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3.23 09:47
수정 : 2019.03.23 09:50
[토요판]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⑧ 알렉상드르 카바넬, <비너스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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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 카바넬, <비너스의 탄생>, 1863년, 캔버스에 유채, 파리 오르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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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집이나 식당 벽에 걸려 있던 ‘외설적인 달력’을 기억하시는지. 비키니 차림의 여성이 술잔을 들고 몽롱한 시선을 던지는 사진이 인쇄된 달력들 말이다. 이 달력들은 그저 ‘80~90년대의 질 나쁜 유산’일 뿐이라 생각했는데, 연초에 한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주류회사들이 ‘올해부터’ 그 민망한 달력의 생산을 중단했다는 기사였다. 미투 열풍으로 거세어진 ‘페미니즘’ 조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밀려났다는 뉘앙스의 기사를 읽으면서, 자연스레 궁금해졌다. 21세기가 된 최근까지도, 여성의 몸을 대놓고 전시하는 불쾌한 달력이 질기게 살아남았던 이유는 뭘까. 몇차례 검색을 해보니 눈에 띄는 말이 있었다. “섹시한 여자 사진을 보면 술 생각이 떠오르고, 술맛이 더 나기 때문이다.” 여성의 몸은 ‘안줏거리’라는 솔직한 고백이다.
1863년 프랑스 파리의 미술 전시회인 살롱전 벽에도 ‘주류회사 달력’과 비슷한 분위기의 그림이 걸린 적이 있었다. 그림 속 여성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가슴이 도드라지도록 팔을 뒤로 젖힌 채 누워 있다. 눈까지 반쯤 감고 있는 이 여성의 자태는 한눈에도 외설적이었다. 문제는 그림이 걸린 곳이 술집이 아니라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미술전이 열리는 장소였다는 점. ‘점잖은 신사’ 관람객이라면 당장 음란하다고 호통을 쳐야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아마 그림 제목을 보자마자 슬며시 안도의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그림의 제목은 <비너스의 탄생>(알렉상드르 카바넬, 1823~1889)이었다. 현실 속 여성이 아니라 신화 속 여인 ‘비너스’라는 안전장치가 있었기에, 남성들은 적나라하게 전시된 여성의 몸을 편안히 훑으며 시각적 쾌락을 즐길 수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몰라도 이 그림은 찬사를 받으며 살롱전 금상을 수상했고 그 뒤 나폴레옹 3세가 사들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당대 유명 작가였던 에밀 졸라만은 달랐다. 그는 의미심장한 비유를 들며 다음과 같이 그림을 거세게 비판했다. “젖의 강에 빠진 이 여신은 맛있어 보이는 고급 창녀와 닮았다. 그녀는 살과 뼈로 만들어지지 않고(만일 그랬다면 보기에 안 좋았을 것이다) 주로 분홍색과 흰색으로 되어 있으며 케이크 위에 부드러운 장식으로 사용되는 마르치판(marzipan) 종류로 만들어진 듯하다.” 졸라는 여성의 몸이 ‘음식’이 됐다는 걸 간파한 셈이다.
요즘 연일 ‘버닝썬’ 단체대화방 뉴스가 쏟아지고 있다. 물론 나는 그들의 행태에 분노했지만, 솔직히 그 내용은 별로 새삼스럽지 않았다. 19세기 프랑스 전시장부터 21세기 한국 술집까지, 여성의 몸이 먹는 음식처럼 대상화되어 전시되고 남성들의 쾌락 도구가 되어온 것이 어디 한두해인가. 뉴스 속 그들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여성을 가리켜 ‘골뱅이’라 하고, 약물을 이용해 기존 ‘업소 여성’ 말고 ‘일반 여성’을 제공해 더 격이 높은 성접대를 하라고 지시한다. “룸에 가면 (성형 안 한) 자연산을 더 찾는다”고 얘기하기도 했던 전 한나라당 대표의 예전 발언을 떠올려보니 그동안 클럽에서 여성들은 어패류였던 것 같다. 비단 클럽에서만 그랬을까? 예전부터 여성들은 김치녀와 된장녀로 불렸고 ‘밥’이 되기도 했다. 불륜 남성들의 단골 변명은 “어떻게 매일 집밥만 먹냐. 가끔씩 외식도 해줘야지”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음식이 아니고 쾌락의 도구도 아니고 영혼 없는 물건도 아니다. 여성 역시 생각하고 느끼는 인격체이다. 이 당연한 말을 또 외쳐야 하는 걸까.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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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리 예술 분야 전문 작가. <화가의 마지막 그림> <세상을 바꾼 예술작품들> <검은 미술관> 등의 책을 썼다.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코너에서 ‘여자사람’으로서 세상과 부딪치며 깨달았던 것들, 두 딸을 키우는 엄마로 살면서 느꼈던 감정과 소회를 그림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풀어보고자 한다.
sempre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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