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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02 06:01 수정 : 2019.08.02 21:13

윤비의 이미지에 숨은 정치
⑫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 세상의 지배자(1)

포르투나는 한 손에는 값비싼 승리의 트로피를, 다른 한 손에는 온갖 속박과 징벌의 도구들을 들고 있다. 포르투나는 인간의 물질적 부와 행운을 관장한다. 인간이 개인으로든 집단으로든 이룬 물질적 성공은 결국 포르투나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포르투나는 인간의 물질적 성취를 상징하는 도시 위에 지배자처럼 올라서 있다.

우리는 정치가 윤리적 기준에 부합하기를 원한다. 정의로운 자는 명예와 부를 얻고 행복에 도달하기 바란다. 불의한 자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무엇이 정의이고 불의인가에 대해서는 시대와 문화마다 차이가 존재하지만 적어도 정치가 이러한 인과응보의 원칙을 구현하여야 한다고 보는 데는 별 차이가 없다. 물론 그러한 이상을 완벽히 실현한 사회는 존재한 일이 없으며, 어떤 사회는 그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 안에 사는 사람들뿐 아니라 보는 사람들에게도 절망과 분노를 자아낸다. 그러한 절망과 분노가 임계점에 도달하고 특정한 조건을 만나면 분출하는 것이 혁명이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현대인만 느낀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근대가 등장하기 이전 인간사회에는 속박과 불평등이 훨씬 더 만연해 있었다. 그다지 정의롭지도 평등하지도 않은 법조차 특권을 갖지 못한 채 태어난 이들에게는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고, 그럴수록 폭력은 일상이 되었다. 지금보다 삶은 훨씬 더 고통스러웠으며 종교 경전에 쓰인 신의 정의는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독일에서 함께 가르치던 동료들과 ‘만일 타임머신이 있다면 중세나 르네상스 때로 돌아가 살겠는가’라는 질문을 두고 장난처럼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이 있다. 그때 한 친구가 한 대답이 기억난다. “제정신인 사람이 왜 그런 시대로 돌아가겠어?”)

세상이 불의해 보일 때 사람들은 허무주의에 빠지곤 한다. 뿌리까지 불의한 세상에는 법도 윤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사가 악한 자들의 간계와 이를 돕는 어떤 눈먼 힘에 지배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의 마지막 부분인 제25장에서 바로 이런 동시대인들의 생각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키아벨리가 보기에 많은 사람들이 세상사가 신과 더불어 운명에 지배되기 때문에 굳이 무엇인가를 이루어보려고 애쓰기보다는 만사를 요행에 던져놓는 편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키아벨리 자신은 그렇게 믿지 않았다. 그는 인간에게 여전히 자유의지를 통해 삶을 능동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며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운명이라는 것도 우리가 제대로 대비한다면 어느 정도는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마키아벨리는 운명의 여신, 즉 포르투나(fortuna)를 길들이는 법이라는 메타포를 써서 설명한다.

마키아벨리에 의하면 포르투나는 강이다. 평소에는 잠잠히 흐르다가 갑자기 범람해 모든 것을 쓸어가버린다. 강을 다스리는 법은 모두가 알고 있다. 평소에 둑을 쌓으면 홍수를 막고 불어난 강물을 원하는 곳으로 흘려보낼 수 있다. 현명한 정치가도 마찬가지로 행동해야 한다. 즉 평소에 차근히 여러 사태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미리 조치를 취함으로써 자신과 피치자의 삶과 공동체의 미래를 통제해야 한다. 또한 마키아벨리에 의하면 포르투나는 여성이다. (여기서 독자들은 마키아벨리가 살았던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마초담론의 정수를 보게 된다. 이해를 부탁한다.) 마키아벨리는 여성은 젊고 강하며 거친 남자에게 끌리기 마련이라고 봤다. 따라서 지나치게 신중하기보다는 과단성 있는 정책을 채택하고 단호하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라는 메타포는 마키아벨리의 발명이 아니다. 포르투나라는 여신이 인간의 상상력에 들어온 것은 고대이며 그 뿌리는 그리스에까지 닿아 있다. 고대 이교의 여신에서 비롯된 포르투나라는 메타포를 사용한다는 것이 기독교에 대한 믿음에 어떤 균열이 일어났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포르투나라는 메타포는 고대 이교의 세계가 무너진 뒤에도 철학과 문학의 메타포로서 사랑받았다.

그림 1. 포르투나의 바퀴, ‘코덱스 부라누스’(Codex Buranus), 1230년께. 바이에른주립도서관 소장
그림 1은 <카르미나 부라나>(Carmina Burana)라는 중세 시가집에 실린 삽화이다. 커다란 바퀴의 한가운데 왕관을 쓴 인물이 앉아 바퀴를 돌리고 있다. 운명의 여신 포르투나이다. 바퀴 주변으로 네 인물이 보인다. 포르투나의 오른손 쪽 인물은 바퀴의 움직임을 따라 위로 올라가고 있다. 그 옆에는 “나는 지배할 것이다”(regnabo)라고 쓰여 있다. 바퀴의 정상에는 왕홀을 들고 왕좌에 앉은 군주가 보인다. 그를 따르는 글귀는 “나는 지배하고 있다”(regno)이다. 포르투나의 왼손에는 더불어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인물이 그려져 있다. 그의 머리에서 떨어지는 왕관은 “나는 지배하였다”(regnavi)라는 글귀와 일치한다. 마지막으로 포르투나의 발 아래쪽에는 바퀴의 아래에 짓눌려 있는 인물이 있다. 그를 설명하는 글귀는 “나의 왕국은 없다”(sum sine regno).

<카르미나 부라나>는 바이에른 지방의 베네딕트보이에른 수도원에서 1803년 발견된 중세 시가집이다. 도덕적 교훈을 담은 노래로부터 연가나 술집에서 부르던 노래까지 다양한 중세의 곡들을 모아놓은 이 작품에서 ‘오, 포르투나’라는 이름이 붙은 노래는 특히 유명하다. 독일의 작곡가 카를 오르프는 1937년 <카르미나 부라나>에서 몇 곡을 뽑아 같은 이름의 칸타타를 작곡하였다. ‘운명의 여신이여’는 그 첫 곡인 ‘세계의 지배자, 포르투나’(Fortuna, imperatrix mundi)의 앞부분이다. 워낙 잘 알려진 곡이라 강의시간에 학생들에게 들려주면 대부분은 이미 들어보았다고 이야기한다. 첫 소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오, 포르투나여. 그대는 마치 달처럼 변하는구나. 언제나 떠오르고 이지러진다네.”(O Fortuna, velut luna, statu variabilis, semper crescis, aut decrescis.) 곡의 내용은 염세적이다. 이어지는 부분은 권력을 단숨에 무로 돌리는가 하면 가난뱅이를 순식간에 이유없이 거부로 만들어버리는 포르투나의 힘과 장난스러움을 노래한다. 포르투나는 끝없이 돌아가는 수레바퀴이며 그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어떤 열망도 노력도 덧없다. ‘오, 포르투나’의 마지막 소절은 “나와 더불어 모두 탄식하세”(mecum omnes plangite)로 맺는다.

그림 2. 보니파초 벰보, ‘포르투나의 바퀴’, 비스콘티-스포르차 타로카드, 15세기 중반.
‘오, 포르투나’에 그려진 인간의 삶과 운명에 대한 생각은 그림 1의 내용에 대한 주석과도 같다. 이 노래를 중세의 사람들이 어떤 느낌과 생각을 가지고 불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어차피 애를 써봐도 잡을 수 없는 권력이나 부와 같은 세속의 가치에 얽매이지 말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고, 혹은 정말로 인생은 빌어먹을 곳이라는 한탄에 젖었을 수도 있다. 여하튼 포르투나는 매우 인기있는 문학적·예술적 주제였다. 포르투나가 얼마나 인기있는 주제였는지 보여주는 여러 자료 중에는 15세기 중반 밀라노에서 제작된 비스콘티-스포르차(Visconti-Sforza)의 타로카드에 그려진 포르투나의 모습이 있다.(그림 2) 보니파초 벰보(Bonifacio Bembo)의 작품으로 알려진 이 그림은 앞서 그림 1과 마찬가지로 한 인물의 인생유전을 포르투나의 바퀴 주변에 묘사하고 있다. 특이한 점이라면 포르투나가 눈을 가리고 있다는 것이다. 비슷한 예들은 포르투나를 묘사한 중세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그 의미는 명확하다. 행운의 여신은 전혀 가치가 없는 자들을 부자로 만들고 권력자로 올려세운다. 그녀는 눈이 멀었거나 제대로 앞을 보지 못한다.

그림 3. 알브레히트 뒤러, ‘네메시스’, 1500년께.
알브레히트 뒤러가 1500년 전후에 제작한 판화 ‘네메시스’에 그려진 포르투나는 이 여신에 대한 상상력의 가장 화려한 형상화다(그림 3). 포르투나는 한 손에는 값비싼 승리의 트로피를, 다른 한 손에는 온갖 속박과 징벌의 도구들을 들고 있다. 포르투나는 인간의 물질적 부와 행운을 관장한다. 인간이 개인으로든 집단으로든 이룬 물질적 성공은 결국 포르투나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포르투나는 인간의 물질적 성취를 상징하는 도시 위에 지배자처럼 올라서 있다. 포르투나의 지배는 이 세계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래서 포르투나는 나이 든 여인이다. 그럼에도 포르투나는 마치 아이를 가진 여인처럼 배가 부르다. 포르투나는 풍요를 관장하기 때문이다. 포르투나는 날개를 달고 있다. 포르투나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손쉽게 옮겨다니며 총애의 대상을 바꾼다. 포르투나의 거의 수평으로 날리는 옷자락 역시 그녀가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마치 바람처럼 옮겨다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행운이 극에 달한 순간에조차 포르투나를 너무 믿어서는 안 된다. 포르투나가 언제 변덕을 부려 떠나버릴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런 만큼 포르투나는 지극히 불안정하고 가변적인 존재이다. 포르투나를 공 위에 올라선 존재로 그린 것은 그 때문이다. 구르는 공 위에서 누구도 가만히 서 있지 못하고 위뚝비뚝거리기 마련이다. 눈여겨볼 부분은 포르투나의 헤어스타일이다. 포르투나의 선물은 모두가 탐내는 것이다. 모두가 달아나는 포르투나를 붙들어 자신의 곁에 매어두고 싶어한다. 그래서 포르투나는 달아나는 자신의 머리끄덩이를 누군가 뒤에서 잡아채거나 혹은 앞에서 움켜쥐지 못하도록 머리를 칭칭 동여매고 있다. 종종 포르투나는 아예 앞머리를 밀어버린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하는데 그 역시 같은 이유이다.

포르투나에 대한 이야기는 한 회에 마치기 힘들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 그만큼 그 행복이 불공정하게 분배되는 것에 예민하다. 고대에도 중세에도 르네상스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불공정한 분배의 상징이 포르투나였다. 그만큼 포르투나에 얽힌 이야기도 많다. 다음 회에 계속 이어간다.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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