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년 2월 출소한 고진화 의원이 동료들 석방을 요구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전두환 정권의 퇴진과 함께 은둔생활에서 벗어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1989년 열린 박정희 추도식에 참석하러 걸어가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에서 정책실 차장으로 활동하던 이해찬 전 총리가 문익환 목사와 이야기하고 있다.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부인 인재근씨(가운데)가 87년 5월4일 남편 대신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받고 명동성당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당시 김 전 의장은 경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이어서 사진이 없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정주영 전 명예회장과 함께 중동의 공사현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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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20돌 끝나지 않은 6월
1부- 1987, 그후 20년 ③ 다큐6월
이명박 중동 사막에서 박근혜 자택서 은둔생활이해찬 시위 기획 맡아 한명숙 최루탄 추방 함성
천정배·원희룡·노회찬 거리에서 “독재타도”…김근태·고진화는 ‘옥중투쟁’ 텔레비전 속에서 군중은 파도처럼 물결치고 있었다. 가슴이 뻐근했다. 6월민주항쟁 당시 <서울신문> 파리특파원이었던 권영길에게 화면 속 풍경은 “어두운 방안에 스며든 한줄기 빛”과도 같았다. 같은 시각, 영국에서 연수 중이던 정동영은 <비비시> 뉴스를 보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서울에 있었다면 현장에 있을텐데, 아니면 취재기자로 관객 노릇이라도 했을텐데…너무 안타까웠습니다.” 6월항쟁 직전, 박사학위 논문을 마무리짓기 위해 옥스퍼드대학으로 간 손학규는 6월항쟁의 의미를 곱씹고 있었다. 강원도 함백탄광, 구로공단, 청계천 판자촌을 전전하며 투옥과 수배를 반복했던 그는 6월항쟁을 지켜보며 “소수의 운동권이 아니라 국민이 주도할 때 역사가 바뀐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현장’의 군중 속엔 인천의 주물공장에서 일하다 ‘학출(대학생출신)’로 발각돼 도망다니고 있던 원희룡을 비롯해, 조영래 변호사와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던 천정배도 끼어 있었다. 원희룡은 명동성당에서 밤이슬을 맞아가며 농성을 벌였고, 천정배는 동료 변호사들과 함께 ‘넥타이부대’에 참여해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쳤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이하 민통련) 정책실 차장이자,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 정책위원이었던 이해찬은 당시에도 이름난 ‘기획통’으로서 시위 각본을 짰다. 78년부터 최초의 사회과학서적인 신림동의 광장서적을 운영했던 이해찬은 책 운반에 쓰던 기아차 ‘브리샤’를 직접 몰고 다니며 서울 곳곳에서 경찰의 동태를 파악했다.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을 이끌고 있던 5C노회찬은 노동자들과 함께 새벽 2~3시까지 야간시위를 벌였다. “인천엔 조직화된 학생·넥타이부대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시위 참가자 대부분이 노동자들이었고, 이들은 잔업이 끝난 밤 9시께 인천 부평역 앞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구로노동자 동맹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현상금 500만원이 걸린 수배자 신분이었던 ?5C심상정도 매일 거리로 나왔다. 그는 이후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창립일을 하루 앞둔 1990년 1월21일 경찰에 붙잡혀 만삭의 몸으로 재판을 받게 된다. 6월 민주항쟁의 허리쯤에 해당하는 6월18일 ‘최루탄 추방의 날’. 성심여대 여성학 강사였던 한명숙은 종로네거리에서 구속자 어머니들, 동료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삼베수건을 쓰고 시위대 맨앞에 서 있었다. 중무장한 수천명의 전투경찰들이 몰려들자, 한명숙의 외마디 절규 “쏘지마! 쏘지마!”가 점점 수십만 군중의 함성으로 변해갔다. “그때 손에 들고 있던 붉은 카네이션을 전경들의 가슴에 달아줬습니다”. 한명숙은 그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던 전경들은 ‘평화의 향기’에 취한 듯 잠시 최루탄을 쏘지 않았습니다.” 항쟁은 거리에서만 벌어지지 않았다. 85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사건으로 구속돼 모진 고문을 받고 경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김근태와 미문화원 점거 사건을 주도해 공주교도소에서 징역을 살고 있던 고진화는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열린 6월10일 함께 갇혀있던 양심수들과 ‘샤우팅’ 시위를 벌였다. 성명서를 낭독하면 옥중의 동료들은 철창에 얼굴을 내밀고 ‘민주헌법 쟁취’ 구호를 힘차게 외쳤다. 고진화는 “4·13 호헌조치 발표 무렵이었던 87년 봄 ‘옥중투쟁위원회’를 조직해 6월항쟁 기간 동안 단식투쟁을 했다”고 말했다. 온나라가 6월항쟁으로 달아오르고 있을 무렵, 현대건설 사장이었던 이명박은 열사의 사막을 누비고 있었다. “그해 6월 어디에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아요. 아마 이라크에서 공사대금을 받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었을 겁니다.” 뜨겁게 달아오르던 6월항쟁은 7월5일 이한열의 노제를 기점으로 사그러들었지만 이번엔 7~8월 노동자대투쟁이 꼬리를 이었다. 울산지청 검사로 일하던 5C홍준표는 사무실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잡혀온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부위원장인 남아무개씨를 조사하게 된 것이다. 현대중공업 경비원으로 일했던 아버지를 떠올린 홍준표는 우여곡절 끝에 남씨를 석방시킨다. 하지만 그는 “열악한 노동현실에 법률가인 검사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책감에 빠졌다”고 고백한다. 이무렵 삼성동 자택에서 오랫동안 은둔생활을 하고 있던 박근혜의 집에도 모처럼 활기가 돌았다. 전두환이 권좌에서 물러나면서 그도 기지개를 켰다. 같은 해 10월26일, 공개적인 박정희 추도식을 연 박근혜는 그로부터 꼭 10년 뒤 한나라당 부총재로 정계에 화려하게 진출한다. 벅찬 감동을 안겨준 6월항쟁은 희망인 동시에 좌절이었다고 권영길은 말한다. “프랑스 68혁명 때 드골의 승부수가 먹혀들면서 좌파가 힘없이 무너졌듯이, 6월항쟁도 노태우 전 대통령의 6·29선언으로 무력화됐다.” 당시 검사로 일하며 6월항쟁을 ‘보수적으로’ 경험한 홍준표도 “6·29항쟁의 6개 항을 천천히 읽어보면, 우리 사회의 전면적인 민주화를 선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그 내용 중엔 노동계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고 지적한다. 그후 20년. 6월항쟁이란 거대한 모자이크 속에 흩어져 ‘조각’으로 활약했던 14명은 이제 대선 주자로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그동안 한국사회는 더욱 풍요로워졌고, 절차적 민주주의는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분배의 양극화, 노동의 불평등은 더욱 심화됐다.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향한 길은 아직 멀고도 험하다. 그들은 6월항쟁이 완성하지 못한 ‘반쪽의 과제’를 실현해낼 수 있을까.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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