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올림픽’이 끝나고 태어났다. 스무살이 되던 해, 실력만 있으면 유리천장쯤은 부술 수 있다는 ‘알파걸’이 등장했다. 서른이 되자 직장에선 자책감을, 가정에선 죄책감을 느끼는 ‘슈퍼우먼’ 선배들이 보였다. 여성의 생존과 성공에 대한 서사는 늘었지만, 우리가 딛고 서 있는 판의 기울기는 변함이 없었다. 이 판 자체에 균열을 내는 방법은 없을까. ‘알파걸’도 ‘슈퍼우먼’도 주지 못한 답을 찾고 싶어, 또래 여성들을 만나러 나섰다.
지난 1월 30일 일산 강선초등학교에서 만난 초등젠더교육연구회 김수진 교사(왼쪽)와 황고운 교사. 사진 황금비 기자
해답은 교육에 있었다.
‘미투’ 운동의 물결은 세계 최고 성평등 국가로 꼽히는 스웨덴도 피해가지 못했지만, 정부와 사회가 적극 나서 ‘미투’에 대응하는 모습은 “역시 스웨덴”이란 인식을 다시금 확인시켜줬다. 변화의 핵심은 지지를 표명한 남성들의 존재였다. 백래시(반격)가 일부 있었지만, ‘미투’를 부조리한 구조의 문제로 인식하고 함께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스웨덴 문화예술계의 ‘미투’ 운동을 이끈 배우 수산나 딜베르는 이런 연대가 가능했던 이유로 “유치원 때부터 시작하는 젠더 교육”을 꼽았다. ‘소년다움’ 또는 ‘소녀다움’에서 벗어나는 것, 성별과 무관하게 모든 어린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 “교육의 핵심이자 어른들의 의무”라고 딜베르는 강조했다.
한국에서 젠더 교육을 하는 건 녹록지 않은 일이다. 초등학교 교사인 ‘마중물샘’이 언론 인터뷰에서 “왜 여자아이들은 운동장을 갖지 못하나” “페미니즘은 인권의 문제”란 발언을 했다가 누리꾼과 보수단체로부터 온갖 비난과 신상털기에 시달렸던 것이 불과 2년 전 일이다. 초등젠더교육연구회 ‘아웃박스’와의 만남이 더 조심스러웠던 이유다. 하지만 지난 1월 30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 강선초등학교에서 만난 황고운(32)·김수진(29)교사는 ‘악플’을 걱정하지 않냐는 물음에 유쾌하게 답했다. “악플은 관심”이고 “누군가 싫어한다고 주저할 거였으면 아예 안 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고정관념을 깬다’(think outside of the box)는 뜻에서 따온 ‘아웃박스’는 2016년 일산의 초등학교 선생님 5명이 모여 책을 읽자며 시작된 모임이다. 모임에서 읽은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저)란 책이 전환점이 됐다. 이 책은 스웨덴의 성평등 교육 교재이기도 하다. “나이지리아 출신 40대 흑인 여성이 쓴 책인데 공통점이라곤 여성밖에 없는데도 우리 이야기와 너무 비슷했다.” 황고운 교사는 이때 “(성차별 문제는) 내 개인적인 경험에 그칠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사회적인 문제라면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해결해보는 건 어떨까” 싶었다. 2017년 ‘아웃박스’는 그렇게 ‘초등젠더교육연구회’로 탈바꿈했다. 한 달에 두세번씩 모여 어떻게 젠더 교육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초등학교 교실에 성평등한 사고방식이나 젠더 교육과정을 집어넣는 새 판을 짜는 일”이라고 김수진 교사는 ‘아웃박스’의 활동을 소개했다.
#1. 우리 안의 고정관념을 하나씩 깨보는 게 목표야―안녕! ‘아웃박스’가 펴낸 책 <예민함을 가르칩니다>를 재밌게 읽었어. ‘아웃박스’만의 새로운 교육 실험들을 소개해줄 수 있어? 반응이 좋았던 수업은 어떤 거였는지 궁금한데.수진 기억에 남는 건 임산부 배려석 관련 수업이야. 이건 페미니즘 이슈기도 하지만 결국 어떻게 약자와 공감하고 (그들을) 배려할 것인가란 인권 수업이기도 하잖아. 보건소에서 임산부 체험복을 빌려와 아이들과 역할극을 했어. 몸이 무거운데 (배려석에 앉은 사람이) 전화를 하면서 비키지 않을 때 아이들의 기분은 어땠는지 묻고 공감을 끌어내는 수업이었어. 직접 체험할 수 있어서 아이들이 좋아했지ㅎㅎ
고운 나는 가사노동을 다뤘던 학부모 공개수업이 재밌었어. 반려견 밥을 주는 것부터 설거지, 창문 닦기 등 집안일 종류를 모두 적어보고 그걸 가족 중 누가 하는지 나열해봤더니 엄마가 하는 일만 넘쳐나는 거야. 그렇게 엄마에게 몰린 일 중에 (아이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는 수업을 했더니 다음 날 와서 역할 분담을 해봤다고 이야기하더라.
아이들이 직접 만들어 본 ‘집안일 그래프’. 아웃박스 제공
아이들이 직접 하는 ‘체험형’ 교육을 좋아한다면, 동료 교사들은 ‘몸교육’에 대한 수업이 가장 반응이 좋다고 했다. 각자 몸이 왜 소중한지 이야기해보고 ‘남들이 만지지 않았으면 하는 곳’에 스티커를 붙여보는 수업도 그중 하나다. 목, 하체, 상체 등 아이들은 제각기 다른 부분에 스티커를 붙였다.
고운 보통 ‘어떻게 피해를 보지 않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서 교육하잖아. 그것보단 ‘나도 모르게 친구를 기분 나쁘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 사실 성교육은 선생님들도 어려워하는데 이렇게 접근하니 “아이들과 이야기해보기 좋겠다”고 동료 선생님들은 말씀하시더라고. 반응이 좋았어.
―사실 나는 학창시절에 성교육이라고 받은 것 중에 기억나는 거라곤 “생리대를 어떻게 하면 ‘예쁘게’ 접어서 버릴까”를 알려주는 영상 뿐이야ㅎㅎ수진 ㅎㅎ아이들도 성교육을 한다고 하면 굉장히 부끄러워해. 교실 분위기부터 달라지거든. 다들 처음 듣는 척 앉아있기도 하고ㅎㅎ 그런데 ‘성’이 특별한 게 아니라 ‘내 몸의 일부’이고, 내 몸은 모두 소중하기 때문에 성도 소중하다는 식으로 접근하니까 아이들도 훨씬 더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더라.
고운 ‘생리 고사’를 보기도 했어. 생리에 관해 이야기를 해보자고 하면 남학생들은 ‘전 (생리를) 안 하는데 왜 배우냐’고 하거든. ‘생리 고사’란 아이디어를 낸 건, 모르던 사실을 알고 맞히게 될 때 뿌듯함이 있으니까. 시험 본다고 하니까 다들 집중해서 열심히 듣더라고ㅎㅎ 생리가 무엇인지, 여자라면 누구나 다 쓰는 생리대가 왜 지금은 일종의 ‘사치재’가 돼버린 건지, 생리컵처럼 다양한 생리용품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이야기를 나눠봤어. 그제야 비로소 남학생들은 ‘우리 엄마도 생리하냐’고 물어봐. 생리가 뭔지 제대로 알기도 전에 거부감을 갖지 않고 ‘(생리를 하면) 이런 불편이 있구나’ 정도를 아는 것만으로라도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생리 수업은 심화 과정도 있다. 여학생들과 함께한 ‘월경축제’다. 생리대에 그림을 그리거나 삼행시를 지어봤다. 간호사를 초청해 생리 기간에 어떻게 아프고 어떤 경우에 병원을 가야 하는지 이야기도 나눴다. “학교로 찾아가는 월경수다회를 하고 싶은 선생님이 있다면 저희를 찾아달라”고 둘은 호쾌하게 웃었다.
수진우리 안의 고정관념을 하나씩 깨보는 게 ‘아웃박스’의 목표야. 한번은 1학년 학생들이랑 이런 수업을 했어. ‘발레 선생님이 축구하는 아이를 혼내셨어요’란 문장만 들려주고 이걸 그림으로 그려보라고 한 거지. 그랬더니 1∼2명을 제외하곤 모든 아이가 발레 선생님을 분홍색 옷을 입은 여자로, 축구하는 아이는 남자로 그린 거야. “너희 그림들의 공통점이나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지 않니?”라고 물어보니까 조금 고민하더니 다들 찾아내더라고. 그 뒤엔 ‘발레하는 남자’와 ‘운동하는 여자’의 모습을 담은 영상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수업을 진행했어.
성별 고정관념은, 어쩌면 우리의 가늠보다도 훨씬 더 널리 퍼지고 깊이 스며들어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제 갓 ‘인생 8년 차’인 아이들에게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작동하니 말이다.
아이들이 그린 ‘발레 선생님’과 ‘축구하는 아이’ 누가 정해준 마냥 아이들의 그림은 비슷했다. 아웃박스 제공
#2. 왜 학교를 찾아오는 분은 늘 어머니일까?―학부모 상담을 하면서 엄마 대신 아빠를 학교에 불러봤다는 부분이 인상 깊었어. 사실 남성 육아휴직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곤 하지만, 그 1년이 지나고 나면 육아가 다시 오롯이 ‘엄마의 몫’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
수진 사실 이전까진 아버지 번호는 (당연히) 저장하려고 하지도 않았거든. 문제가 생기면 늘 어머니들과 소통을 했으니까. 그러다 보니 일이 생기면 학교를 찾아오시는 분도 늘 어머니들이었고. “바꿔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었어. 막상 직접 아버지들과 상담을 해보니 “입학식 때 오고 처음 왔다”는 분도 있고 “이런 건 정부에서 추진해줬으면 좋겠다”는 분도 계시더라. 평일에 (아버지들이) 상담을 오려면 직장의 협조도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어. 사실 엄마가 (아이 학교를) 간다는 거랑 아빠가 간다는 거랑 회사 분위기도 다르지 않을까.
고운 우리에게도 도전이었지. 아버지들께 연락하는 게 더 긴장되고 낯설었어. “이번엔 (상담 기회를) 양보 좀 해달라”고 어머니들께 먼저 양해를 구하고 아버지들께 연락했는데 (예상외로) 아버지들이 일일이 답장을 보내주시더라고. “드디어 가볼 수 있겠네요” “감사합니다”라는 분도 계시고, 상담을 오기 전에 아이와 “누구랑 친하냐” “요즘 어떠냐” 이런 대화를 나눴다고 말하는 분들도 계시고ㅎㅎ 어머니한테 전해 듣는 것 말고 직접 선생님이랑 이야기하며 조언을 듣고 싶은데 그게 어려웠다는 분들도 꽤 많았어. 막상 만나보니 아버지도 어머니들과 비슷해. 왜 진작 안 했을까 싶었지.
가만히 돌이켜보면 학교의 호명 대상은 언제나 ‘맘’이다. 고릿적 ‘녹색어머니회’는 이제 더 다양한 형태로 분화했다. ‘폴리스맘’, ‘패트롤맘’, ‘도서맘’, ‘클린맘’ 등 별의별 ‘맘’들이 학교를 채운다. 아이들의 올바른 칫솔질을 돕는 학부모봉사단 ‘치카맘’을 모집하는 곳도 있단다. 아빠가 온갖 편견을 뚫고 육아휴직을 해서 ‘라떼파파’가 된다고 해도 딱 아이가 입학 전까지만이다. ‘파파’를 부르지 않는 유치원, 학교, 사회에선 육아를 감당해야 하는 엄마는 고되고, 아빠는 소외된다.
―요즘의 ‘아빠’들은 그래도 우리의 부모님 세대보단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같아. 사실 아이들에게도 아빠가 참여하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고운 아버지들이 수첩까지 가져와서 적곤 해. 우리가 더 바라는 건 사실 ‘아버지 상담’을 넘어 ‘보호자 상담’을 하는 거야. 지금은 고모가 오면서 엄마인 척을 하는 분들도 있고, 할머니가 오실 때도 있어. 다양한 가족형태가 있고 보호자가 꼭 엄마나 아빠만 있는 건 아니니까. 아버지까지 상담 대상을 넓힌 게 1단계였다면, 2·3단계는 다른 보호자로 넓혀보는 게 우리의 목표야.
수진 우리는 보통 전통적인 형태, 부모님과 아이들로 구성된 ‘정상가족’만을 생각하잖아. 이 ‘가족’의 범위를 넓혀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물론 우리 자신도 더 바뀌어야 하는 것 같아. 아직도 “알림장에 엄마 사인을 받아와”라는 말이 무심코 나오거든. ‘엄마’ 대신 ‘보호자’란 단어를 사용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아이들이 직접 그려본 다양한 가족의 형태. 반려견·반려묘와 함께 살기도 하고, 동성인 파트너나 심지어 로봇(!)과 함께 살기도 한다. 아웃박스 제공
#3. 젠더 교육은 곧 인권교육이자 인성교육이지
성평등 교육이 어려운 건, 어느 한쪽을 마치 ‘잠재적 가해자’로 다룬다는 오해 때문이다. 하지만 두 교사는 “‘젠더 감수성’을 입힌 다양한 방식의 교육이 곧 인권교육이자 인성교육”이라고 입을 모은다. 성평등에 초점을 맞춰서 가르치지만 아이들은 서로 다른 걸 존중하고, 차별에 민감해지고, 차이를 이유로 편을 가르지 않는 점을 배운다고 했다. 성폭력이든, 성차별이든 크게 보면 ‘폭력’이란 카테고리 안에 있으니 결국 젠더 교육은 학교 폭력 예방교육과도 이어진다고 이들은 말했다.
―젠더 수업을 한다고 했을 때 학부모들로부터 항의를 받은 적은 없어?
수진 음…사실 생각보다 더 좋아하셔. 요즘 사회에서 계속 젠더 관련 이슈들이 발생하다 보니 교육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분들이 많아.
고운 젠더 교육이 마치 아이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몰아버린다고 생각하는 건 정말 어른들의 시선일 뿐인 것 같아. 아이들은 (젠더 교육을 통해) ‘가해를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넘어 “(피해자의) 지지자가 되어야겠다”는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하거든.우리는 (가해자가 될 수 있으니) “범죄를 저지르지 말라”고 가르치는 게 아니라 “범죄가 일어났을 때 함께 도와주고 같이 참여하는 시민이 돼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야. 아이들은 대부분 곡해 없이 받아들이는 편이고.
수진 사실 교육과정에 아쉬운 점도 있어. 2009년까진 ‘성 역할이 변화하고 있음을 이해하고 양성평등 사회 실현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의식과 태도를 갖는다’라는 성취기준이 교육과정에 있었는데 2015년에 개정되면서 사라졌거든. 성평등을 이야기할 수 있을 만한 최소한의 성취기준인데 이것마저 사라진 거야. 다음에 개정될 때 꼭 다시 들어갔으면 좋겠어.
―혹시 아이들 스스로 변화를 느꼈다고 말한 순간도 있는지 궁금해.고운 사실 수업 한 번으론 잘 안 변하는 것 같아. 1년 동안 꾸준히 수업하고 나면 그제야 변화가 조금 보이는 정도랄까. 쉽진 않아. 막상 우리 자신도 그렇잖아. 나도 사실 “외모에 신경 안 쓰겠다”며 강박에서 벗어나야지 생각해도 거울 보며 매일 생각하는 게 ‘내 눈은 왜 이러지’ 이런 거니까ㅎㅎ 물론 그럼에도 자꾸 이런 걸 말해보는 경험이 아이들한테 도움이 되는 것 같긴 해. “나 여자인데 머리가 짧으면 좀 어때?” “남자인데 키가 좀 작으면 어때?” 자기 자신한테 격려해주고 싶은 내용을 아이들이 직접 말로 내뱉으며 자존감을 천천히 회복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되게 기분이 좋아져. “난 여자지만 글씨를 좀 못 써도 괜찮아” “난 남자인데 운동 안 좋아할 수도 있잖아” 이런 식으로 스스로 생각하는게 눈에 보일 때 참 좋아.
김수진 교사(왼쪽)와 황고운 교사는 젠더 교육이 곧 인권, 인성교육이자 학교 폭력을 예방하는 교육이라고 말했다. 사진 황금비 기자
#4. 나도 페미니스트로서 해야 할 일이 있구나 깨달았어
한국 사회에서 ‘초등학교 여자 선생님’이 갖는 함의는 단순히 ‘선생님’ 그 이상이다. ‘1등 신붓감’이란 말이 으레 따라 붙기 때문이다. 교대를 다닐 때만 해도 이 말이 ‘맞벌이를 하면서도 육아와 가사노동을 모두 떠맡는 것이 가능한 직업’이란 뜻이 아니라 “(단순한) 칭찬인 줄 알았다”는 두 교사가 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깨달은 건 비교적 최근이다.
―페미니즘에는 어쩌다 관심이 생기게 된 거야?수진 난 ‘82년생 김지영’의 90년생 버전이랄까. 결혼·출산은 아직 하지 않았지만 평범한 대한민국 여성의 삶을 살아왔던 것 같아. 말도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고, 부모님이 교대 가라고 해서 가고. 그런데 문득문득 ‘내가 왜 이렇게 하지?’란 생각이 들 때가 있었어. 예를 들면 밤에 택시 탈 때 내비게이션 앱을 함께 켜는 것? 또 나는 ‘할 말은 하고 살자’는 주의인데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상대가 “아니, 예쁜 아가씨가 뭐 그런 말을 해∼”라며 ‘젊은 여성의 말은 설득력이 없다’는 식으로 넘어갈 때도 잦았어. 그런 경험들이 쌓이니 어느 순간부턴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그게 당연한 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던 것 같아.
고운 나도 비슷하게 부모님 말씀을 잘 들으며 살아왔어. 20대까지 날 설명하는 단어는 ‘재밌다’ ‘유쾌하다’ ‘둥글둥글하다’ 이런 거였지. 그런데 20대가 끝나갈 때쯤 내가 성추행을 당하거나 뭔가 불편했던 경험들을 이야기하면 (주위에서) “왜 이렇게 까칠해졌어?’라고 말하더라고. 나는 똑같고 여전히 둥글둥글한 사람인데…그래서 불편한 경험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찾아다녔어. 책도 읽고, 여행도 다니고, 운동도 이것저것 해보고, 강연도 많이 들으러 가보고…내가 진짜 좋아하는 건 뭔지도 찾아다녀 보고. 지금은 기왕이면 내가 깨닫고 배운 걸 다른 사람에게도 나눠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지ㅎㅎ
―내가 페미니스트임을 자각한 ‘페미니스트 모멘트’는 언제야?수진 나는 2016년 5월 17일 강남역 살인사건. 아마 다른 많은 사람도 이날을 답하지 않을까. 내게도 너무 충격적인 일이었어. 동시에 내가 여성으로서, 페미니스트로서 갖고 있던 두려움과 분노, 이때까지 (내가 해 온) 투쟁들이 ‘바로 이거였구나’ 하고 깨달은 순간이었어. 그만큼 사회를 움직인 사건이랄까. “아, 나도 페미니스트로서 해야 할 일이 있구나. 가만히 있어선 안 되겠구나”하면서 활동을 시작한 거지.고운 난 2018년 2월 4일인데 이날은 우리 가족이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걸 확인한 날이야. 우리 가족은 (소위 말하는) ‘정상가족’이고, 아버지는 보수적이시거든. 성추행을 당했을 때도 “누가 늦게 들어오래?”라고 말씀하시던 분이었어. 한 번은 에코페미니즘 관련 강연을 들으러 갔는데 김현미 교수님이 “가정에서부터 혁명을 이루세요”라고 말씀하시는 거야. 가장 가까운 가족부터 페미니즘이 왜 필요한지 설득하지 못하면 세상을, 사회를 어떻게 바꾸겠냐는 이야기였지. 그때만 해도 ‘설마 우리 가족이?’란 생각을 했어.
그런데 지난해 초 책을 쓰고 있는데 아버지가 성평등 관련 책 추천 목록을 보내주시는 거야. “관심이 있으면 보이는 법”이라고 하시면서ㅎㅎ 남동생도 관련 뉴스가 나오면 관심 있게 보고 궁금한 걸 물어보곤 해. 그제야 비로소 “내가 누군가를 조금 더 예민하게 변화시키는 사람이 됐다”는 느낌이 들었어.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 순간이지.
‘아웃박스’의 페미니즘은 “연대, 확산, 진전”이라고 이들은 답했다. 사진 황금비 기자
그렇다면 ‘아웃박스’에게 페미니즘은 어떤 의미일까. “연대하고 확산하고 진전하는 것”이란 답이 돌아왔다. 이들은 블로그를 통해 고민해서 만든 수업 계획안을 공개한다. 교사라면 누구나 해당 자료를 다운로드 받아 수업에 활용할 수 있다. 직접 수업을 해본 뒤 아이들의 반응을 공유하거나 더 나은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교사들도 있다. 이러한 연대는 ‘아웃박스’에 “용기와 확신”(김수진)을,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울타리”(황고운)를 만들어 준다.
수진 젠더 교육을 고민하는 교사들은 우리 말고도 ‘초등성평등연구회’가 있어. 다른 여러 교육연구회도 생기고 있고. ‘아웃박스’는 전국의 학교 교실에 젠더 교육이 퍼졌으면 좋겠다는 목표로 시작했거든. 확산이 돼야 변화를 끌어낼 수 있고, 그러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연대, 확산, 진전’을 꼽은 거야ㅎㅎ
고운 나 혼자 1년에 젠더 수업을 10시간, 20시간씩 하는 것보다 단 1시간이라도 ‘아웃박스’의 교육을 접한 100명의 선생님이 함께 하는 게 훨씬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봐. 각자의 교실에서 아이들 줄 세우는 것 정도는 (성별과 관계없이) 자유롭게 하는 거지.
김수진 교사의 올해 목표는 사회 수업 때 아이들과 함께 서울 마포구의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을 방문한 뒤 수요집회를 참석하는 일이다. 황고운 교사는 창업을 체험하는 진로교육 시간에 일본군 성노예제(‘위안부’) 배지나 성폭력 반대 팔찌를 만들어 보는 것이 목표다. 미디어 콘텐츠를 어떻게 젠더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지, 성인지 감수성이 녹아있는 콘텐츠는 무엇인지 만들어 보는 수업도 진행할 계획이다.
남학생은 1번부터, 여학생은 31번부터 시작하는 학교 규칙을 바꿔보는 것, 여자는 분홍색·남자는 하늘색으로 된 이름표를 만들지 않고 각자가 원하는 색을 고를 수 있게 하는 것, ‘남자 직업’과 ‘여자 직업’을 구분하지 않고 마음껏 꿈꿀 수 있도록 돕는 것, 아이들이 ‘남자’와 ‘여자’라는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나다움’을 찾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들이 가르치는 ‘예민함’은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도록, 단 두 가지 색이 아닌 다양한 스펙트럼의 색이 교실을 색색깔로 채울 수 있도록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주는 요소다. ‘아웃박스’는 믿는다. 이건 “한국 사회가 변하게 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취재=박다해 기자, 연출=황금비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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