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가 음원사이트 멜론, 출판사 태림스코어와 공동기획으로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 선정 작업을 진행했다. 음악평론가, 음악방송 피디, 음악 전문 기자 등 47명이 투표한 결과를 바탕으로 1위부터 100위까지 순위를 매겼다. 한겨레는 8월28일부터 9월28일까지 한 달 동안 순위를 역순으로 공개한다.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정오에 디지털 기사로 열 장의 앨범을 공개하고, 그 가운데 두 장의 앨범을 꼽아 전문가 리뷰를 소개한다. 전체 앨범을 듣거나 전문가 리뷰를 보려면 맨 마지막에 안내한 멜론 특집 페이지로 가면 된다.한국 대중음악 명반 11~20위11위 장필순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5집)>(1997) -음악 장인들과의 만남으로 다다른 최고의 경지
12위 김현철 〈김현철 Vol.1〉(1989) -벼락같은 천재의 벼락같은 데뷔작
13위 이문세 <이문세 4>(1987) -이문세와 이영훈 콤비의 정점
14위 시인과 촌장 <푸른 돛(2집)>(1986) -삶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담은 소박한 혁명가
15위 사랑과 평화 <한동안 뜸 했었지(1집)>(1977) -그루브 넘치는 펑키 사운드의 향연
16위 김현식 〈김현식 III〉(1986) -요절한 가객 김현식의 정점과도 같은 앨범
17위 한영애 <바라본다(2집)>(1988) -한영애의 매력과 개성이 폭발한 작품
18위 델리 스파이스 〈Deli Spice〉(1997) -한국형 모던록의 화두를 제시한 앨범
19위 듀스 〈Force Deux〉(1995) -한국힙합의 정신적 고향과도 같은 듀스의 최고작
20위 어떤날 <어떤날 II>(1989) -조동익, 이병우 듀오가 남긴, 시간을 견디는 고전
12위 김현철 〈김현철 Vol.1〉(1989)전문가 리뷰 | 세상엔 가끔 벼락처럼 천재가 내려온다. 벼락같은 천재는 가끔 벼락같은 데뷔앨범을 낸다. 김현철이 낸 데뷔작은 20세의 천재가 자기 안의 천재성을 총동원해 벽력처럼 쏟아낸 음반이다.
악곡의 섬세하고 세련된 질감 하나만으로도 이 앨범은 당대의 일류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시 멀리 미국의 재즈퓨전, 스무드 재즈를 자양분으로 삼았다는 음악에 실어낸 바로 여기, 한국의 감성이다. 당김음과 긴장음이 지뢰밭처럼 곳곳에 매설돼 출렁이는 차갑고 정교하며 세련된 재즈적 향취. 그 위로 도시나 고향, 또는 그 사이를 잇는 기차 같은 정경이 얹힌다(‘오랜만에’, ‘춘천 가는 기차’, ‘동네’). 덜컹대는 대신 부드럽게 올라탄다. 화성과 악기에 대한 박식을 뽐내 동료들을 때려눕히기보다 김현철은 그것들을 이용해 하고 싶은 이야기, 자아내고픈 분위기를 전하는 데 골몰한다.
‘춘천 가는 기차’는 그 백미다. 퍼커션, 플루트, 비브라폰, 신시사이저가 은밀히 조성해가는 몽환적인 분위기와 보사노바 리듬, 섬세하게 변해가는 화성…. 이런 음악적 설계도의 촘촘한 모눈은 춘천행 기차가 북한강을 끼고 눈 내린 철길 위를 달리는 정경을 그린 노랫말과 선율의 곡선을 방해하기는커녕 자기 모습을 숨긴 철골 구조처럼 든든히 뒷받침한다.
김희현, 손진태, 조동익, 함춘호 같은 당대의 연주자들 역시 이 새로운 모델의 열차에 목이 마르다는 듯, 기다렸다는 듯이 올라탔다. 유려한 연주를 한껏 뿌려댄다. 이 음반은 그렇게 대중가요의 발전도상에서 하나의 변곡점이자 명장면이 된다. 수록곡의 절반이 5분대, 대부분이 4분40초 이상이지만 곡마다 긴장감이 이어지는 것은 김현철의 짜임새에 명인들의 연주가 더해진 덕분이다.
작사, 작곡, 편곡을 모두 스스로 해낸 약관의 김현철은 국내 최고의 스튜디오(서울스튜디오)에서 최상급 세션 연주자들을 지휘하며 음반을 만들었다. 프로듀서까지 자임한 것이다. 연장자들로 이뤄진 콧대 높은 거대 음반 산업의 현장에서 약관의 젊은이가 지휘봉을 쥘 수 있었던 것은 이 음반이 표현해야 하는 모든 것을 오직 김현철만이 알고 있음을 모두가 인정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김현철 1집은 하나의 앨범을 하나의 화폭으로 여기게 할 만한 최적의 흐름을 보여준다. 첫 곡 ‘오랜만에’가 밤의 도시를 그려내며 만들어낸 설레는 분위기는 눈(‘눈이 오는 날이면’, ‘춘천 가는 기차’), 아침(‘아침 향기’), 비(‘동네’, ‘비가 와’) 같은 시공간적 소재를 차례로 통과한다. 그리고 ‘형’에 닿는다. 삶을 마주한 혼란, 위로에 대한 기대에 대한 고백의 발라드를 마지막에 배치함으로써 기나긴 길의 끝을 아련하게 칠해버린다.
최근 일본과 세계에서 옛 시티팝(city pop)을 발굴하는 물결 속에 이 음반도 먼지를 털고 조명 앞에 서는 분위기다. 기타리스트 하세가와 요헤이는 김현철과 빛과소금의 음반을 일본 시티팝 애호가도 선망하는 앨범들로 꼽는다.
봄여름가을겨울, 빛과소금의 음악이 꿈틀대던 시기에 김현철은 솔로 싱어송라이터이자 음악감독으로서 우뚝 섰다. 장필순, 이소라의 작곡가, <그대 안의 블루>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 <시월애>의 영화음악 감독으로 세련되며 감성적인 우리 음악의 외연을 넓혔다. <사랑하기 때문에>(1987)만을 남기고 요절한 유재하의 빈 자리에 김현철은 이렇게 들어왔다.
추천곡 ‘동네’ | 보컬부터 건반, 기타, 베이스기타, 드럼까지 당김음의 파도가 넘실대는 곡. 특히 브리지 부분(‘내가 걷는 거리 거리 거리마다/ 오 나를 믿어왔고 내가 믿어가야만/ 하는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의 보컬 리듬이 드럼과 엇나가고 겹치면서 ‘ㄱ’ ‘ㄹ’, ‘ㄴ’ ‘ㅁ’, ‘ㅅ’ ‘ㄹ’이 반복하는 모양새가 예쁘다. 해사하게 넘실대는 건반 솔로는 물론 후반부 김현철의 위악적인 스캣마저도 이 곡의 선을 돋보이게 할 뿐이다.
임희윤/동아일보 기자
19위 듀스 〈Force Deux〉(1995)전문가 리뷰 | 듀스와 서태지와 아이들은 호사가들에 의해 곧잘 비교대상이 된다. 활동시기도 비슷했고 추구하는 음악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구하는 음악이 비슷했다’는 말은 큰 틀에서만 맞는 말이다. 타이틀곡이나 유명한 노래만을 살펴보았을 때만 그렇다. 조금만 더 세세하게 파고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한마디로, 흑인음악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듀스는 ‘장르에 속한 그룹’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반면, 서태지와 아이들은 아니었다. 물론 서태지와 아이들은 ‘난 알아요’, ‘하여가’, ‘Come Back Home’ 같은 노래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서태지의 뿌리는 모두가 알 듯 ‘록’이었다. 듀스와 달리 서태지와 아이들의 앨범들은 여러 장르로 들쭉날쭉했다.
또 서태지와 아이들의 해체 이후 솔로로서 쌓은 서태지의 커리어는 듀스의 해체 이후 솔로로서 쌓은 이현도의 커리어와 장르적으로 명확히 대비된다. 서태지는 랩과 힙합을 시기적절하게 잘 ‘활용’했지만 흑인음악을 향한 장르 뮤지션으로서의 자의식과 애정은 그다지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사실은 당연히 음악적 ‘우열’을 의미하진 않지만 한국힙합의 역사적 맥락 안에서는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대중적으로 더 성공하고, 음반을 더 많이 판 쪽은 서태지와 아이들이지만 한국힙합의 음악적 ‘적자’는 듀스가 되는 것이다.
이현도는 흑인음악을 향한 장르 뮤지션으로서의 자의식과 애정이 서태지보다 훨씬 강한 인물이었다. 이것은 진정성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성취의 영역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Go! Go! Go!’에서는 한국말 라임의 진보를 이루어냈고, ‘무제’에서는 랩 특유의 ‘언어유희’를 한국말로 시도했다. 한편 ‘나를 돌아봐’와 ‘우리는’은 뉴잭스윙을 온전히 차용하면서도 위화감 없이 완성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듀스의 세 번째 앨범 〈Force Deux〉는 정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듀스는 앨범을 낼 때마다 발전한 그룹이었다. 두 번째 앨범 〈Deuxism〉은 데뷔 앨범 <나를 돌아봐>의 확장·강화판이었다. 한편 리믹스 앨범 〈Rhythm Light Beat Black〉은 앞선 두 앨범의 노래들을 (당시를 지배하던 흑인음악 사운드를 활용해) 모두 엎어버리고 다시 만든 작품이었다. 그리고 〈Force Deux〉는 앞선 모든 결과물을 ‘과정’으로 만들어버린다.
‘굴레를 벗어나’를 가리켜 ‘나를 돌아봐’와 ‘우리는’의 최종진화형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Tuff Ruff Ver.’의 흘러넘치는 ‘멋’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상처’, ‘의식혼란’, ‘Nothing But A Party’도 마찬가지다. 이 노래들은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듀스가 이미 보여준 여러 스타일 위에서 최대한의 밀도를 성취한다. 이현도 특유의 R&B 발라드는 또 어떤가. 어서 ‘다투고 난 뒤’와 ‘사랑하는 이에게’를 들어보자.
듀스의 활동기간이 짧았던 건 지금 돌아봐도 아쉽다. 하지만 듀스는 성장과 발전만을 보여준 그룹이었다. 그들은 패기와 재능으로 남들보다 앞서서 많은 것을 이뤄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듀스는 한국힙합의 정신적 고향이 되었다.
추천곡 ‘상처’ | ‘굴레를 벗어나’는 듀스가 그동안 내세워온 타이틀곡과 궤를 같이 하는 노래였다. 뉴잭스윙을 온전히 차용하면서도 위화감 없이 완성한 ‘나를 돌아봐’와 ‘우리는’의 최종진화형쯤 되는 노래랄까. 하지만 〈Force Deux〉의 하이라이트는 ‘상처’였다. 물론 관점에 따라 두 노래의 사운드를 엇비슷하게 묶어서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김성재가 반주 없이 솔로로 노래 부르는 ‘상처’의 도입부는 ‘굴레를 벗어나’와의 결정적인 차별점인 동시에 김성재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 우리는 이 노래를, 아니 홀로 공명하는 김성재의 육성을 뮤직비디오와 함께 기억한다.
김봉현/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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