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항쟁 20돌 끝나지 않은 6월
1부- 1987, 그후 20년 ③ 다큐6월
박종철 고문치사에서 6월항쟁까지
전두환 군사독재의 압제와 비민주적 통치에 대한 민중들의 염증이 날로 깊어가던 1987년 1월15일치 <중앙일보>는 경찰 조사를 받던 한 대학생이 숨졌다는 짤막한 기사를 보도했다.
다음날 경찰총수인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기자회견장에서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경찰 조사를 받던 중 “책상을 ‘탁’ 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내놓았다. 경찰은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사건 주요 수배자인 박종운의 행방을 캐기 위해 14일 아침 학교 후배 박종철을 서울 신림동 자취방에서 강제 연행한 뒤 구타와 물고문 끝에 숨지게 하고도 이를 은폐하려 했다.
그러나 공권력에 의한 타살임을 알리는 언론 보도 등으로 여론이 등을 돌리자 경찰은 자체 조사를 거쳐 같은 달 19일 경위 조한경과 경사 강진규 등 2명의 범행이라고 발표했다.
곧바로 각계대표 9782명이 참여한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가 결성됐다. 2월7일 추도회와 3월3일 49재를 겸한 고문추방 민주화 대행진에 이르기까지 교수 및 종교인들의 비판 성명이 잇따랐다.
‘체육관 선거’를 거부하고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는 ‘직선제 개헌’에 대한 국민적 요구도 커져갔다. 하지만 대통령 전두환은 4월13일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도록 한 5공 헌법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내용의 ‘호헌’ 담화를 내놓았다. 재야단체들과 각 대학 교수 등의 비판 성명이 잇따랐고,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소속 신부들은 단식기도로 정권의 폭거에 맞섰다.
마침내 5월18일 사제단 대표인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정권에 의해 축소·조작·은폐됐음을 폭로하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검찰은 사흘 뒤 고문치사의 진짜 범인은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의 황정웅 경위, 반금곤 경사, 이정호 경장임을 확인하면서 넉달 전 경찰의 발표가 거짓임을 확인했다. 성난 민심은 27일 전 재야가 한데 모인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6월10일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를 하루 앞둔 연세대 앞 시위에서 이 학교 학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직격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이 소식은 분노한 양심들을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만들었다.
박종철의 의로운 죽음은 어두운 시대에 정의와 양심이 길을 잃지 않고 최루탄의 포화 속을 헤쳐나가게 해준 등불이었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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