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 1987년 6월10일 서울 명동 입구에서 시위에 나선 권영태(점선 안)씨가 경찰이 최루탄을 터뜨리자 황급히 피하고 있다. 고대신문사 제공 / (가운데) 전국이 시위로 들끓던 87년 6월8일께 전경부대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이병무(가운데)씨가 경기 수원의 한 고등학교 앞에서 잠시 시간을 내 소대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씨는 이틀 뒤 명동성당 농성장에 투입된 뒤 15일 저녁에는 다시 부산으로 출동했다. 이병무씨 제공 / (맨 아래) 당시 고려대 3학년이던 조동기(점선 안)씨가 1987년 6월18일 서울 종로5가에서 찻길에 드러누워 시위를 벌이고 있다. 고대신문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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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 20돌] 끝나지 않은 6월
1부-1987년, 그후 20년 ① 다시 만난 6월의 사람들
함께 광장에 선 세사람 은퇴한 70대 권영태씨
경찰청 팀장 이병무씨
논술학원 운영 조동기씨 사진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① 1987년 6월10일 서울 명동 입구에서 시위에 나선 권영태(점선 안)씨가 경찰이 최루탄을 터뜨리자 황급히 피하고 있다. 고대신문사 제공
② 전국이 시위로 들끓던 87년 6월8일께 전경부대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이병무(가운데)씨가 경기 수원의 한 고등학교 앞에서 잠시 시간을 내 소대원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이씨는 이틀 뒤 명동성당 농성장에 투입된 뒤 15일 저녁에는 다시 부산으로 출동했다. 이병무씨 제공
③ 당시 고려대 3학년이던 조동기(점선 안)씨가 1987년 6월18일 서울 종로5가에서 찻길에 드러누워 시위를 벌이고 있다. 고대신문사 제공 한낮을 달군 이른 더위가 잠시 수그러든 지난 3일 해거름 명동성당 앞, 나이도 차림새도 제각각인 세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고 있다. 행인들이 힐끔힐끔 눈길을 던진다. 세 사람은 1시간 전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난생처음 만나 을지로를 걸어 이곳 명동성당에 막 도착했다. 20년 전 따로 또 같이 경험했던 6월의 그 공간을 다시 돌아보는 발걸음이다. “6월 항쟁 당시 성당 안에서는 수녀님과 신부님들도 앞에 나와 시위하고 저 옆에서는 전경들에게 꽃을 꽂아주는 분들이 있었죠. 제발 최루탄 그만 쏘라고. 당시 시위대가 외친 구호 가운데 이건 아직도 귓전을 맴도네요.” 현직 경찰인 이병무(45)씨의 웃음 띤 입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민주경찰 동참하라, 훌라훌라♬” 올해 우리 나이로 일흔 줄에 접어든 권영태씨도, 그 아들뻘 되는 조동기(42)씨도 고개를 끄덕인다. 가락이 귀에 익다.
‘민주경찰 동참하라 훌라훌라’ 귓전 생생 조씨가 “당시 명동성당은 해방구였어요. 아름다운 모습들이었죠”라며 운을 띄웠다. 그러자 이씨는 한술 더 뜬다. “전국이 해방구였죠. 예전엔 시위는 소수가 하고, 다수는 말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때만큼은 다수가 행동했기 때문에 항쟁이라는 말로 정당성을 획득한 것 아닐까요?” “그런데 조 선생은 그때 명동성당 쪽은 안 들어왔나요?” 이씨가 물었다. 대답을 하기 위해선 기억을 더듬어야 한다. ■ 1987년 6월10일, 타는 목마름으로 = 대통령을 체육관 선거로 계속 뽑겠다는 정권의 발표에 성난 민심은 전날 연세대생 이한열의 최루탄 피격 소식에 군불 땐 팥죽처럼 들끓었다. 이날 국민대회에 참가한 고려대 국어교육학과 3학년 조동기 학생도 다른 시위대와 함께 명동성당에 들어왔다. 총학생회 문화부원이기도 한 조씨는 “성당을 중심으로 외곽에서 계속 (경찰과) 싸웠다”고 회상한다. 다시 만난 6월의 사람들 ①시청·명동성당 ‘항쟁의 추억’ 성당 앞에선 전경부대 소대장 이병무 경위가 시위대에 맞서고 있었다. 시위가 시위대의 몫이라면 경비는 경찰의 임무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경찰이 시위대에 밀리면 자칫 군대가 투입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최악의 상황만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지탱하는 힘이 됐다. 그날 밤 ‘땡전뉴스’(9시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대통령은 “좌경용공 세력이 명동성당을 점거하고 있다”고까지 말한 터였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보름간 ‘출근투쟁’ 비슷한 시각 성당 근처에선 넥타이를 맨 권영태씨가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고 있었다. 서울, 인천 등지에서 세무 공무원을 하다 그만두고 집에서 잠시 쉬고 있던 그는 6월10일부터 꼬박 보름 동안 관악구 봉천동 집에서 을지로까지 지하철을 타고 ‘출근 투쟁’을 벌였다. 누가 권씨에게 그러라고 시키지도 않았다. 하지만 정의롭지 못한 권력은 “근본이 야당 체질”인 그를 가만히 집안에 있게 하지 않았다. 학생으로, 경찰로, 시민으로 서로 다른 위치에 있던 이들 세 사람은 당시 ‘현장’에서 한 번쯤 스치고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억에는 없다. 그래도 무슨 상관이랴. 역사가 토해낸 용암 줄기에 모두 뜨겁게 녹아 있었던 걸. ■ 항쟁 그 이후, 살다 보면 = 조동기 학생은 89년 가을 9학기 만에 졸업장을 받았다. 대학에선 극회 활동을 하며 연기자의 꿈을 키웠으나 현실은 고단했다. 서울영상제작단에 들어가 영화판에 다시 한번 도전장을 내밀었다. 하지만 늘 배가 고팠다. 92년 논술학원 강사로 변신한 까닭은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서”였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던가. 2년 남짓 지나면서 그는 ‘잘나가는’ 논술 강사로 이름이 알려졌다. 학생운동 시절에 익힌 사회과학 지식과 토론의 기술이 논술 강의의 ‘고품질 비료’가 됐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98년, 아예 자신의 이름을 내건 학원을 차렸다. 조씨는 이제 중국 지사 두 군데를 포함해 논술학원 30곳을 운영하는 대표이사가 됐다. 그는 “아이들에게 명예와 돈을 추구하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도 함께 고민하라고 가르친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스팔트 위에 드러누운 사진 속 혈기방장한 청년 스스로도 사교육 시장의 대형 논술학원 사장님이 될 줄 생각이나 했을까.
1987년 당시 대학생이었던 조동기(왼쪽부터)씨, 평범한 시민으로 6월 항쟁에 적극 참여했던 권영태씨, 전투경찰 소대장으로 명동성당 앞을 지켰던 이병무씨가 지난 3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당시 겪었던 상황을 얘기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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