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1.17 18:19
수정 : 2019.11.18 02:36
김성윤 ㅣ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일본 대중문화에 ‘세카이계’라는 용어가 있다. 애니메이션, 게임, 라이트노벨 등에서 중요한 서사적 경향을 이루는 작품 계열이다. (남녀) 주인공 사이의 친교적 관계성이 세계 전체의 위기와 연결되는 이야기 구조라고 보면 되겠다. 기원적으로 보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부터 시작해서 최근에는 <너의 이름은.> 등으로 알려진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 세계가 대표적이다.
한국 대중문화도 이런 계열로부터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아왔다. 특히나 사회적 세계가 붕괴되는 상황에서 세카이계의 설정은 적잖은 참조 사항이 되고 있다. 웹툰 <신의 탑>, 영화 <설국열차>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작가와 독자들은 무너진 가상의 세계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서 붕괴의 비밀을 파헤치고 파국과 파국 이후의 세계를 점친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과 일본의 이야기 구조가 언제나 동일하지만은 않더라는 것이다. 적어도 파국의 양상과 원인을 포착하는 양식에서는 일정한 차이를 드러낸다. 가령 일본 쪽에서는 기능적으로 분화된 세계가 있고 이에 대해 제어 불가능한 신비주의 집단이나 자연재해가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으로 지목되곤 한다. 반면 한국 쪽에서는 ‘탑’이나 ‘열차’가 은유하는 것처럼 계급적으로 분화된 세계가 있고 이러한 굴곡의 원인은 모종의 기득권자 또는 세력으로 묘사된다. 자, 이곳에 포진한 주인공은 이제부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수년 전부터 인구에 오르내리는 ‘기득권’이라는 말을 단순한 우연으로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말은 오늘날 적지 않은 한국인이 공유하는 하나의 세계관을 표상한다. ‘갑질’하는 재벌, 안하무인한 정치인과 관료,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정규직, 고용 및 임금의 차별적 혜택을 누리는 남성, 유·무형의 사회적 자원을 독점한 86세대 등등. 우리는 지금의 곤궁이 기득권 세력 때문이라 지목하곤 한다.
사람들이 불평등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자체는 매우 좋은 현상이다. 더 가진 자에 대한 박탈감 그리고 그들의 불의에 대한 분노가 때때로 우리를 투쟁하게 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관심 자체를 무조건적으로 좋다고만 할 수 없을 때도 있다. 불평등 양상을 ‘1 대 99’ 또는 ‘20 대 80’으로 상상할 때 각각 전혀 다른 효과가 나타날 수 있는 것처럼, 어떤 언어를 채택하느냐에 따라 투쟁의 밀도와 범주는 다르게 도출될 수 있다.
기득권이라는 말을 접할 때 느끼는 감정은 그래서 복잡하다. 이 말은 오늘날의 불평등을 묘사하는 매우 포괄적인 장점을 가지는 동시에, 모든 문제를 권력과 자원의 배분 문제로 연상시키는 일정한 제약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득권을 기득권자나 기득권 세력같이 개인이나 집단으로 바꿔 써도 무방할 때가 종종 있어서, 우리가 표적화하는 것이 권력자 또는 권력집단인지, 권력 자체인지, 아니면 권력을 둘러싼 관계인지 헷갈리는 경우도 많다.
이쯤 되면 기득권에 대한 분노가 사실상 사촌이 땅 사서 배 아픈 국민성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 법하다. 자기 자신이 기득권을 갖게 되면 정작 불평등 구조에는 침묵하게 될 자기기만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해볼 수 있다. 저들과 같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고 나면, 그래서 탑과 열차의 ‘끝판왕’으로부터 “너한테 특별한 혜택을 줄게”라는 제안을 받는다면, 더 이상의 소망을 중지할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득권이라는 언어가 우리가 사는 체계를 흔드는 파급력을 지니고 있음은 자명하다. 하지만 그 흔들림으로 체계가 무너질지 더욱 굳건해질지는 쉽게 상상하기가 힘들다.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인데, 잘 지어진 빌딩일수록 태풍 불 때 흔들려야 무너지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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