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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3.07 17:36 수정 : 2019.03.08 13:54

우리는 항일 운동 “전면에 나선” 여성들에게도 빚졌지만 “전면에 나선 것은 아니지만”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여성들에게도 많은 빚을 지며 여기까지 왔다. 그뿐 아니라 “전면에 나선” 것도 아니고 “전면에 나선 것은 아니지만”도 아닌 그 사이의 이름 없는 여성들에게도 빚이 많다.

조은
사회학자, 동국대 명예교수

기미독립선언 100주년을 맞아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새롭게’ 조명받았다. 서훈 기준을 조정해 여성 독립운동가 비율이 전체의 2.3%에 들어섰다. 매체들은 앞다투어 특집을 꾸리면서 ‘전면에 나선’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생각보다 많다거나 “남성들 못지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도 있다는 촌평을 내놓았다. “전면에 나선”과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이라는 수식어 사이를 부유하면서 내 경험 안에 들어온 100년 전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불러와본다.

나는 기미독립운동 참가자들 이야기를 일상적으로 여학교 때 듣고 자랐다. 그 기억을 더듬어 나의 모교의 역사를 담은 <수피아 100년사>를 들춰 보았다. 그 기록에 따르면 전남 광주 민중들이 3·1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가두에 나선 것은 서울보다 열흘 뒤진 1919년 3월10일이었다. 그날 전교생 62명이 시위에 동참했는데 태극기는 고종 장례 때 입은 치마를 뜯어 만들었다.(!) 4개월 이상 구형을 받은 명단에 23명이 올라 있다. 그 명단에는 시위 도중 일본 헌병의 칼에 왼팔이 잘렸는데도 시위를 계속했고 심문 중 나라를 위해 피 흘린 것이 자랑스럽다며 본명 대신 윤혈녀라고 답했던 전설적 선배도 있다. 지난해 4월 구형자 중 몇명이 서훈자인지 찾아보았는데 13명뿐이었다. 다행히 나머지 10명 중 4명이 지난해 광복절에, 그리고 5명이 올해 3·1절에 명단에 들었고 마지막 1명은 오는 광복절 서훈 명단에 들어간 모양이다. 이 과정에서 내 관심을 끈 사진 한장과 마주쳤다. 형을 마치고 나온 여학생들을 양쪽에 거느리고 가운데 꼿꼿이 버티고 앉은 나이 든 여성은 기숙사 사감인가 하고 이름을 들여다보니 ‘식모’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독립운동 전면에 나선 여학생들과 밥해 준 이름 없는 아주머니는 이렇게 묶여 있었다.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독립운동가 이은숙 선생과 정정화 선생의 회고록과 일기를 찾아 읽었다. <서간도 시종기>(西間島 始終記)와 <장강일기>(長江日記)다. 알려져 있듯이 <서간도 시종기>는 한일합방이 되자 독립을 위해 6형제를 모두 이끌고 서간도로 이주한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 선생의 육필 회고록이고 <장강일기>는 대한제국의 대신으로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망명한 동농 김가진의 며느리 정정화 선생의 자서전이다. 현란한 서평도 많지만 식자들의 평가를 덮고 새롭게 읽어본다.

이들 회고록의 맛은 ‘귀가 부인’이라는 프레임을 벗어던진 거침없는 행보와 신분과 계급적 관계를 전복한 일상이다. 이들 일상은 독립운동사의 이면과 공식 역사의 빈칸을 채우는 사료로 박제되기에는 너무 생생한 전복적 독해가 필요한 텍스트다. 이은숙은 서간도 독립운동사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주변을 독촉했지만 여의치 않자 칠순의 나이에 직접 한글 서간체로 기술하기 시작해 7년 만인 1966년 끝을 맺는다. 완성했을 때 손자들은 ‘할머니가 혼자 뭔가 쓴’ 회고록의 가치를 가늠하지 못했고 그 값어치를 알아본 어느 사학자가 움켜쥐고 내놓지 않아 애를 먹다가 9년 뒤인 1975년에야 출간된다. 제목은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다. <서간도 시종기>라는 원제목을 달고 재출간된 것은 2017년이다. <장강일기>는 1987년 <녹두꽃>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출간되었고 ‘여자독립군 정정화의 낮은 목소리’가 부제다. 정정화 선생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조심스러워했고 심지어 가지고 있던 일기를 불태우기도 했는데 주변의 설득으로 여든일곱의 나이에 자서전을 냈다. 첫 출간 때 책을 묶으면서 “못난 줄을 알건만 털어놓고 하는 말”이라는 서문을 남겼다. 11년 뒤 <장강일기>라는 제목으로 다시 나왔다.

이들 기록에는 무용담으로 읽을 수 있는 삽화도 많고 우리 현대사에 굵직한 이름을 남긴 유명인들의 행적도 많지만 소소한 이름들과 그들과 맺은 관계의 일상은 많은 숙제를 던진다. 야전 독립운동의 안살림을 책임진 여성들은 가히 ‘혁명적’ 일상의 해결사다. 한때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친일 앞잡이로 돌아선 김달하가 암살되었을 때 우당이 그 조문을 갔다는 풍문에 시달린 적이 있는데 이때 이은숙 선생이 우당과 한마디 상의 없이 칼을 가슴에 품고 그 풍문을 믿고 절교 서신을 보낸 단재 신채호와 심산 김창숙을 찾아가 당신들이 보았느냐고 따지면서 “정말 바로 말 아니 하면 이 칼로 너희 두 놈을 죽이고 가겠다!”고 해서 사죄를 받아내고는 “나중에 이야기를 전해들은 가군(家君)한테 걱정을 들었지만” 그 뒤 일절 그런 말이 없어졌다는 한마디만 덧붙인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우당 일가가 하루 한 끼니도 먹을 수 없는 곤궁한 처지가 되자 이은숙 선생이 서울에 들어와 돈을 벌기 위해 찾아간 곳은 고무공장이었다. 그러나 세살짜리 아이를 돌보며 일해야 하는 엄마여서 유곽의 여인들 빨래와 옷 짓는 일감을 맡아 돈을 모아 보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그 많던 재산을 독립운동에다 바친 뒤 대가 댁 마님들이 ‘웃음을 파는 여자들’ 옷을 지어주며 생계를 꾸리던 눈물겨운 이야기로 자주 소개된다. 막상 이은숙 선생은 “우당장께서는 무슨 돈인 줄도 모르시면서 받아쓰시니 우리 시누님하고 웃으며…”라고 넘기고 있다. 정정화 선생은 스무살의 나이로 먼저 상해로 떠난 시부와 남편 성암 김의한을 돌보러 갔다가 상해임시정부 안살림까지 떠맡았다. 그 길에 들어설 때 “모진 숙명을 뒤집어쓴 20세기 벽두에 태어나 자라면서 한땀 한땀 바느질을 배우듯이 스러져가는 한 나라의 숨통을 지켜본 소녀가 이젠 여인의 이름으로 그 나라를 떠나가는 길”이라고 기록한다.

임시정부 자금이 고갈되자 밀사 역을 자청하고 자금책으로 여섯번이나 일본 헌병의 감시를 따돌리며 삼엄한 국경을 넘나든다. 첫번째 독립 자금책을 맡아 도강할 때 도움을 준 ‘세창 양복점’이라는 독립운동 점조직을 맡은 낮은 신분의 이세창에 대해 “친오라버니 같은 그분”이라고 묘사하면서 신분이나 성별의 경계를 허물고 신뢰와 연대감을 표한다. 그때부터 50여년이 지난 뒤 쓴 회고록에서 그 뒤의 소식을 알 수 없다는 아쉬움과 그렇게 사라진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민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우리는 항일 운동 “전면에 나선” 여성들에게도 빚졌지만 “전면에 나선 것은 아니지만”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여성들에게도 많은 빚을 지며 여기까지 왔다. 그뿐 아니라 “전면에 나선” 것도 아니고 “전면에 나선 것은 아니지만”도 아닌 그 사이의 이름 없는 여성들에게도 빚이 많다. 나는 가끔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 내리면 역구내 기둥에 감긴 항일 독립운동가들에게 바치는 헌사와 동그라미 네모 세모의 빈칸과 그 사이의 낯선 이름들을 읽어볼 때가 있다. 한 기둥에는 “항일 투쟁에 생애를 바친 숱한 여성들의 잊힌 이름을 되찾기 위하여 빈자리를 남겨놓습니다”라는 글귀가 있다. 강주룡·권애라 등 몇몇 알려진 이름도 있지만 많은 낯선 이름 사이사이에 숱한 네모와 세모와 동그라미가 있다. 그 옆 기둥에는 “기생들이 일어섰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노래와 춤은 만세! 만세! 만세! 행진이다”라는 글귀와 들어본 적 없는 이름 사이사이에 네모와 세모와 동그라미들이 박혀 있다. 이 글을 어떻게 끝맺을까 멈칫대고 있는데 문자 메시지로 두장의 포스터가 떴다.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 포스터다. 한장에는 “3시 스톱(STOP)”이라는 굵은 글씨 아래 “오후 3시 녀성들 파업하고 광화문광장으로”라고 쓰여 있다. 여성 임금이 남성의 65% 수준이니 시간으로 치면 오후 3시에 멈춰도 된다는 뜻인 모양이다. 100년 전 우리들의 ‘센 조선 녀자’ 언니들의 위트와 기지를 물려받은 모양이다. 또 한 포스터에는 “미투 우리가 세상을 바꾼다”라고 쓰여 있다. 여성들의 혁명은 일상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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