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항쟁 20돌] 끝나지 않은 6월
1부-1987년, 그후 20년 ① 다시 만난 6월의 사람들
‘사진속 신애엄마’ 안은정씨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2가 1번지 야트막한 언덕에 장중한 고딕식 건물 하나가 우뚝 솟아 있다. 명동성당이다. 한국 가톨릭을 대표하는 이 성소는 지어진 지 79년째 되던 1977년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 제258호로 지정됐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87년 6월, 명동성당은 민주화를 향한 진통의 한복판에 있었다.
‘신애 엄마’ 안은정(54)씨도 그때 그곳에 있었다. “4월14일로 기억합니다. 새벽에 천막집들을 전부 철거당하면서 아무 것도 없이 몸만 (성당으로) 들어갔어요.” 이주대책을 요구하며 ‘상계동 173번지’에서 농성하던 세입자들은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잃었다. 2년 남짓 철거반에 얻어맞고 차여가며 지켰던 천막과 세간은 포클레인 삽날에 남김없이 짓뭉개졌다. 안씨와 남편(강태희씨·당시 38살) 큰딸(14살) 둘째딸(10살) 막내 신애(7살), 이렇게 다섯 식구가 머문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며칠 지내면 떠날 수 있으려니 생각했어요. 눌러 살려고 들어온 게 아니었으니까요.” 현실은 기대대로 풀려가지 않았다. 성당을 찾았던 78가구는 정문 옆 사도회관 공터(지금 별관 자리)에 커다란 천막집 두 동을 짓고 남·여로 나뉘어 함께 살았다. 안씨 부부는 아이 둘을 상계동에 있는 학교까지 통학시키면서 막내 신애를 데리고 데모가 벌어지는 곳이라면 어디든 다 쫓아다녔다. 자신들의 암담한 처지와 주장을 알리기 위해서.
철거민 뭉개진 삶…군사독재의 현실…광주의 진실“‘호헌철폐·독재타도’ 한동안은 잠결에도 들립디다”
천막살이가 두 달 가까이 되어가던 6월10일 저녁, 서울역 등에서 시위를 하던 대학생 200~300명이 경찰에 쫓겨 성당 안마당으로 들어왔다. 6월 항쟁의 ‘허리’를 이어간 명동성당 농성의 시작이었다. “그날 한밤중에 큰 솥단지를 걸고 라면을 삶아서 학생들에게 먹이는데, 다 불어터진 라면을 어찌나 맛있게 먹던지 ….” 지난 1일 남편의 손을 잡고 명동성당을 찾은 안씨는 그때 기억을 어제 일처럼 떠올렸다. 성당을 오르는 계단은 꼭 20년 만에 다시 밟아본다고 했다. “그때 학생들이나 우리나 다 같이 외친 구호가 ‘호헌철폐, 독재타도’였는데, 얼마나 많이 듣고 따라했던지 한동안은 잠결에도 들립디다.”
‘신애 엄마’ 안은정(54)씨가 6일 오후 경기도 시흥시 장현동 비닐하우스 안에서 방금 수확해온 미나리를 지하수 물로 씻어내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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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것이 자고 일어나면 눈물 콧물 뒤범벅” 막내딸 신애와 안씨가 사진에 찍힌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 때 사진을 보니까 …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기도 하고, 뿌듯하고 그러네요.” 6월18일 성당 앞마당에서 열린 ‘최루탄 추방 결의대회’ 때 신애는 태극기를 들고 묵념하는 엄마 앞에 앉아 어딘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최루탄에 맞아 의식을 잃은 연세대 이한열 학생이 빨리 깨어나라고 묵념을 하고 있었어요.” 신애는 형제 중 유일하게 상계동에서 태어났다. 학생이던 두 언니가 상계동에서 쫓겨나서도 그곳으로 통학을 할 때 신애는 늘 시위 현장에서 엄마 곁을 지켰다. 철거와 철거반대 싸움이 시작된 다섯 살 무렵부터 엄마가 경찰에 연행되면 경찰서 보호실에서 함께했고, 바깥과 연락이 필요할 때는 쪽지를 전해주는 전령 노릇을 했다. 하루종일 최루탄 연기를 쏘이는 날이 늘어나면서 “어린 것이 자고 나면 눈물 콧물 범벅이 돼 있어” 부모를 안쓰럽게 만든 적도 많았다. 87년이 폭풍처럼 지나간 이듬해 1월, 성당을 찾았던 78가구 중 35가구가 부천 고강동으로 옮겨갔다. 애옥살이에 힘겹게 모은 돈으로 땅 820평을 사들여 오붓한 공동체를 꿈꾸며 동네이름도 ‘보람마을’이라고 지었다. 하지만 그곳은 보금자리가 되지 못했다. 애초 임시건물 건축을 허용하기로 약속했던 중구청은 마을 옆으로 지나갈 88올림픽 횃불 봉송로의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건물을 모두 밀어냈다. 이번에는 천막이 아니라 땅굴을 파고 원시인들처럼 1년 가까이 살았다. 신애는 부천에서 맞은 성장기를 무척 힘들게 보냈다. “걔가 크면서 우울증 비슷한 증상을 겪고 나서는 쾌활하던 성격이 내성적인 쪽으로 완전히 바뀌었어요. 지금도 사진 찍히기를 꺼릴 정도예요.” 개발바람을 타고 부천 땅값이 오르면서 보람마을도 해체 운명을 피해가지 못했다. 자기 몫의 땅 지분을 팔고 떠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안씨네는 96년 식당과 건축 일로 조금씩 저축한 종자돈에 은행빚을 얹어 경기도 시흥에서 미나리 농장을 시작했다. “생판 모르던 미나리 농사를 짓자니 힘들 수밖에요. 우리 애들 생각하면서 정말 죽을 뚱 살 뚱 모르고 열심히 일했어요.” 부천 고강동서 공동체 ‘보람마을’ 꾸렸지만 그마저…
지금은 17가구와 함께 미나리영농조합 이끌어
안은정씨가 지난 2일 남편 강태희씨와 함께 서울 명동성당을 다시 찾아 1987년 6월 항쟁 당시를 회상하며 걷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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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강창광 기자
동영상 = 박종찬 기자 이규호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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