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9.07.05 06:01 수정 : 2019.07.05 19:41

[책과 생각] 이현우의 언어의 경계에서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필립 로스 지음, 김한영 옮김/문학동네(2013)

“모든 사람은 우울에 빠지는 성향을 타고나지만, 일부만이 우울을 습관화한다.” 우리에게는 아직 완역본이 나오지 않은, 17세기 영국 목사 로버트 버턴의 저작 <우울의 해부>(1624)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런데 우울의 습관화는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버턴은 답하고 있지 않지만 미국 작가 필립 로스는 장편소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1998)에서 나름의 견해를 제시한다. 정확하게는 소설의 화자 네이선 주커먼에게 그의 고등학교 은사 머리 린골드가 들려주는 견해다. 정답은 배신이라는 것. 즉 인간은 배신을 당하면 소질로만 갖고 있던 우울을 습관화한다.

거창하게 보자면 인류의 역사가 배신으로 점철된 역사라고 머리는 말한다. 성서에서 예를 찾자면 배신당한 아담부터 배신당한 요셉과 삼손, 배신당한 다윗과 배신당한 욥까지. 그리고 인간들에게 끊임없이 배신당한 하느님까지.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의 주제 역시 배신이다. 머리 린골드가 공산주의자 동생 아이라 린골드의 삶을 회고하는 소설에서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1946년에서 1956년 사이로 미국 현대사에서 배신행위가 휩쓴 시대다. 매카시즘의 광기가 횡행했던 이 시기는 가히 ‘배신의 시대’라고 불림 직한데, “그 시대에 배신은 미국인이면 아무 데서나 저질러도 되는 용인된 위반”이었다. 배신의 쾌감이 금지를 대신하고, 배신을 저지르고도 도덕적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지난해 5월 사망한 미국 소설가 필립 로스. 한겨레 자료 사진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에 광산 광부와 레코드공장 노동자로 밑바닥생활을 하던 아이라 린골드는 노조 행사에서 링컨을 연기하며 인생의 전기를 맞는다. 링컨의 연설들을 감동적으로 낭독한 덕분에 라디오 드라마의 주역이 되고 ‘아이언 린’(강철의 린골드)으로 불리며 대중의 스타로 부상한다. 아이라는 자신이 연기한 영웅들을 몸에 익히고 대중은 그를 영웅의 화신으로 믿었다. 그런 아이라에게 세 번 이혼하고 사십대에 접어든 여배우 이브 프레임이 반한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의 사랑을 잃은 아이라 역시 이브의 모성적인 면과 불행한 개인사에 끌려 그녀와 결혼한다.

하지만 열정적인 공산주의자와 스타 여배우의 결합은 이미 모순과 충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개방적인 성격과 공산당의 비밀주의. 가정생활과 당”은 양립하기 어려운데다가 아이라는 자식에 대한 갈망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이브에게는 앞선 결혼에서 낳은 딸이 있었다. 그녀의 딸 실피드는 이브의 배우 생활과 연이은 결혼 때문에 상처를 입고 어머니에게 욕설과 폭력을 서슴지 않는 아이로 성장했다. 이브는 아이라의 아이를 임신하지만 실피드의 강요에 따라 낙태하게 되고 부부관계는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급기야는 딸에 대한 맹목적인 애정 때문에 그녀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이브는 남편을 배신하고 아이라의 공산주의자 전력을 폭로하는 책을 발표하기까지 한다. 그 제목이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이다.

이브의 폭로로 아이라는 노동계급의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처지에 이른다. 그렇지만 형 머리가 들려주는 동생 아이라의 또 다른 진실은 그가 열여섯 살에 저지른 살인이었다. 아이라의 인생은 ‘냉혹한 살인자 아이라’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였다. 광산에서 공장에서, 그리고 성우 연기와 민중선동에서, 프롤레타리아 생활과 부르주아 생활에서, 결혼과 간통에서, 흉포한 행동과 예의바른 사교생활 어디에서도 동생은 자신의 삶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 형의 평가다. 결국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는 이브의 폭로도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갈망한 남자”와 결혼한 것이기에 그렇다. 여기까지 읽어온 독자라면 필립 로스가 붙인 제목에서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겠다.

서평가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이현우의 언어의 경계에서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