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강인욱의 테라 인코그니타
⑪일본민족의 북방기원설
일본은 자신들의 이웃을 때로는 변방으로 때로는 기원지로 보면서 자신들의 침략을 합리화했다. 최근까지도 나타나는 주변 국가를 필요 이상으로 비하하는 발언의 배경에는 자신의 수천년 이웃을 식민지로 만들어버렸던 일본 제국주의의 역사가 있다. 이런 일본의 자기모순적 역사관이 오늘날 주변 국가를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이 다른 나라와 다르게 한국을 대해온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비슷한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 주변국을 대하는 태도에 변함이 없는 독일과 비교해보면 일본의 자세는 더욱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일본은 미국과 서구 국가엔 지나칠 정도로 저자세면서, 피해 당사자인 한국과 중국에는 극도의 반감과 혐오감을 표시한다.
이런 일본의 모순적인 태도 이면에는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과 문화재 침탈 사업이 있었다. 일본은 자신들을 대륙에서 내려온 천손민족이라고 자처해왔다.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건 곧 자신들의 ‘고향’을 식민지로 만든 셈이었다. 일본은 한국을 넘어 만주를 거쳐 중국을 침략하면서 일본민족의 북방기원설로 이를 정당화해왔다. 일본은 한반도를 자신들의 고향이자 동시에 열등한 식민통치의 대상으로 봤다. 지난 100여년에 얽힌 일본인의 왜곡된 한국관은 이런 자기모순적 역사관의 산물이다.
고인돌에 묻힌 일본의 ‘인디애나 존스’
영화 <인디애나 존스>의 배경인 20세기 초반은 제국주의가 경쟁적으로 세계 각국의 문화재를 약탈하던 시기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던 일본도 그런 제국주의 고고학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일본은 한국을 정식으로 침탈하기 훨씬 전인 1899년부터 한국의 문화재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원래 일본의 한반도 조사 목적은 일본인의 기원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에 활동하던 대표적인 학자가 도쿄대 인류학교실의 도리이 류조(鳥居龍藏·1870~1953)다. 일본에서도 시골이었던 시코쿠 도쿠시마현 출신인 그는 정규 학교를 제대로 다녀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도쿄대 인류학교실의 교수가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의 성공 비결은 바로 일본 군국주의에 적극적으로 부응한 데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그는 청일전쟁의 전쟁터였던 랴오둥반도를 비롯하여 대만, 오키나와, 심지어 시베리아까지 사방으로 무자비하게 진출하던 일본군을 따라다녔다. 도리이는 각 지역의 원주민을 조사하여 열등한 집단과 우월한 집단을 구분하고 그 안에서 대륙을 건너온 일본인의 기원을 찾고자 했다. 일본이 섬을 벗어나 대륙 각지를 차지하는 데에 국민적인 흥분이 고조됐던 당시였기에 그의 자료는 크게 주목받았다. 도리이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자마자 1910년 조선총독부의 사이토 총독을 만나서 한국에서 일본민족의 기원을 찾는 조사를 도와달라고 설득했다. 그의 6년에 걸친 한반도 조사가 이렇게 시작됐다.
그가 한국에서 주목한 것은 함경도 지역의 석기와 한반도 전역에 분포한 고인돌이었다. 함경도 석기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시 한국에서 살던 ‘미개한’ 토착 한국인을 찾기 위해서였다. 반면 고인돌에 주목한 이유는 미개한 토착 한국인들 사이에 살았던 ‘위대한’ 일본인의 조상을 발견하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도리이는 영국의 스톤헨지와 유사한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은 미개한 토착 한국인과 다르리라고 생각했다. 한반도의 고인돌이 일본 규슈 일대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에 고인돌을 추적하면 위대한 일본인의 루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본군 헌병들과 함께 랴오둥반도의 유적을 조사하는 도리이 류조(오른쪽). 강인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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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의 요청으로 한국을 조사하기 위하여 온 도리이 류조(서 있는 사람)와 그 일행. 뒤에 있는 건물은 경복궁 근정전이다. 강인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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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주의 고고학자인 도리이 류조는 일본민족의 기원이 북방에 있다는 자신의 이론에 따라 그의 고향 도쿠시마에 북방식 고인돌 형태로 만들어진 무덤에 묻혔다. 강인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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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일본인들이 일본 원주민인 ‘고로봇쿠루’를 상상해서 그린 그림. 일본인은 자신들을 천손민족으로 강조하기 위하여 원주민을 미개한 모습으로 그렸다. 강인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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