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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7.24 20:07 수정 : 2019.07.24 20:23

박상영의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신인 작가 한국에선 생존 쉽지 않아
두 번째 책 낸 나도 마찬가지

등단 전 박완서 신경숙 책 위로돼
나만의 소외감 책 통해 이겨내

동료들 “그냥 네 말투로 써봐. ”
글쓰기는 일종의 존재증명

한국에서 작가로 살아남기는 쉽지 않다. 매년 여러 신인상이나, 신춘문예, 인터넷 공모 등 다양한 루트를 통해 수많은 신인이 쏟아지는데 그중에서 정식으로 책이 출간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매 작품 냉엄한 평가를 받는 것은 기본이거니와, 특히 나 같은 신인에게는 매 기회가 거의 마지막이나 다름이 없으며, 이 때문에 첫 책을 낼 때까지 거절은 감히 꿈꿀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간신히 첫 책을 낸다고 해서 사정이 나아지는 것도 또 아니다. (어느 업계가 그렇지 않겠냐만은) 인지도가 있거나 비교적 자리를 잡은 작가의 경우 비교적 쉽게 마케팅을 할 수 있다면 이름값이 한없이 0에 가까운 신인작가는 정말이지 눈물겨운 노력으로 온갖 노력을 다해 책을 알려야 한다. 아주 작은 홍보의 기회라도 아쉬운 것이 대한민국 신인작가의 현실이다.

운 좋게 두 번째 책을 낸 나의 경우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은 건 마찬가지라 책을 내고 기꺼이 (혹은 어쩔 수 없이?) 여러 독자와의 만남과, 인터뷰, 북 토크 행사에 전방위로 참여하게 되었다. 사실 작가에게 물을 수 있는 질문이란 한정적이기 마련이라 매번 비슷한 질문에 돌림 노래처럼 대답을 하기 마련인데 그중에서 가장 압도적으로 많이 듣는 질문이 있다.

처음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왜 소설가가 되셨나요?

사실은 가장 일반적이고도 평범한 질문임에도 나는 매번 그 질문 앞에서 약간은 아연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하는데, 사실 내가 기억하기 전부터 나는 막연히 글쓰기를 좋아해 왔으며, 뭐 어떤 특별한 계기로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예 계기가 없던 것은 아니라 구태여 꼽자면 몇 가지 일화들이 있기는 하다. 일단 어릴 적부터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이나 <해리 포터>와 같은 책들을 항상 끼고 살았으며, 못 말리는 독서광이었던 것도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다른 글이 아닌 굳이 ‘소설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던 것은 글쎄 그것이 내게 가장 적합한 방식이어서가 아닐까? 오히려 살면서 천천히 작가라는 삶의 궤적으로 인생이 기울었다고 표현하는 쪽이 좋을 것이다.

태어나서 가장 먼저 읽었던 현대 소설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는데, 그것은 박완서 작가의 <아주 오래된 농담>이었다. 현실을, 가장 현실에 가까운 농도로 재현한 그녀의 소설을 보며 뭔가 굉장히 매력적인 소설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뒤로 한국 현대 소설의 매력에 푹 빠져 여러 작가를 따라 읽기 시작했다.

당시 지방에 살며 고향 탈출(과 가정 탈출)을 지상 과제로 삼고 있었던 나는, 수시 전형이 시작되자마자 서울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대학에 원서를 냈었다. 대학별 고사를 치르기 위해 서울에 홀로 올라가 하숙집에 살면서 읽었던 책 중 하나가 신경숙 작가의 <외딴방>이라는 소설이었다. 정읍에서 올라와 구로 공단 근처의 외딴 방에 살며 낮에는 직공으로 저녁에는 산업체 학급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그녀의 외로운 궤적을 보며, 십대이며 홀로 서울에 올라와 있던 내가 감정이입을 하지 않기가 오히려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일생을 세상의 주변부만 훑고 있는 것 같은 감각으로부터, 아무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는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으며 일종의 위안, 같은 것을 받았던 것 같다.

무사히 대학을 진학하고 난 후에도 나의 그런 ‘소외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강도와 종류를 달리해 계속 지속되었을 뿐이었다. 사람들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왁자지껄 떠들고 나서 집에 들어오면 이유 없는 후회와 공허감이 찾아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좁은 자취방에 앉아 책을 읽곤 했으며 그 순간만큼은 ‘나 자신’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문사나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아카데미에 소설 창작 수업을 들으러 가면서도, 철마다 찾아오는 신춘문예나 문예지 공모에 소설을 투고하면서도 딱히 작가가 될 것이라는 자의식이나 대단한 희망 같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그저 젊은 시절 내가 시도해볼 수 있는 많은 직업의 선택지 중 하나 정도로 ‘작가’를 인식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게 된 것은, 첫 번째 직장을 다닐 무렵이었다. 당시 한 잡지사에 근무했던 나는 직장 내 ‘갈굼’ 문화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타인의 생각을 받아 적는 것이 아닌, 나를 표현하는 글을 쓰고 싶다는 의지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바쁜 시간을 쪼개 문학과 지성사에서 운영하는 문지문화원의 소설 창작 아카데미에 등록했고 그곳에서 왠지 나와 코드가 잘 맞아 보이는, 내 또래의 한 여자를 만났다. 그것은 바로 (지금은 작가가 된) 김세희. 김세희와 나는 수업이 끝나고도 ‘로열 노래방’이라는 스터디 그룹을 함께 결성했고 1주일에 한 권씩 책을 읽으며, 한 달에 한두 편씩 80매짜리 단편 소설을 쓰며 투지를 불태웠다. (생산력과 투지만 엄청났던 시절이었다.) 당시 김세희는 20대 커플이 겪는 여러 일을 썼고, 나는 직장 생활의 분노와 퀴어 소재의 소설들을 주로 썼다. 당시 우리가 썼던 소설은 별 볼 일 없었지만 진정성(이라는 것이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것이 있다면 한없이 가까운 것)이 가득했던 것 같다. 어쩌면 한없이 우리 자신의 모습과 가까운 그런 형태의 글들. 그때 우리는 글쓰기를 통해 단순히 세상에 없는 어떤 픽션들을 창조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던 어떤 문제들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구했던 것 같다. 그렇게 어느 순간 소설 쓰기의 매력에 흠뻑 빠져버린 나는 결국 정신을 차린 순간 첫 번째 직장을 그만두고, 동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에 가게 되었고, 김세희의 경우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과정에 진학하게 되었다. 내 경우는 이번 기회가 아니면, 그러니까 2년의 시간 동안 아무 성과가 없다면 미련 없이 글쓰기를 포기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대학원까지 진학하고 나니 더는 갈 곳이 없어져 버린 (?) 나는 역시나 뜻이 맞는 친구들과 만나 스터디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이미 등단한 상태였던 강화길과 송지현, 임승훈 등이 그때 나의 글동무가 되어주었다. (충무로 근처에 족발이 유명하다는 이유로 ‘황금족발비밀결사대’, 줄여서 ‘황족비결’이라는 이름을 내가 지었다.) 우리는 모두 첫 번째 책을 준비하고 있는 ’신인 (특히나 내 경우는 그 어떤 계약이나 문학상을 수상한 적이 없으므로 자칭) 작가’이었으며 역시나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당대에 발표되는 단편 소설을 모두 모아 읽거나 추리 소설과 스릴러, 온갖 종류의 장편 소설을 읽으며 맹렬히 자신만의 성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당시의 나는 데뷔를 위해, 내 책을 가진 작가가 되기 위해 당대에 유행하는 기법과 주제를 분석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일종의, 남에게 인정받기 위한 글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문학상과 신춘문예에 투고했던 나는, 약 3년의 시간 동안 (과장이 아니라 산술적으로) 50번도 넘게 고배를 마셨고, 누구보다도 풍족한 소설 재고와 그만큼의 절망감을 가진 한심하고 모자란 취업준비생이 되어 있었다. 그동안 동료였던 김세희가 먼저 등단을 했으며, 역시나 함께 공부했던 강화길은 첫 번째 책을 냈으며 젊은 작가상을 수상하는 등의 성과를 이뤄냈다. 나는 밀린 카드 값을 갚기 위해 작은 회사에 취직을 했고, 이제 정말 미련을 버려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던 찰나였다. 당시 힘겨워하던 내게 동료였던 송지현과 강화길이 해주었던 말이 있다.

“너는 평소에 말할 땐 참 웃기는데 이상하게 글 쓰면 진지해지는 것 같아. 그냥 네 말투로 써봐. 너답게.”

나는 마치 드라마 주인공이 된 것처럼 ‘도대체 나다운 게 뭔데’라는 질문에 사로잡혀 이전과는 다른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의 말투로 당시에 내게 가장 중요했던 문제를, 마치 현실에 일어날 법한 사건으로 재구성해 소설이라는 장르로 묶어본 것이었다. 어쩌면 에세이에 한없이 가까운, 이를테면 한없이 나 자신에 가까운 방식의 그런 글을. 그리고 나는 실로 오랜만에 해방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남을 바라보며,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시작했던 활동이라고 생각했던 글쓰기가 실은 한 없이 나 자신을 향해 나 있던 길이었던 것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때 썼던 두 편의 소설을 문학동네 신인상에 투고했고, 나는 그토록 바라던 작가가 되었다. (마치 거짓말처럼!) 그리고 지난 3년 동안 나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관차처럼 정말 미친 듯이 앞으로 달렸다. 달리기만 했다.

앞선 질문과 더불어 요즘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회사를 다니시면서 어떻게 소설을 두 권이나 쓰셨나요?”이다. 그런 질문을 들을 때마다 나 역시도 어떻게 그런 일들이 가능했는지 모르겠다고 (약간 겸손한 표정으로) 대답하곤 했지만, 실은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글쓰기도 했다는 말은 어쩌면 조금 틀린 말일 수도 있다. 글을 쓰는 행위 자체는 회사 생활의 다른 모든 업무와 다를 바 없는 ‘노동’이지만, 실은 나는 글쓰기를 통해 일종의 존재증명을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없이 소모적이고 남의 일을 해주고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내 목소리로 나만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는 그 감각이, 수면 장애를 앓으며 쪽잠을 자면서도 계속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나의 현실을 버티게 만들었다.

얼마 전 나의 친구 송지현이 (그녀 특유의 완벽주의적 성향과 게으름 탓에 이제야) 첫 번째 소설집 <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를 냈다. 그 소설집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이런 걸 성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바삭하고 건조해지는 것 말이야.”

어쩌면 나는 한없이 바삭하고 건조해지는 길을 걸으며 나 자신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것을 일종의 성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글 박상영(작가), 일러스트 윤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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