후원금’을 내고 있다고 했다.

지난 1일, 20년 전 일곱살 신애가 뛰어놀던 성당 안 성모동산에서는 그 또래의 신랑신부와 손님들이 기념사진을 찍느라 분주했다. “참 보기 좋네요. 87년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다들 살기는 좋아진 것 같은데 …. 어린 나이에 희생된 학생들을 생각하면 고맙지만 가슴이 아프죠. 정치 하는 분들이 똑바른 길을 가지 않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걸 보면 ‘학생들과 우리가 싸운 목적은 이게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

87년 6월 명동성당 앞을 막아섰던 전투경찰은 이제 그곳에 없다. 그러나 성당 앞 시위대열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안씨 내외가 옛 천막집 자리(지금의 별관)에서 20년 전 자취를 찾고 있을 때 성당 진입로 층계 아래서는 “정부 당국은 각성하라!”는 시위대의 구호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강희철 기자 hckang@hani.co.kr

특별취재반 = 이창곤 강희철 김규원 권혁철 전종휘 박주희 기자
사진 = 강창광 기자
동영상 = 박종찬 기자 이규호 PD


사진속 사람들 사진 밖으로
20년 전 꿈 떠올리며 오늘을 말하다

[6월 항쟁 20돌] 끝나지 않은 6월
1부-1987년, 그후 20년
① 다시 만난 6월의 사람들

② 20년이 남긴 것
③ 다큐 6월

“군부독재를 물리치고 민주정부를 수립합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기본 권리인 신체의 자유,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누리고 … 생존권이 보장된 사회를 만듭시다. … 함께 누릴 빛나는 새 세상이 목전에 임박했습니다.”(1987년 6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성명서에서)

1987년 그해 유월은 고통 속에서도 빛났다. 꿈과 열망이 있었다. 거리에선 누구나 손을 맞잡았고, 어깨를 내주었다. 아름다운 ‘인간 띠’의 함성은 마침내 최루탄과 무력을 굴복시켰다. 군부독재는 스스로 백기를 들었고, 그 자리엔 민주주의가 새롭게 싹을 틔웠고, 자랐다.

그 뒤 스무 해의 세월이 흘렀다. 눈부셨던 광장엔, 더는 돌멩이도, 최루탄도 없다. 숨막힐 듯한 팽팽함이 가득했던 거리와 골목엔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헐떡임도 찾아보기 힘들다. 평온한 일상의 연속이다. 유월은 이제 ‘추억’이 됐고, 어느새 기념식으로 넘어가는 ‘역사’가 됐다. 정치적 자유와 언론의 자유도 만개했다. 당시 아스팔트 위의 민주인사들은 대통령이 되고, 국회의장도, 총리도, 국회의원도 됐다.

하지만 2007년 6월 지금, 그해 유월이 꿈꾸었던 ‘빛나는 새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 경제는 엄청나게 성장했지만 ‘함께 누리는 사회’의 꿈에서는 점점 멀어져만 가고 있다. 오히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점점 더 양극단으로 몰리는 사이, 이제 중년을 넘긴 당시의 넥타이 부대는 고단한 삶 속에 허덕이고 있다.

‘민주화의 훈장’은 빛이 바랬고, ‘민주 진보 개혁’이란 이름은 국민들의 망각 속에 ‘수구보수’의 비아냥 대상으로 전락했다. 6월이 이룩한 성과만큼이나 한계 역시 분명해졌다.

6월 항쟁으로 태어난 <한겨레>는 20년 전을 되짚으며 다시 새로운 길 찾기에 나섰다. 앨범 속에 묻혀 있던 사진을 꺼내 그 얼굴들을 찾는 일부터 시작한다. 거리에 섰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우리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함께 생각해 보려 한다.

▶ “어머 정말이요? 제가 돌 던지는 20년전 사진이 있다구요?”
▶ ‘6월 항쟁 사진속 주인공 찾기’ 13일간 제보 잇따라
▶ ‘철거 날벼락‘ 상계동, 20년전과 지금
▶ 민주화 숨은 주인공 ‘87년 6월의 얼굴’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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