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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6.15 18:56 수정 : 2007.06.15 18:56

6월항쟁 20돌 끝나지 않은 6월
2부 한국사회 어디로? ② 한국사회 미래논쟁 (상)

1987년의 6월민주항쟁은 한마디로 남한사회의 성공한 시민혁명이었다. 물론 그 성과에 한계가 있고 이에 대한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러나 6월항쟁은 4·19에서 비롯하여 부마항쟁, 광주민주항쟁으로 이어진 남한의 독재타도 운동이 드디어 확실한 열매를 맺은 획기적 사건이었다. 전국적 민중참여의 규모에서도 4·19를 능가했으며, 무엇보다도 5·16이나 5·17 같은 군사독재로의 반전이 없는‘민주화 20년’의 새 역사를 출범시켰다.

6월항쟁 또는 그 결과로 성립된 이른바 87년체제의 한계가 무엇이건 이 기본적인 사실에 대한 인식과 자부심 그리고 이에 따르는 사명감을 저버려서는 안된다. 그런데 6월항쟁을 폄하하는 태도는 진보를 자처하는 인사들 사이에 오히려 흔한 것 같다.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를 기계적으로 구분하여 87년 이후 전자가 달성됐을 뿐 후자는 차라리 후퇴했다거나, 6·29선언이라는 기만적 술책 때문에 다 잡은 민중승리를 놓치고 말았다는 식의 주장이 그렇다.

다른 한편 6월항쟁에 좀더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라도 87년체제의 진보성은 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사태로 소진되었으며 지금은 신자유주의에 의한 민중탄압이 주조를 이루는‘97년체제’에 해당한다는 해석도 있다.

이런 주장들이 각기 일면의 진실을 담았을 만큼 87년체제의 한계는 엄연하다. 더구나 이 체제가 20년이 지난 오늘에도 순탄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무언가 또 한번의 돌파를 통해 다음 단계로 도약해야 할 필요성을 많은 사람들이 절실히 느끼고 있는 것이다.

요는 87년체제의 성취와 실패를 좀더 정확하고 종합적으로 파악하는 길을 찾는 일이다. 첫머리에 나는 6월항쟁을 남한사회의 성공적인 시민혁명으로 규정했는데, 이때 ‘남한사회’가 분단국가임으로 해서 갖는 특성과 한계에 대한 인식이 따라야 한다고 본다. 이 점은 문자 그대로 전국적인 항쟁이었던 3·1운동과 비교하면 금세 실감할 수 있다.

따라서 6월항쟁이 1953년 휴전협정 이후 본격화된 한반도 분단체제를 흔들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나, 87년체제는 53년체제를 대체했다기보다 그 큰 테두리 안에서의 새 단계를 열었을 따름이라는 한계를 직시해야 한다. 이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매사를 분단 탓으로 돌리는 ‘분단환원론’도 아니고 통일만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통일지상주의’도 아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신자유주의적 국면이라는 전지구적 차원의 현실을 감안함은 물론, 통일이라는 한반도적 과제도 남녘에서 6월항쟁과 87년체제가 이룩한 성취를 굳건히 딛고 그 문제점들은 문제점대로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과정과 결합됨으로써만 가능해지고 분단‘체제’의 극복이라는 내용을 갖출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일 따름이다.

이런 의미의 한반도적 시각은 한국사회 분석에서 필수적인 조건일 텐데도 우리 학계의 논의에서는 의외로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다보니 ‘선진화’를 강조하는 쪽에서는 남북대결이 지속되는 상황에서도 남한만의 선진화가 가능하다는 환상에 젖어 남북의 화해 협력을 부질없는 친북행위로 매도하는가 하면, ‘평화’나 ‘평등’을 앞세우는 진보세력 일각에서는 남북의 재통합 과정을 슬기롭게 추진하며 관리하지 않고도 한반도에 평화가 가능하고 양극화 해소가 가능한 듯이 온갖 비현실적인 주장과 단순논리를 쏟아내기 일쑤다. 심지어 마치 분단한국에 정상적인 정당정치가 이미 확립이라도 된 것처럼 여당이 잘못했으니 야당이 집권하는 게 당연하다는 ‘원칙론’이 나오기도 한다.

정작 중요한 것은 선진화, 평화, 민주주의와 평등 같은 하나같이 소중한 가치를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 속에 구현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를 위해서는 남북을 막론하고 이들 목표의 실현에 결정적 제약이 되는 분단체제를 ‘변혁’한다는 목적의식을 갖고, 분단체제의 실상과 동떨어진 단순논리로 인해 분열되어 있는 여러 세력이 새롭게 힘을 합쳐 참된 ‘중도’를 찾을 때이다. 이런 의미의 ‘변혁적 중도주의’가 득표전략에 치중한 정치권의 ‘중도통합’론과 구별됨은 물론이다. 동시에 진보노선으로서도 분단체제의 변혁작업을 건너뛴 채 곧바로 세계체제를 바꾸거나 시장논리를 극복하기를 꿈꾸는 급진노선과 다르고, 남북 각기의 내부적 변화와 개혁을 소홀히한 채 단번에 통일국가를 건설하려는 입장과도 다르다.

그런데 2007년 한국의 정치현실은 급진세력이나 온건개혁세력보다 그동안 53년체제에 안주해왔으면서도 유독 87년체제에 불만을 품고 올해 대선을 통해 ‘선진화’ 체제를 새로 출범시키겠다는 세력이 우세한 실정이다. 나는 이들이 선거에 이기더라도 (일부 강경론자들이 호언하듯이) 지난 10년의 개혁 성과를 완전히 뒤엎거나 6·15공동선언을 폐기할 거라고 걱정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87년체제를 극복하기는커녕 그 남은 목숨을 연장하여 소모적인 남남갈등과 남북대결을 더욱 부추길 위험이 크다고 본다.

진정한 ‘진보논쟁’이라면 마땅히 이런 현실적 위험에서 출발하여 그 원인을 캐고 대응책을 궁리해야 할 터인데, 처음부터 정권의 실패냐 개혁세력의 실패냐를 따지는 식으로 출발하는 것은 누구 좋으라고 하는 논쟁인지 모를 일이다.

끝으로 ‘변혁’과 ‘중도주의’라는 얼핏 상충되는 개념들의 결합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한반도식 통일이라는 특유의 역사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임을 상기하고자 한다. 남북은 6·15공동선언을 통해 기왕의 어떤 분단국가도 못 가본 평화적일뿐더러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통합의 길에 합의해놓은 상태니만큼 이 합의의 실천에 양극단이 배제된 광범위한 세력이 동참할 때 전쟁이나 혁명이 아니면서도 점진적인 개혁의 누적이 참된 변혁으로 이어지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6월항쟁 20주년을 맞은 한국사회가 이러한 개혁과 변혁을 위한 대통합을 이룩할 수 있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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