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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3.31 09:57 수정 : 2019.03.31 10:07

〔토요판〕 정용욱의 편지로 읽는 현대사
⑦ 귀환동포들의 주거권 투쟁

1947년 7월 신당동 일대 주민
“주택 강탈 결사반대” 내걸고
미 헌병·경찰 맞서 집단 저항

원래 일본인 살았던 적산가옥
주로 국외 귀환동포들이 거주
“미군숙소 위해 퇴거” 통보에 반발

해방 이후 국외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귀환동포들은 주택과 식량난 등 민생고에 시달려야 했다. 사진은 1948년 5월28일 만주에서 인천으로 돌아온 한국인 소녀 한명이 인천에 세워진 귀환민 캠프에 들어가기 전에 머리에 소독을 당하는 모습이다. 귀환선은 엄격한 방역절차를 밟고서야 상륙할 수 있었고, 귀환자들은 방역사업의 일차 대상이 되었다. 미국 국립문서관, 국사편찬위원회 사본
1946년 9월21일 신당정, 앵구남정, 남무학정, 동사헌정에 거주하던 주민 수백 명이 연명으로 미군 사령관 하지 장군에게 절절한 심정으로 탄원서를 보냈다.

“각하, (전략) 경기도 재산관리처의 니스벳 소령이 갑자기 10월1일까지 현재 우리가 거주하는 주택의 명도를 지시한 것을 거두어주시기를 간절히 호소합니다. 우리는 이 명도령에 당황하고 있고, 또 귀하의 승인하에 발부된 것인지 의아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히 이 사안을 각하에게 직접 전달하려고 합니다. 곧 추위가 닥칠 텐데 지금 이 계절에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고 노인과 어린이, 가녀린 부녀자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동료 군인들이 우리 동네에 같이 사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네 미국인들에게 땅을 내놓지 않으려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곳의 거주민들이 모두 이미 너무 많은 고통을 받고 해외로부터 돌아왔고, 지금 양식 걱정과 입을 옷이 없어 고통을 받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 불쌍한 영혼들이 살 집도 없이 어떻게 될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고, 또 그들을 위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중략) 이 문제를 당신이 재고해주시고, 당신의 권한으로 이 명령이 가능한 한 빨리 철회될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간절히 비나이다.”

1946년 9월 신당동과 청구동 등 일대 주민들이 하지 미군사령관에게 보낸 탄원서. 미군은 일본인들이 남기고 떠난 이 일대의 적산가옥을 미군 숙소로 삼겠다면서 이미 거주하고 있던 주민들에게 퇴거 명령을 내렸다. 미군이 이듬해 주민들을 강제로 내쫓으려 하자, 이듬해 7월 주민들은 이를 거부한 채 미군과 경찰에 집단으로 저항했다. 정용욱 교수 제공
서울 신당동 일대 주민들이 하지 중장에게 보낸 탄원서에 첨부했던 서명원부. 정용욱 교수 제공
소학생까지 집 사수 투쟁

‘앵구남정’(櫻丘南町)은 한자어 그대로 ‘벚나무 언덕 남쪽 거리’인데 일본인들의 작명법에 따라 지어진 동네 이름이었다. 해방 이후 동명을 개정하면서 왜색이 짙다고 생각했는지 앞 글자 하나만 살짝 바꾸어 청구동(靑丘洞)이 되었다. 이 편지가 작성되었을 당시에는 그대로 옛 지명을 쓰고 있다. 앵구정은 일제 식민지기에 경성의 확장과 더불어 교외 지역에 개발업자들이 이른바 ‘문화주택’을 만들어 분양할 때 생긴 동네였다. 앵구정은 동양척식회사의 자회사인 조선도시경영주식회사가 신당리 지역에 개설하여 1932년 8월에 분양을 개시한 신흥주택단지였다. 언급된 지명들은 순서대로 현재의 서울 신당동, 청구동, 흥인동, 장충동 1가에 해당하며, 장충단 공원 동쪽과 북쪽에 위치한다.

이 청원서는 한글 편지는 남아 있지 않고 타자를 친 영문 번역문 한 장이 남아 있다. 영문으로 작성해서 보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첨부한 나머지 43장은 모두 미농지를 세로 상하단으로 나누어 동사헌정, 신당정 주민들이 자신의 이름과 주소를 촘촘하게 적고 도장이나 지장을 찍은 연명부다. 한 장당 작게는 10명 남짓 많게는 24명까지 날인했으니 일일이 세어보지 않았으나 600명은 훌쩍 넘는다. 본문에 나와 있는 앵구남정, 남무학정의 연명부는 남아 있지 않다. 아마 이 지역에 일제 강점기에 개발되어 일인들이 거주하던 번듯한 ‘문화주택’이 많았던 듯하고, 해방 이후 일인들이 떠난 뒤 적산가옥(일제 강점기 일본인 소유였다가 해방 뒤 정부에 귀속된 주택)이 되었다.

해방 직후의 주택난과 미군정 주택정책의 난맥상을 보여주는 일회성 사건으로 볼 수도 있으나 사실은 귀환동포들이 고국 정착 과정에서 겪는 간난신고를 상징하고, 이 지역에서 상습적으로 일어났던 일이다. 약 10개월 뒤인 1947년 7월 이 지역에서 적산가옥 거주민들이 미군의 명도령에 불응하는 군중행동을 일으켰는데 이 진정서는 그 사건의 전조인 셈이다. 왜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같은 지역에서 주민들이 미군정의 퇴거 명령에 집단적으로 불복하는 사건이 연이어서 일어나고 심지어 대규모 군중행동으로까지 번졌으며, 귀환동포 또는 전재민과 적산가옥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1947년 7월 신당동 주민의 거주권 수호 투쟁에 대한 도하 각 신문의 보도를 종합하면 신당동 일대 적산가옥에는 그 전부터 미군 숙소로 사용하기 위한 퇴거령이 자주 내려와서 주민들에게 불안감을 주었다. 그러던 중 6월28일 돌연 주택명도 통지를 받은 주민들이 이에 반대하는 의사를 표시하는 동시에 7월11일 주민 연서로 하지 중장, 안재홍 민정장관, 서울시장 등에게 진정서를 제출하여 재고와 선처를 요망했으나 7월17일까지 철거하라는 최후통고가 내려왔다. 그러자 주민들은 집집마다 “주택 강탈 결사반대, 주택 강제명도 결사반대”라고 영문과 국문으로 써 붙이고, 관공리는 물론 회사 공장에 근무하는 자들과 소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출근 혹은 학업을 중지하고 문패는 물론 주소패까지 철거하고 결사적 사수농성을 기약했다.

북한, 만주, 동중국 등에서 38선을 통해 남쪽으로 돌아온 귀환동포들이 개성에 마련한 난민촌에 들어오고(1947년 5월25일) 있다. 이들은 이곳에서 몸수색과 예방주사 접종 등 방역을 마친 뒤 주거지가 마련될 때까지 텐트에서 생활했다. 미국 국립문서관, 국사편찬위원회 사본

미군의 명도령을 거부하고 농성을 벌인 서울 신당동 일대 주민들의 시위 소식을 사진과 함께 전한 한성일보(1947년 1월17일)의 지면.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드디어 7월15일 미군이 명도를 집행하려고 왔으나 주민의 결사적 반대로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퇴각하였다가 이튿날 다시 헌병(MP)을 출동시키는 동시에 조선 순경 약 200여명을 무장 출동시켜 명도를 집행하려고 하였다. 이 또한 주민의 강력한 반대로 실패했다. 계고장을 받은 호수는 대체로 600여호, 거주 세대는 1800여세대, 연판장 서명인은 8000여명이었다. 평균적으로 집 한 채당 3세대가 거주한 셈이고, 계고장을 받은 세대뿐만 아니라 언제 자신에게도 계고장이 닥칠지 모를 다른 적산가옥 거주자들이 광범하게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주민들은 서민층이었고, 미군 당국에서는 그들을 하남동과 신촌으로 이주시킬 계획이라 하나 인근에 생활의 근거를 가진 사람들이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게 되면 생활의 기반을 파괴당하는 것이라 하여 전 동민이 일치단결해서 명도를 거절하는 강경한 의사를 견지했다.

조선인 구매 허가→매매계약 무효화
미군 오락가락 적산가옥 정책에
민생고·부정부패 등 사회혼란 가중

적산가옥 불하 서울에만 6만호

주민들의 명도 거부 이유로는 거주권의 자유를 침범할 뿐 아니라 이미 합법적으로 모든 수속을 하고 입주한데다 자녀 교육을 위하여 부근에 학교, 유치원, 교회 등을 부설하고 근 2년을 생활해왔는데 돌연 명도하라 함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근처 신당중앙시장과 같이 암시장을 생활의 기반으로 삼았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지역에 주거를 갖지 못하고 다른 지역으로 옮기라는 것은 거주권뿐만 아니라 생존권을 위협하는 조치였다. 7월16일자 <독립신문>은 농성에 참가했던 한 주민의 인터뷰를 실었는데 그의 육성을 들어보자.

“조선의 소위 적산이라는 것은 일제가 36년간 조선 민족의 고혈을 착취한 유물(遺物)인 만치 적국이 아닌 조선에 있어서 일인이 남기고 간 재산을 조선의 입장에서는 적산이라고 보는 것은 정당할 것이나 연합국에서 이것을 적산으로 취급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우리 해방의 은인인 미국 군인의 주택에 대하여는 우리가 힘 자라는 대로는 협력하는 것이 당연하나 들은 바에 의하면 금번 미군의 주택 1호에 150만원의 예산과 동민이 이주할 가옥 건축비로 매호에 수만 원씩을 계상하였다 하니 이 금액으로 적당한 장소에 미군 주택을 신축하였으면 우리의 주택을 뺏지 아니하더라도 넉넉히 될 수 있을 것이며 양쪽이 편할 일인데 기어이 민중의 원성을 사가면서 무모한 일을 감행하는 정책은 이해할 수 없다. 하여튼 수천 명의 사활 문제인 만큼 만일 타당한 해결이 없는 때에는 일대 불상사가 일어날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수천 명의 주민이 운집하여 퇴거 명령을 집행하러 온 미군 헌병과 경찰을 쫓아낸데다 16일에는 양측의 충돌로 부녀자를 포함해 주민들 50여 명이 부상당하는 일까지 일어나자 이 사태는 남한 사회의 여론에 불을 지폈다. 맹렬한 반대운동과 이를 동정하는 인근 적산가옥 주민들의 호응으로 동정 여론이 점차 확대되자 공보부는 17일 재조사를 위해 명도령 ‘집행’을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이 사회문제로 확대되고, 한국 사회의 여론이 들끓자 18~19일 한독당, 근민당, 한민당, 사민당, 조선공화당, 천도교청우당, 신진당, 독촉, 신한국민당, 민주한독당, 민주독립전선 등 16개 정당 사회단체가 회의를 거듭하였고 20일 “일개 국지적 사건이지만 현재 소위 적산가옥에 입주한 빈민이 기십만에 달하고 있는데 그들에게 주거의 안정감을 주지 않고 반면 항상 철거의 철퇴가 위협하고 있다. 최근의 적산불하 문제로 서울 시내 6만 호를 비롯한 남조선의 무수한 세궁민이 강제철거의 운명에 당면하고 있는 이때 미군 및 군정당국은 전면적으로 이를 신중 고려하여 이러한 민족적 사회적 불상사가 발생치 않도록 절실히 요청한다”는 취지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해방 이후 일본, 중국 관내지역과 만주 등 국외에서 귀환동포들이 쇄도하고, 또 38도선 이북에서 내려오는 월남민도 점차 늘어가자 남한 사회는 민간 차원에서 각종 원호단체들을 조직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구호와 원조를 제공하기도 했으나 쏟아져 들어오는 이들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동포애’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더더욱 아니었다. 가장 긴급한 것이 그들을 먹이고 재우는 문제였고, 다음으로 그들 스스로 호구책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했다. 그들 가운데 다행히 돌아갈 고향이 있거나 부쳐먹을 땅덩이라도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고, 대부분이 서울 등 대처에 집거하며 생활수단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람들이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등 큰 도시마다 넘쳐났다. 그러자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적산가옥에 그들을 수용하여 귀환동포와 전재민, 실업자의 주택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고, 미군정도 그러한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 서울 남산 일대에는 일본인들이 주로 살던 신식의 ‘문화주택’이 많이 들어섰다. 식당과 욕실, 화장실을 실내에 설치한 문화주택은 당시 최고급 주택이었다. 사진은 일제강점기 남산 아래 회현동 부근의 주택단지. <일제 침략 아래에서의 서울>
일제강점기 일자리를 찾아 농촌에서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은 산기슭이나 하천변 등에 임시로 지은 토막에서 비참하게 지내야 했다. 가마니로 둘러친 토막의 모습. <일제 침략 아래에서의 서울>
미군 법령 33호 ‘일 사유재산 보호 철회’

미군은 진주 직후인 1945년 9월25일 법령 2호로 일본인 사유재산을 조선인이 구매할 수 있게 허가했으나 일인 재산을 몰수하여 한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이를 공정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한국인들의 주장이 비등하자, 1945년 12월6일 다시 법령 33호로 일본인의 모든 재산을 군정청으로 귀속시켰다. 이에 따라 그간 체결된 일본인 사유재산에 대한 매매계약도 모두 무효화됐다. 이렇게 미군의 적산관리 정책이 혼란스럽게 오락가락하는 동안 한국인 모리배들이 적산을 사유화하거나 점유하는 행위가 속출했고, 적산가옥과 적산기업은 미군과 결탁한 모리배들의 놀이터가 되어갔다. 어쨌든 법령 33호에 의해 한국인들은 미군정청 등 행정기관으로부터 적산가옥을 임대할 수 있게 되었고, 신당동 거주민들 역시 임대료를 내고 적산가옥에 세를 들었다.

그러나 신당동 사건이 보여주듯 합법적으로 수속을 마치고 적산가옥에 입주한 사람들도 거주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 채 언제 명도령이 나올지 전전긍긍하는 상황이었다. 일본에 잔류한 조선인들이 점령의 장기화로 자신의 지위가 불안해지는 것을 지켜보며 호구책을 위해 암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면, 한국으로 돌아온 귀환동포는 자신과 식구들이 몸뚱이 하나 눕힐 공간을 지키기 위해 미군 사령관에게 연일 탄원서를 작성해야 했다. 귀환동포와 전재민들에게는 그들의 정착을 도와줄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대책이 필요했으나 점령당국은 부두와 임시수용소에서 그들의 몸에 하얀 디디티(DDT) 가루를 뿌려주거나 수용소에 있을 동안의 양식, 당장의 호구를 위해 몇푼 안 되는 현금을 쥐여주는 것 외에는 거의 손을 놓다시피 했다.

적산에 대한 미군 당국의 정책과 대응에서 보듯이 미군 당국이 한국 사회가 부딪힌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구체성 있는 정책도 제시하지 못하고 사태를 제대로 관리하지도 못하는 가운데 귀환동포들은 꿈에 그리던 고국에서 거주권도 보장받지 못한 채 군정 관리나 경찰의 부정·부패와 모리배의 발호가 오히려 조장되는 현실을 지켜보아야 했다.

▶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한국 현대사 전공. 사료의 확대를 통한 역사 서술 주체의 확장, 역사 해석의 다양성 확보에 관심이 많다. 사회적 소통의 수단이자 에고도큐먼트인 편지 자료를 활용해 8·15 이후 3년 동안 한국인들이 겪은 해방과 미 점령의 역사를 격주로 살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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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토요판] 정용욱의 편지로 읽는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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