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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30 18:29 수정 : 2019.07.01 13:39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며칠 전 설리가 출연한 <악플의 밤>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서 생각이 꼬리를 물다 얼토당토않은 질문이 똬리를 틀었다. 모두가 87을 추억하고 97에 분노하는 사이, 그 어딘가에 있을 1990년대는 어떻게 기억되고 또 어떻게 남는 걸까.

아이유, 수지, 설리 등의 대중문화 콘텐츠를 두고 한때 로리콤(롤리타 콤플렉스)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누가 봐도 여성 아이돌이 성적 대상으로 보이는 구도. 대중문화의 재현 작용이 주는 영향을 고려한다면 카메라의 성적 시선과 대상화는 분명 문제적이긴 했다. 하지만 변태적 감응을 별로 못 느끼겠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이런 논란 자체가 어이없다고 대꾸했다.

그중에서도 나는 (반론까지는 아니어도) 다음과 같은 유보적 논설 또한 있었음을 기억한다. 그들의 드라마, 뮤직비디오, 화보에 재래의 성적인 상징폭력의 구도가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품에서 스스로 표현해내고 활동하는 해당 연예인의 주체성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견해였다. 문화 산업에서 콘텐츠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결코 단일한 의사나 의도의 관철로 보지 말 것. 즉 다양한 힘들이 모순적으로 얽혀서 중층화된 결과로 볼 것. 이것은 문화의 시대라 불렀던 1990년대의 전형적인 문제틀이자 철칙이다.

대개 그렇듯 이때의 대중적 논란 역시 전형적인 찬반 구도로 쓸려 들어갔다. 음란한 것이냐, 아니면 하나도 안 음란한 것이냐. 물론 주지하듯 논쟁의 선분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음란하더라도 표현의 자유로 인정할 것이냐, 아니면 변태적인 것이므로 윤리적으로 규제할 것이냐. 불행히도 여기에는 1990년대가 대한민국 지성사에 기입하고자 했던 일련의 전환적 사고가 들어설 자리는 없어 보였다.

이따금 청중과 만나는 자리에서 1990년대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반성하고 고개를 숙이곤 한다. 뭐랄까, 거기엔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다. 절대적인 미안함, 그리고 일말의 아주 작은 서운함. 우리는 그때 왜 신자유주의의 도래를 직시하고 경계하지 못했던 것일까. 왜 좋은 자유와 나쁜 자유를 구분하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 자유라면 왜 무작정 좋은 것이라고만 생각했을까. 그리하여 어쩌다 현실을 이 꼴로 만드는 데 암묵적으로 공조했던 것일까.

우리의 90년대가 제대로 계승이 되지 못한 게 당연한 수순이라는 생각도 든다. 실제로 뭔가를 계승하려는 모든 노력들은 사실상 실패했다. 그래서일까. 사정을 알아보니 일군의 대중지성 내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비롯한 1990년대식 문화적 전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다는 후문이다. 표현의 자유 논리 등을 포함한 문화적 자유주의가 성적 자유주의와 공모했고 그 결과 성적 억압의 현실을 다층화하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구구절절 옳은 지적이다.

그렇지만 일말의 자존심일까. 그 시기의 문제 설정이 통째로 거부되는 건 어딘지 꺼림칙하다. 실제로 지금 상황은 과거의 논전이 전도된 구도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국가권력이 성적 표현을 통제하려 했고 그에 이반하는 자들은 더 많은 자유를 얻고자 했다.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다. 변화를 바라기는커녕 과거로 돌아가려 하는 이들이 표현의 자유를 운운하고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이들이 성적 표현을 규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단순히 격세지감이라고 퉁치고 넘어가면 될 일일까. 한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우리가 이야기할 것이 영 포티(young forty)니 뭐니 해서 386과 밀레니얼 사이의 ‘낀 세대’ 정서 따위로 호도돼선 절대 안 된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이 필연적인 서운함의 정체는 뭘까. 1990년대는 여전히 해명되지 않은 질문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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