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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2.09 09:19 수정 : 2018.12.09 15:10

[토요판] 오은·요조의 요즘은
고 허수경 시인

독일에서 날아온 허수경 시인 부고
11월20일 북한산 중흥사에서 49재
숭늉처럼 푸근했던 ‘누나’ 떠올리며
오은 시인이 재구성한 그와의 대화

10년 만에 귀국했던 2011년의 만남
2012년부터 2017년까지 오간 메일
여섯 권의 시집으로 그와 나눴던
작고 희미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

‘허수경’이라고 쓴다. 조금 있다가 “허수경”이라고 발음해본다. 쓸 때는 그저 먹먹하던 것이 발음하니 목울대까지 가득 차오른다. 액체에 가까운 마음들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들이 많았다. 이제는 하고 싶었던 말, 했어야 할 말들이 되었다.

지난 10월3일, 허수경 시인이 운명했다. 소식을 접한 많은 이들이 슬퍼했다. 공중으로 손을 뻗기도 했다. 뭐라도 잡을 것이 없을까 싶어서였다. 나는 밤새 허수경의 시집을 읽었다. 웃는 시들도 슬펐다. 우는 시들은 통곡하는 것처럼 다가왔다. 혼자서 얼마나 아팠을까. 홀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무엇보다 누나는 거기에 잘 있을까.

2011년 11월 한국에 잠시 귀국한 허수경 시인의 모습. 독일에 살던 그는 그해 시집 한 권과 소설 한 권을 냈고 두 번 한국을 찾았다. 그해 6차례 만난 후배 시인 오은에게 그는 “고국이든, 고향이든, 사람이든 늘 그리웠다”고 했다. 난다 제공
허수경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물기 어린 시어를 통해 표현했다. 그는 늘 모국어의 새로운 리듬을 만들었고 시간에 잠든 화석 같은 사연을 발견했다. 시에는 그리움의 정서가 강하게 배어 있었다. 허수경은 좋아하는 시인을 넘어 사랑하는 시인이 되었다. 생전에 낸 여섯 권의 시집은 흡사 시간의 지층을 떠올리게 한다. 사연들, 사랑들, 그리고 사람들이 켜켜이 쌓여 마침내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 되었다. 되돌릴 수 없으므로 마냥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누군가에게는 절대적으로 빽빽한 시간.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허수경의 시를 가리켜 이렇게 쓴 적이 있다. “가늠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당신과 내가 무엇이었는지를 묻는 일은, 남아 있는 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생전에 그는 어쩌면 우리일지도 모를 당신을 애타게 불렀다. 지금은 우리가 그의 이름을 불러줄 때다. 간절하게, 곡진하게.

한국도 외국이고, 독일도 외국이야

2011년, 허수경은 한국을 두번 찾았다. 연초에 다섯번째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을 들고 고국을 찾았던 그는 연말에 장편소설 <박하> 출간 시기에 맞춰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모르긴 몰라도, 10년 동안 어지간히 그리웠을 것이다. 돌아와서 여전한 것과 사뭇 달라진 것, 완전히 변한 것들을 바라보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생전의 마지막 방문이 될 거라는 사실을 감히 예감할 수 있었을까.

그리움이란 것은 한없이 어렴풋하고 아슴아슴하다가도, 북받쳐 오르면 쉽게 진정시키기 어렵다. 잊고 있던 어떤 기억이 퍼뜩 떠올라 심신을 단단히 옥죄는 것처럼, 그리움은 한번 고개를 들면 걷잡을 수 없이 우리를 삼키려 든다. 나는 지금 그리움을 계속하는 중이다.

처음 허수경을 만나던 날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의 두 눈에는 그리움이 그렁그렁 들어차 있었다. 그가 활짝 웃을 때 속으로는 꺼이꺼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두 눈이 울컥할 정도로 투명했으므로, 그에게 다가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는 숭늉처럼 푸근하고 따뜻했다. 그저 약간의 너스레면 충분했다. 마음에 담은 이들을 정성스레 보듬고 도닥이는 게 바로 허수경이었다. 그 앞에선 절로 “폐병쟁이 내 사내”(<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나 “낯익은 당신”(<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이 되었다. 나 자신도 모르게, 불가항력적으로 애틋해졌다. 불가능하게 애처로워졌다. 그때마다 맵싸한 바람이 불어왔다. 2018년 겨울, 그 바람이 다시 불어왔다. 코끝이 시큰하다. 아리다.

허수경이 머물던 한달여의 시간 동안, 나는 여섯번이나 그를 만나는 호사를 누렸다. 첫 만남 때 ‘선생님’이었던 허수경은 다음번에는 자연스레 ‘선배님’이 되었고, 세번째 마주할 때에는 나도 모르게 ‘누나’라고 부르고 있었다. 서슴없이, 마치 오랫동안 그렇게 불러왔던 것처럼, 그 호칭은 불쑥 튀어나왔다.

2011년 한 계간지에서 마련해준 자리에서 오간 대화, 2012년부터 2017년까지 주고받은 이메일, 무엇보다 2011년 귀국 당시 가졌던 여섯차례의 만남에서 함께 나눈 귀한 말들이 이 ‘사후 인터뷰’를 가능케 했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주로 작고 여리고 희미하고 보잘것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것들을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값진 경험인지에 대해 말하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그때도 지금도 겨울이다. 그사이, 내게 겨울은 그리움의 계절이 되었다.

2011년 겨울 서울 서대문구 연희문학창작촌에서 만난 시인 허수경과 오은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오은 제공
―누나가 10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 기억나?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다 고국에 돌아오면 어떤 느낌일까? 낯설고 친숙한 것들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을 텐데.

“나한테는 한국도 외국이고, 독일도 외국이야. 이젠 외국이 아닌 데가 아예 없어진 거 같아. 낯설지 않은 곳이 한 군데도 없어. 왜냐하면 독일에 살아도 온전하게 독일어로만 사는 게 아니잖아. 국적도 한국이고. 익숙한 것들과 낯선 것들이 혼재되어 있는 상황이니까.”

―사실, 자주 가던 곳이라도 몇 개월 만에 가게 되면 이것저것 많이 변해 있잖아. 원래 익숙한 곳인데도 문득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고.

“어쩌면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사물들, 그게 속해 있는 공간, 이런 것들을 낯설게 느끼는 게 시인의 마인드인 듯싶어. 나만 낯선 것은 아니겠지?”

―귀국했을 때 고향인 진주에도 갔었지? 거기도 낯설었어?

“갔었지. 제일 낯선 데가 바로 거기야. 언제나 고향이 제일 낯설지.”

―1987년에 데뷔한 이후 1년 만에 첫 시집을 냈잖아, 누나. 이게 보통의 경우와는 많이 다르잖아. 그때의 상황에 대해서 좀 들려줘.

“어느 날, 송기원 선생님이 전화를 하셔서 써놓은 시들이 있으면 다 챙겨서 서울로 한번 올라오라고 하시는 거야. 그래서 써둔 시들을 가지고 갔지. 그것들을 보여드렸더니 며칠 있다 좀 더 써서 가져오라고 하시더라고. 이유를 물어도 시원하게 답해주시지 않았어. 당시에 쓰고 싶은 것들이 있어 그것들을 몇 편 써서 다시 서울에 갔지. 그랬더니 이것들을 당장 시집으로 묶어서 낸다고 그러는 거야. 그렇게 해서 나오게 됐지.”

―엉겁결에 첫 시집을 갖게 된 셈이네?

“그래서인지 아직도 첫 시집이 유난히 감감하게 느껴져. 그 시집에 내가 쓴 시들이 담겨 있기는 하지만, 당시 <실천문학> 주간으로 계시던 송기원이라는 분에 의해 만들어진 시집이기도 하니까.”

내가 자라 강을 건너게 되었을 때/ 강 저편보다 더 먼 나를/ 건너온 쪽에 남겨두었다// 어느 하구 모래톱에 묻힌 내/ 배냇기억처럼.(허수경, ‘강’,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실천문학사, 2010)

―독일로 다시 떠나기 이틀 전, 누나를 만났었지. 그때 본 누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해. 발걸음과 그림자가 둘 다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표정이었지.

“낯선 곳이 조금 익숙해지려고 하던 찰나에 다시 독일에 가게 되었잖아. 사실, 가기 싫었다. 한국에 오니까 한국이 좋았어. 이 귀한 시간들을 내가 감히 누려도 되나 싶을 정도로 좋았어.”

―귀국한 뒤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어?

“내게는 언제나 후배 시인들 만나는 게 가장 특별한 경험이야. 그들에게서 지금 뿜어져 나오는, 혹은 근미래에 비집고 나올 말들을 짐작할 수 있어서 좋아. 그 순간들이 나를 들뜨게 하거든. 움직이게 만들거든.”

낯설어지려, 갱신하려 떠났지

―두 권의 시집을 내고 한창 주목받을 즈음, 돌연 독일로 떠났잖아. 어떤 특별한 계기 같은 것이 있었어?

“처음에는 그냥 막연히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 세월이 흐르면서 내가 왜 떠났는지 사유하게 되더라. 그때는 잘 몰랐지. 나중에 곰곰 생각해보니, 인간의 형식이 바뀌어야 시에서도 새로운 형식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더라고. 나한테는 그게 모국어로부터 한없이 낯설어지는 일이었고.”

―낯설어지면서 갱신되는 어떤 것을 생각하니 근사하다.

“모국어뿐만 아니라 모국적인 모든 상황에서 낯설어지게 될 때, 어떻게든 새로운 형식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지.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 새로운 예술형식은 한 인간의 형식이 변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거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형식이 낡아졌다고 느끼면, 의식적으로 그것을 갱신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때가 닥쳤을 때, 나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 거고.”

―결국은 누나만의 시를 발견하기 위해, 누나만의 시를 쓰기 위해 떠난 셈이네.

“한 사람의 재능은, 슬프게도 그것을 가진 사람이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야. 그걸 잘 모르니 우리는 참, 우릴 쉽게 쓰는 것 같아. 나는 시라는 문명의 한 장르에 목숨을 건 대목이 있어. 그래서 떠났지. 정처 없어졌지. 그래서인지 시에 인생의 한순간을 거는 사람을 보면 좋으면서도 쓸쓸해.”

대화 도중, 2012년 봄에 도착한 그의 이메일을 다시 읽는다.

“한국에서 독일로 돌아오면서 내가 왜 다시 이 긴 여행에 나섰는지 생각하는데 문득 오래전에 읽었던 시가 떠오르더라. 한국을 떠날 그 당시 아주 오랫동안 입안에 넣고 살았던 시.

숲은 아름답고 저물었고 깊은데/ 그러나 나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어/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 있다/ 잠들기 전에 가야 할 먼 길이 있다.(로버트 프로스트,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멈추어 서서’ 중에서)

어제 보르헤스가 이 시를 인용하는 대목을 읽는데, 문득 서울을 떠나오던 십수년이나 된 그 시간이 생각나더라. 아, 나는 나에게 약속한 게 있었구나, 하는 거.”

약속이 지켜지던 순간들을 떠올리니 아찔하다. 잠들기 전에 지켜야 할 약속을 떠올리는 일, 가야 할 먼 길을 헤아리는 일, 그리고 스스로에게 부끄러워지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일을, 허수경은 독일에서 매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학문들 중 고고학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출국할 때, 막연히 고고학이나 예술사를 공부하려는 마음이 있었어. 독일에서 어학 과정을 마치고 시험을 봤지. 독일에서는 고고학도 굉장히 세분화되어 있어. 그중 고대근동고고학을 선택했던 것이고.”

―어렵지는 않았어? 독일에서 공부하는 고고학을 떠올리니, 낯선 곳에서 더 낯선 곳을 찾아 떠나는 느낌이 들어.

“후회도 많이 했어. 발굴 작업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처리해야 할 고대어들이 너무 많아서. 그것들을 익히는 게 몹시 어려운 일이었거든. 쐐기문자부터 시작해서 라틴어, 고대 중국어, 수메르어까지…… 언어를 배우는 시간이 굉장히 길었지.”

―고대어들 익히랴, 공부하랴, 발굴하랴… 시를 쓸 시간은커녕 시를 생각할 시간도 거의 없었겠네.

“논문 출판까지 다 마친 뒤, 정말이지 중요한 결정을 해야 했어. 고고학을 공부하러 독일에 왔지만, 이게 결국은 다 시 때문이었거든. 고고학도 만만한 게 아닌데, 아시다시피 시 쓰는 것도 결코 쉬운 게 아니잖아. 두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시간이 찾아왔지. 그래서 다시 문학으로 돌아간 거야. 대학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편협성 같은 것도 있었고…. 굳이 대학에 계속 남아 있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지.”

부기(附記): 어떤 의미에서는 뒤로 가는 실험을 하는 것이 앞으로 가는 실험과 비교해서 뒤지지 않을 수도 있다. 뒤로 가나 앞으로 가나 우리들 모두는 둥근 공처럼 생긴 별에 산다. 만난다, 어디에선가.(허수경, ‘시인이 쓰는 산문’,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문학과지성사, 2005)

―시집 사이의 간격이 길 때도 있었지만, 산문집이나 소설 등 꾸준히 글을 써서 책을 냈잖아. 외국에 있으니 외려 한국어에 갈급이 날 것 같은데 어땠어? 독일어로 일상생활을 해나가면서 한국어로 사고하고 글을 써야 하는 것의 괴리도 있었을 거고.

“실은 항상 불안했어. 고백하자면, 언젠가는 내가 모국어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굉장했지. 모국어의 층이 나도 모르게 점점 엷어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 때도 있었고. 어쩌면 그 감각은 의도적으로 잃어버리려 애써야 되는 건지도 모르지. 새로운 것이 나오기 위해서는 필연적일 수도 있을 만큼.”

―언어를 통해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일이네. 아니면 새로운 나를 통해 기존의 언어를 들여다보는 일이거나.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라는 포르투갈 시인이 있어. 그 사람이 생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나는 포르투갈어로 시를 쓰지 않는다. 나는 나로 시를 쓴다.’ 이 말이 나의 경우에도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 우리가 한국어라는 뜨거운 언어 공동체 속에 있긴 하지만, 결국은 ‘나’를 쓰는 거잖아. ‘나’라는 게 바로 언어지.”

허수경은 독일어로 사는 부분과 한국어로 사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어로는 고고학을 해본 적이 없으니 독일어로 한다고 했다. 하지만 독일어로 된 문학책을 읽을 때는 한국어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뇌에서 정확히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렇다고 했다. 그것이 자기 자신을 좀 더 분명하게, 생생하게 만들어준다고도 했다.

―그리움이 가장 커질 때는 언제야? 그때 그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어떻게 추슬러?

“늘 그리웠던 것 같아. 그 대상이 고국이든, 고향이든, 사람이든. 그래도 공부를 끝내고 돌아오려고, 참고 또 참았어. 그리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 밥을 지어 먹었어.”

―날씨가 추우면 뭐든 더 그리워지지 않아?

“응. 눈 내리는 것을 볼 때마다 아득해지잖아. 나는 늘 눈송이들이 어떤 마음을 나르고 있다고 생각했어. 차가운 것이 애가 타니 어쩔 수 없어지는 거지. 그때의 눈은 흡사 그리움의 결정(結晶)처럼 보이지. 극지방이 아닌 이상, 눈은 보통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스르르 녹아버리잖아. 그리움도 다르지 않지. 서서히 옅어지지. 하지만 남아 있지. 그리고 반드시 다시 찾아오지.”

나는 여전히 내가 되어가는 중

옅어질지언정 끝끝내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한다. 그 힘으로, 그것은 반드시 여기를 다시 찾을 것이다. 지금 내 옆에는 허수경이 낸 여섯 권의 시집이 있다.

―누나 시집들을 찬찬히 다시 읽고 있어. 여섯 권의 시집들이 참으로 놀라워. 계속해서 꾸준히 ‘다른 방식으로’ 싱싱할 수 있다는 데서 말이야. 나도 모르게 불쑥불쑥 북받쳐 오르기도 했고.

“그 말을 해주니까 참 반갑다. 나는 내가 내는 시집들이 일종의 콘셉트 앨범이라고 생각해. 비틀스라는 뮤지션이 내게 끼친 가장 커다란 영향도 바로 그거고.”

―맞네. 비틀스는 매 앨범을 콘셉트 앨범의 형식으로 발매했었지. 그때마다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그 속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갔잖아.

“그래서인지 내 경우에도 매 시집마다 독자들이 바뀌어. 그러니까 예전에 <혼자 가는 먼 집>을 읽던 독자들은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를 안 읽어. 그 반대의 경우도 있고.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과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는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독자들을 찾아간 듯싶어서, 개인적으로는 무척 기뻐. 나는 여전히 내가 되어가는 중이니까, 부단히 ‘나’라는 언어가 되어가는 중이니까.”

한때 그대도 여기에 있었으나/ 그러나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 순간/ 이 자연은 과거가 되었고// 지금 그대 없는 자연은/ 언어가 되었다.(허수경, ‘여기에서’,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문학동네, 2011)

―누나, 지금은 한국도 독일도 아닌 곳에 가 있잖아. 거기는 어때?

“여기도 겨울이야. 겨울이면 눈이 내리겠지. 눈은 쌓이고 얼음이 되겠지.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되고 그 물이 흐르기 시작하면 봄이 될 거고. 그러면 나는 또 반가워하겠지. 순환은 사람을 설레게 하면서도 동시에 안정되게 만들어주니까.”

―밥을 지어 먹었는데도, 배가 부른데도, 그때도 그리우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싶다’라는 말을 조용히 입안에 넣고 굴려봐. 그러다 보면 정다운 얼굴이 천천히 눈앞에 나타날 거야. 말은 신비한 구석이 있어서 정말로 그렇게 된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입안에서 ‘싶다’를 굴려봤겠니. 그러고도 그리우면 우주의 시간을 떠올려봐. 우주의 시간으로 보면, 우리가 만나고 이야기 나누고 서로 그리워했던 시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을 거야. 물론 아주 꽉 찬 찰나지. 그러니 나중에 우리가 만나면 얼마나 반갑겠니. 얼마나 벅차겠니.”

먼 집을 향해 혼자 걸어가는 그를,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나도 모르게 울적해진다. 허수경은 혼자가 더 혼자가 되는 상태, 먼 집이 더 멀어지는 상태를 지향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해?”라고 물으면 슬며시 웃었다. 웃음에는 소금기가 가득했다.

서울 하늘 아래서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부르면, 뮌스터 하늘 아래 있던 허수경이 움찔하는 상상을 하던 때가 있었다. 가능할 것 같았다. 그는 좀체 가만히 있지 못하는 시인이므로. 언제나 이동하는 시인이므로. 그리하여 변화하는 시인이므로. 심장처럼 붉게 피어났다가 박하처럼 하얗게 타오르는 시인이므로. 자신을 좋아하는 후배 시인들에게 “다들 폭발하세요”라고 수줍게 말을 건네는 시인이므로.

독일에서 허수경 시인의 장례식이 있던 10월27일, 그의 방에 그를 기리는 공간이 마련됐다. 김민정 시인(난다 대표)이 소셜미디어로 받은 144명의 마지막 인사를 비단 봉투 안에 넣었다. 난다 제공
그가 아팠을 때 왜 말 안 했을까. 왜 혼자 멀리서 끙끙 앓았을까 생각하던 시간이 있었다. 2014년 10월에 그가 보낸 이메일을 다시 읽으니 짐작할 수 있었다. “첫눈이 알프스의 어느 곳에서 온다는 기별을 듣다가 불현듯 네 생각을 한다. 고향에 턱, 하고 갈 수 없는 인간의 평범한 일들이 나에게도 있어서 멀리 있는 너와 벗들을 그리워만 한다. 그리워하니 무슨 일이 있는데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하루가 간다.” 그는 마지막까지 평범하게 책 읽고 글 쓰고 자신의 ‘폭발’을 다하려고 했다.

2018년 2월, 허수경은 김민정 시인에게 위암 투병 소식을 전해왔다. “민정아, 기회가 되면 여기저기 알려줘. 이유는 하나야. 내가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어.”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이 한데 모여 전해질 때면, 그는 아이처럼 좋아하며 힘을 냈을 것이다. 그 힘으로 다시 그리워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 시간들은 실로 빽빽하고 뭉클했을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지금 통과하는 시간 또한 집처럼 점점 더 멀어지게 된다는 점이다. 더 분명한 사실은, 시간이 아무리 멀어져도 우리는 더러더러 당신을 떠올리고 문득문득 당신을 그리워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움은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므로. 아무리 그리워해도 그리움의 대상은 닳지 않으므로. 이 모든 것을 허수경이 말과 글로 가르쳐주었으니, 우리는 그리움에 사무칠지언정 나약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봄이 되고 그리움에 사무칠 때면 간곡한 마음으로 밥을 지어야겠다. 그가 ‘궁극의 맛’이라고 표현한 봄 미나리를 무쳐 함께 먹을 것이다. 고독하게, 오독오독 그것을 씹을 것이다.

나는 내 섬에서 아주 오래 살았다/ 그대들은 이제 그대들의 섬으로 들어간다// 나의 고독이란 그대들이 없어서 생긴 것은 아니다/ 다만 나여서 나의 고독이다/ 그대들의 고독 역시 그러하다.(허수경,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사, 2016)

아무도 사랑하지 않은 시간은 없었다

지난 11월20일, 북한산 중흥사(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서 허수경의 사십구재가 있었다. ‘약력 보고’ 때 읽었던 글을 덧붙인다. 누군가의 삶이 몇 줄로 정리될 수도 없고 정리되어서도 안 되지만, 허수경이 그간 펴냈던 시집들을 한번씩 발음해보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어떤 울림이 있었다. 울림보다 더 큰 위로가 있었다.

지난 11월20일 북한산 중흥사(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서 열린 허수경 시인의 49재. 국내 문인과 출판인 등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오은 제공
1964년, 허수경은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대학에서는 국어국문학을, 대학원에서는 고대근동고고학을 전공하였습니다. 대학은 한국 진주에서, 대학원은 독일 뮌스터에서 다녔습니다.

1987년, 시인이 되었습니다. 이듬해에 첫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를 펴냈습니다. 2010년에 나온 이 시집의 개정판에서, 허수경은 ‘시인의 말’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시인으로서의 삶이 지난하다는 걸 모르고 열정만 가득하던 시절, 말의 어려움과 지난함과 지극한 가벼움과 가벼움 뒤에 서 있는 사랑과 삶을 알아보지 못하고 다만 젊어서 불렀던 노래들이 그 시집 안에는 담겨 있습니다.” 젊어서 불렀던 그의 노래들은, 30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젊고, 아프고 싱싱합니다. 그가 ‘지난함’과 ‘가벼움’ 뒤를, 그리하여 세계의 비극과 불우한 일상을, 끊임없이 기록해왔다는 사실도, 우리는 압니다.

1992년, 허수경은 두번째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을 출간합니다. 고향인 진주가 가장 낯설다는 허수경은, 늦가을에 독일로 떠납니다. 더 낯설어지기 위해서, 자신의 형식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고고학을 공부했지만, 허수경은 시어와 영혼을 발굴하는 데 더 많은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허수경은 ‘먼 집’은 여전히 멀리 있다고 믿었습니다. 계속 걸었습니다.

2001년, 독일에서 살면서 세번째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를 출간합니다. 9년 만이었습니다. 고고학을 할 때는 독일어로 살고, 시를 쓸 때는 한국어로 살았습니다.

2005년, 네번째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을 펴냈습니다. 여전히 독일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허수경은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역설적으로 앞날을 내다보려 애썼습니다. 그리움이 짙어져 한국에 돌아오고 싶을 때면 밥을 지어 먹었습니다.

2011년 초, 다섯번째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이 나오고 허수경은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10년 만이었습니다. 독일도 외국이고, 한국도 외국이라고 느꼈습니다.

2011년 말, 장편소설 <박하>를 출간하고 허수경은 한국을 다시 찾았습니다. 말을 잊어버리고 잃어버리는 것이 겁나서, 한 자 또 한 자 쓰기 시작한 소설이었습니다. 독일로 다시 돌아가기 전날, “다시 올 거지?”라고 물었습니다. 허수경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지.”

2016년, 여섯번째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가 출간되었습니다. 20년이 훨씬 넘게 타국에서 살았지만, 허수경은 공간이 아닌 시간을 사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 낯섦이, 그 무시무시함이 계속 쓰게 하는 힘이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리움으로 회귀하면서도 희망을 끝내 저버리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푹푹 꺼지는 땅 위에서 뚜벅뚜벅 걸어가겠다는 안간힘이,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허수경에게 시란 무엇인지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허수경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시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삶의 내용이지. 시인은 탄생과 탄생을 거듭하다가 어느 날 폭발해버리는 존재고.”

허수경의 시집 제목들을 또박또박 다시 읽어봅니다.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슬프고, 멀고, 오래되고, 아래에 있어 보이지 않고, 차갑고, 쓸쓸한, 그런 곳에서 허수경은 시를 썼습니다. 생전에 동서문학상, 전숙희문학상, 이육사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2018년 10월3일, 하늘이 열리던 날. 차가운 심장을 가진 가장 뜨거운 별이 되었습니다.

11월20일, 사십구재에 맞춰 소설 <모래도시>의 개정판 <모래도시>와 에세이 <모래도시를 찾아서>의 개정판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가 출간되었습니다. <나는 발굴지에 있었다>에 실려 있는 작가의 말 일부를 읽으며 약력 보고를 갈음하고자 합니다.

“개나리 노란 한숨/ 저 바람이 스치며 간다// 노란 한숨이 아직은 작게 내려오는 봄빛 아래에서/ 바람이 스친, 아린 자리를 쓰다듬으며/ 허공에 머물러 있다// 사랑한다, 라고 말할 시간이 온 것이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은 시간은 없었다고/ 말할 시간이 온 것이다.” 녹취 오유민

▶오은 시를 쓴다. 이따금 쓰지만 항상 쓴다고 생각한다. 잘하는 것을 더 잘하는 삶 대신 못하는 것을 채우는 삶을 살기 위해 애쓴다. 딴청을 부리고 딴생각을 할 때 가장 행복하다. ‘딴’에서 새로운 것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항상 살지만 이따금 살아 있다고 느낀다. 시집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유에서 유> 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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