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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03 13:43 수정 : 2019.08.03 14:19

[토요판] 정용욱의 편지현대사
(16) 조봉암 사신과 1차 미소공위 결렬
미군 방첩대 46년 3월 하순에
‘민전’ 인천지부 습격 과정에서
박헌영에게 쓴 조봉암 편지 탈취

찬탁·정실인사 등 공산당 지도부의
노선·활동을 내부 비판하는 사신

미군정, 공개 시점 저울질하다가
1차 미소공위 결렬 하루 전 흘려
좌익탄압 노골화, 백색테러 활개

조봉암은 1946년 3월 조선공산당 서기 박헌영에게 당의 노선과 활동 등을 비판하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품에 지니고 있다가 미군 방첩대에 빼앗겼다. 미군정은 이 편지를 한달여 지난 5월초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기 하루 전날 우익계열의 신문 4곳에 흘렸으며, 이후 좌익에 대한 탄압이 노골화됐다. 사진은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 장관에 임명된 조봉암이 첫 국무회의(1948년 8월6일)에서 발언을 하고 있는 모습. 국사편찬위 소장 자료
1946년 5월7일부터 10일 사이에 몇몇 신문에 죽산 조봉암이 조선공산당 서기 박헌영에게 보내는 서신 전문이 공개되었다. 3회로 나누어 게재할 정도로 긴 편지인데, 아래에 인용한 편지 앞 단락이 암시하듯이 두 사람 사이에서나 교환될 수 있는 내밀한 얘기를 담았고, 또 여간 친밀한 관계가 아니면 나눌 수 없는 당내 문제들에 대한 비판을 담은 사신(私信)으로서 사실은 아직 발송하지 않은 초고였다.

“내가 붓을 들어서 동무에게 편지를 쓴 것은 1926년 상해에서 동무에게 암호 편지를 쓴 것 외에 이것이 처음인 것 같소. 내가 얼마나 동무를 존경하고 또 과거 10여년간 동무가 얼마나 영웅적 사업을 계속했는가 하는 것에 대한 혁명가로서의 순정(純情)의 찬사는 아첨이라 생각할까 해서 한마디도 쓰지 않겠고 오직 동무의 꾸준한 건강과 건투를 빌 뿐이요.

내가 8·15 그날부터 오늘까지 인천에 틀어박혀서 당, 노조정치 등 모든 문제에 있어서 입을 봉하고 오직 당부의 지시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의 정열을 가지고 정성껏 해왔오.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나 자신을 위해서, 당을 위해서, 나아가서는 조선혁명을 위해서 가장 옳은 길이고 옳은 태도라고 믿는 까닭이오. 그런데 오늘 붓을 들어서 무슨 문제를 논의하고 우견(愚見)을 진술하게 된 것은 결코 이 태도가 달라져서 그런 것이 아니오.”

우익 계열 4개 신문에만 공개

‘오직 당을 사랑하고 동무를 아끼는 마음으로 아니 쓸 수 없어서 쓰는’ 이 편지는 이어서 해방 이후 공산당 지도부가 취한 노선과 활동, 그리고 당 운영방식의 문제들을 몇 가지로 나누어 비판한다. 조봉암은 크게 민족통일전선 및 대중투쟁 문제와 그 운영, 당내 인사문제로 나누어 비판을 전개했는데 전자와 관련해서는 인민위원회와 인민공화국 조직 시기의 선택과 조직방법상의 오류,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에 당 역량을 과도하게 투여한 점, 모스크바삼상회의 지지투쟁에서 나타난 오류 등을 지적했다. 후자와 관련해서는 당 간부 등용의 무원칙성과 정실적 태도 등을 비판했다. 조봉암은 공산당 재건 이후 당 활동에서 나타난 오류와 한계를 현장 활동가의 입장에서 비판했고, 편지에서 썼듯이 다른 지역 활동가들도 지적하던 문제들이었던 만큼 당 중앙으로서는 간과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조봉암은 그러한 현장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원로 당원으로서 자기가 대신 그것을 중앙에 전달하려 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편지는 자기비판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동시에 박헌영과의 오랜 인연이 전제되지 않으면 쓸 수 없는 내용으로서 노당원이 작심하고 당의 노선과 운영에 대한 비판을 직설적으로 펼쳐놓았다. 그런데 이 편지, 정확하게는 조봉암의 흉중에 담긴 생각들을 적어놓은 편지 초고가 도대체 어떻게 일간신문에 공개되었을까?

조봉암이 박헌영에게 보내려고 썼던 개인 편지가 1946년 5월 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4개 신문에 일제히 실렸다. 우익계열인 <한성일보>의 5월7일치 지면 일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이 서한 초고는 일부 내용이 개작된 채 <동아일보>, <조선일보>, <한성일보>, <대동신문>에 연재되었고, 다른 일간지들에는 실리지 않았다. 수신자가 공산당 우두머리이고, 발신자가 박헌영 못지않게 오랜 활동경력을 가진 원로 당원이긴 했지만 한 개인의 사신을 출처도 밝히지 않은 채 그것도 동시에 네 개 신문이 3회에 걸쳐 연재하는 것은 특별한 의도와 기획이 개입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매우 이례적인 편집이다.

조봉암 사신을 연재한 네 신문은 논조가 뚜렷하게 나뉘는 해방 정국에서 모두 우익 진영 신문으로 분류되었다. 특히 <대동신문>은 대표적인 극우신문으로 사장인 이종형(=이종영)은 일제 강점기에 권수정이라는 가명으로 관동군 밀정으로 활동했고 일제 말기에는 조선총독부 경무국 촉탁으로 일했다. <대동신문>은 진보진영 공격을 위해 창간되었다고 할 정도로 창간 이후 시종일관 진보적 정치세력에 대한 비난과 공격에 필봉을 휘둘렀고, 다른 한편으로 이승만의 일거수일투족을 기사화하며 그를 옹호하는 데 열을 올렸다. <한성일보>의 편집과 발행을 맡았던 이들은 양재하, 김종량, 이선근 등이었는데 모두 우익 계열 청년단체에 깊이 관여했다. <한성일보> 역시 조봉암 사신 보도에 나선 무렵부터 좌익에 대한 공세를 점차 강화했다.

<한성일보>만이 편지를 모처에서 입수했다고 언급했는데 그 모처는 미군 방첩대(CIC)였다. 방첩대 인천 지소는 1946년 3월 하순에 민전 인천지부를 습격하여 사무실에 있던 문건들을 탈취했고, 그 과정에서 조봉암이 품에 지니고 있던 이 편지도 압수했다. 조봉암은 편지가 개인 서한이므로 반환해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으나 방첩대 인천 지소는 그에 응하는 대신 이 편지를 서울에 있는 방첩대 본부로 보냈다.

입수 경위의 불법성 여부를 따지지 않는다면 편지 작성자나 수신인, 수록 내용을 놓고 볼 때 이 편지의 폭로가 조선공산당과 그 지도부에 큰 상처를 줄 수 있는 호재였을 텐데 미군정은 왜 바로 공개하지 않고 한달 반이나 미루었다가 5월7일에야 기사로 내보냈을까? 주목할 것은 편지의 공개 시점이다.

1946년 3월20일 시작한 1차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는 협의 대상 정당·사회단체 문제, 즉 반탁운동 단체를 협의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소련 측 입장과 반탁운동 단체라도 협의에 참여시켜야 한다는 미국 측 입장이 부딪혀 난관에 부닥쳤다. 그러자 소련 대표단은 4월5일 과거에 반탁운동을 했더라도 앞으로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하면 과거의 반탁 활동을 불문에 부치고 협의 대상으로 할 수 있다는 새로운 양보안을 제안함으로써 회담에 돌파구를 제공했다. 마침내 4월18일 ‘미소공위는 목적과 방법이 진실로 민주주의적이며 또한 모스크바 결정의 조선에 관한 조항의 목적을 지지하기로 선언한 조선의 민주주의 제 정당 및 사회단체들과 협의’한다는 취지의 미소공위 5호 성명을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미소공위 미국 대표단은 이미 그 전에 회담 결렬을 예상하고, 내부적 준비를 시작했다.

1946년 초 서울 덕수궁에서 열린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반탁운동을 벌인 정당·사회단체를 협의 대상으로 포함할지를 두고 대립하다가 5월 초 결국 결렬됐다. 미국 대표단은 이미 3월 하순에 결렬을 예상하는 일정표를 짰다. 그해 3월20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1차 미소공위 개회식 모습. 테이블 중앙에 서 있는 이는 미군정의 하지 사령관이며, 테이블 오른쪽은 소련 대표단, 왼쪽은 미국 대표단. 국사편찬위 소장 자료
입수한 뒤 맥아더에 급전

소련이 양보안을 제출한 바로 이튿날인 4월6일, 미국 대표단 단장이 미소공위 각 분과위원회 미국 측 대표에 협의단체 명단 작성을 준비시키는 ‘지시’와 그 부록으로 ‘일정표’를 보냈는데, 그 일정표는 5월5일에서 19일 사이에 ‘인천서신’과 비슷한 침투공작 사례들의 공개를 시작하도록 지시했다. 이 인천서신이 바로 미군 방첩대가 탈취한 조봉암 사신이다. 주한미군사령부 정보부는 조봉암 사신을 입수하자마자 3월26일 맥아더 사령부에 편지 내용을 소개하는 급전을 보냈다. 의기양양하게 공산당 지도자 박헌영을 비판하는 매우 흥미있는 서신을 탈취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전문은 조봉암의 비판 내용을 요약적으로 제시한 뒤 민전을 구성하는 좌익 정당들이 모두 공산주의자들이고, 또 이북의 공산당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정보당국의 의심을 확증해준다고 결론지었다.

미군정 내부문서들에 따르면 점령당국은 이 편지를 입수한 뒤 미소공위의 경과를 예의주시하면서 그 활용 시점을 저울질했고, 미소공위가 정회되기 바로 전날 남한 신문들을 이용해서 이 서한을 공개했다.

조봉암 사신이 신문에 연재되는 동안 미소공위 휴회,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여운형 동생 여운홍의 인민당 탈당과 사회민주당 창당이 연이어 발표되었다. 5호 성명 발표 이후 반탁단체가 대거 협의를 신청하고, 미국이 협의에 참여한 단체들에 ‘의사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계속 고집하자 소련 측 수석대표 스티코프는 5월8일 하지에게 대표단의 철수를 통고했고, 1차 미소공위는 회의 개최 50여일 만에 양측의 입장 차이만 확인한 채 막을 내렸다. 경찰은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를 인쇄하던 정판사에서 위조지폐가 발견되었다며 공산당 간부와 관련자들을 검거했는데, 피검자들은 시종일관 이 사건이 조작이라고 주장했다. 여운홍의 사회민주당 창당은 여운형을 좌익으로부터 ‘튕겨 나오게 하기 위한’ 미군정의 공작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조봉암 사신도 그렇고 이 일련의 사안들이 좌익을 분열시키고 공산당 지도부의 권위를 실추시켜서 그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뚜렷한 정치적 의도와 목표를 가지고 전개되었다. 이 사안들은 미군정이 미소공위 휴회의 책임을 소련과 좌익에 전가하는 데에도 일정하게 기여했을 것이다. 미소공위 휴회를 계기로 이후 미군정은 좌익 탄압을 한층 조직적이고 노골적으로 전개했다. 박헌영 등 공산당 지도부는 공개적 활동을 점차 줄일 수밖에 없었고, 서울 등 도시에서는 미군정과 경찰, 우익 청년단체의 지원하에 정회(町會)의 주도권을 과거 일제 강점기에 정회를 주도했던 세력이 다시 가져갔으며, 농촌에서는 미군과 경찰이 하곡 수집을 저지하려는 농민들의 투쟁을 강제적으로 진압해갔다.

미소공위 휴회는 미소공위 성사를 통한 정부 수립을 갈망하던 한국인들에게 커다란 실망감과 불안감을 안겨주었으나 그 직접적인 반향은 좌익과 언론에 대한 우익 청년단체의 공격과 단독정부 수립 논의의 점화로 나타났다. 미소공위가 휴회한 뒤 5월12일 독립촉성국민회 주최로 서울운동장에서 독립전취국민대회가 열렸는데 대회가 끝난 뒤 우익 청년단체 회원들이 트럭 몇 대에 분승하여 조선공산당, 인민당, 민전, 전평 등의 정당, 단체들과 <조선인민보>, <중앙신문>, <자유신문> 본사를 습격했다. 1월 이후 주춤하던 테러행위가 백주 대낮에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신문사들까지 습격하여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 한 행위는 사회적으로 비판 여론을 비등시켰고, 러치 군정장관이 나서서 재발 방지를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주한미군사령부 정보부는 조봉암 편지를 입수한 직후 도쿄에 있는 맥아더 사령부에 편지 내용을 소개하는 급전을 보냈다. 이 전보에서 주한미군사령부는 조봉암이 쓴 조선공산당에 대한 내부 비판 내용을 요약한 뒤 조선공산당이 이북의 공산당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고 말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미소공위 휴회는 다른 한편 언론과 우익 진영 정치인들의 입을 통해 단독정부 수립 논의를 불러일으켰고, 하지의 정치고문 랭던은 본국에 보낸 <5월 전반기 한국 정세 보고>에서 “미소공위 결렬 이후 단정 수립 가능성이 여론의 광범한 토론 주제가 되었다”고 적고 있다.

‘단독정부 예상’ 15%에 불과했지만

미소공위 휴회 직후인 5월10일과 11일에 미군정 공보부는 서울에서 미소공위 정회에 어느 쪽이 더 책임이 큰지, 이 일이 향후 한국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가두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결과가 흥미롭다. 전자에 대해서는 70% 가까이가 소련의 책임이 더 크다고 응답한 반면에 후자에 대해서는 52% 정도가 정치인들을 반성하게 만들 것이고, 좌익 계열 정당과 우익 계열 정당을 통합하게 만들 것이라고 응답했다. 남과 북에 미국과 소련에 의해 단독정부가 들어설 것이라고 응답한 비율은 15% 정도였다.

미소공위 휴회 이후 한국 사회가 보여준 반응은 이른바 해방정국이라는 소우주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한반도를 점령한 두 강대국은 그들 간의 대립과 갈등을 한국 정부 수립을 둘러싼 방법론과 철학의 차이라고 포장했지만, 그 갈등은 언론을 동원한 공작을 통해서 한국 사회에 관철되었고, 또 그것은 한국 사회에 폭력 사태와 여론전을 몰고 왔다. 미군정 공보기구는 그 결과를 여론조사로 계측했고, 사령관의 정치고문은 덤덤하게 단독정부 수립 가능성이 여론의 토론 주제가 되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조봉암의 사신 폭로로 시작된 1946년 5월은 미군정 고위층과 공작원, 한국인 정치인들과 정당·단체들, 기자들이 민중을 둘러싸고 흑막 뒤에서 은밀한 언사를 나누거나 또는 백주 대낮에 노골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옴니버스와 피카레스크를 종합한 한편의 희비극을 보여준다. 그리고 6월 이후 한국 사회의 화두는 좌우합작이다.

정용욱 :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한국 현대사 전공. 사료의 확대를 통한 역사 서술 주체의 확장, 역사 해석의 다양성 확보에 관심이 많다. 사회적 소통의 수단이자 에고도큐먼트인 편지 자료를 활용해 8·15 이후 3년 동안 한국인들이 겪은 해방과 미 점령의 역사를 격주로 살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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