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올림픽’이 끝나고 태어났다. 스무살이 되던 해, 실력만 있으면 유리천장쯤은 부술 수 있다는 ‘알파걸’이 등장했다. 서른이 되자 직장에선 자책감을, 가정에선 죄책감을 느끼는 ‘슈퍼우먼’ 선배들이 보였다. 여성의 생존과 성공에 대한 서사는 늘었지만, 우리가 딛고 서 있는 판의 기울기는 변함이 없었다. 이 판 자체에 균열을 내는 방법은 없을까. ‘알파걸’도 ‘슈퍼우먼’도 주지 못한 답을 찾고 싶어, 또래 여성들을 만나러 나섰다.
최원영 서울대병원 간호사는 2016년부터 병원 성과급제도 도입이나 간호사 인력 문제 등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앞장서 내며 폐쇄적인 의료업계 문화를 바꾸는데 힘을 보태왔다. 사진 최원영 제공
그를 다시 마주친 건 11일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이다. 낙태죄 위헌여부를 헌재가 선고하는 날이었다. 그는 어김없이 마이크를 들고 사람들 앞에 섰다.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보건·의료계 종사자들의 기자회견 자리였다.
“오히려 불법으로 쉬쉬하며 수술을 받던 여성들이 정부기관이나 ‘합법적이고 제대로 교육을 받은’ 의사들에게 시술을 받을 수 있게 된다면 낙태율과 모성사망률은 실제로 감소합니다.”
몸에 꼭 맞는 옷을 입듯, 또 마땅히 목소리를 내야하는 자리에 왔구나 싶어 빙긋 미소가 번져 나왔다. 그는 최원영 서울대병원 간호사(33)다.
지난 11일 오후 서울 헌법재판소 앞에서 열린 낙태죄 위헌판결 촉구 의료계 기자회견에서 최원영 간호사(왼쪽에서 세번째)가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그를 처음 만난 건 지난해 여름, 고 박선욱 간호사의 죽음 이후 ‘태움’(‘재가 될 때까지 태운다’는 뜻으로 간호사의 교육을 명목으로 괴롭히는 문화)이 논란이 됐을 때다. 그는 동료 간호사들과 ‘간호사이다’란 프로젝트 그룹을 꾸리고 간호 노동자로서 느끼는 업계의 문제점과 고민을 터놓는 작은 토크쇼 자리를 마련했다. (▶관련 기사 : [영상] “태움? 병원 불판을 꺼야죠” 간호사들의 ‘시원한 수다’)
그는 말한다. 병원 성과급제 도입, 30만원대에 불과한 간호사 첫 월급, 고질적인 인력부족 문제, 의료기관 인증제도…이전에도 굵직한 이슈들에 대해 기꺼이 나서서 간호·의료업계의 문제를 공론화했던 그다. “아마 최근 2∼3년 사이 인터뷰를 가장 많이 한 현직 간호사 아닐까” 싶다고 했다.
지난 19일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다시 만난 그는 환하게 웃었다. “내가 무슨 잔다르크라서 그런 건 아니예요.” 최 간호사는 “노조에서 일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된 것”이라면서도 “어떤 문제가 있어도 잘 말하지 않는, 폐쇄적인 병원 문화에 균열을 낸 것 같다”며 자신을 “빨갱이 간호사”라고 소개했다.
#1. ‘빨갱이’ 간호사, 침묵을 깨다 ―안녕! 왜 자신을 ‘빨갱이’ 간호사라고 소개 하는거야? ㅎㅎ
나는 빨간색이 ‘저항’을 상징하는 색이라고 생각해. (보통) ‘빨갱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딱히 나쁜 사람이라기보다 불의에 저항하거나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사람인 것 같아. 알고 보니 ‘빨갱이’는 ‘빨치산’에서 온 말이고, 그건 또 ‘파르티잔’(partizan)이란 용어에서 왔더라고. ‘부당한 정권에 저항하는 게릴라 전사’들을 그렇게 불렀다는 글을 읽고 ‘알고보니 좋은 뜻이네’라고 생각했어. 보통 간호사를 ‘알엔’(RN·Registered Nurse)라고 하거든. 나는 혼자 속으로 킥킥 거리면서 ‘레드 널스’(Red Nurse)라고 불러ㅎㅎ
―우리도 처음 만난 게 아니잖아. 언론 인터뷰에서 자주 보게 되는 것 같아.
내가 뛰어나서 인터뷰를 자주 하는 건 아니야. (단지) 간호업계 안에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모난 돌이 인터뷰를 당하는 느낌? ㅎㅎ 병원의 문제점에 대해선 ‘우리끼리의 일’이란 불문율이 있는데 그 점에 대해 말을 하니까 그런 것 같아. 우연한 기회에 목소리를 냈다가 (언론이) 물어보면 자꾸 대답해주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그래도 (내가) 침묵을 깨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아. ―왜 간호·의료업계 안의 문제는 공론화가 잘 안 된다고 생각해?
병원은 모두가 원치않게 공범이 되는 시스템이야.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환자가 (혹여나) 잘못되면 그 과정에 모두가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고 해야 하나, 특정 한 사람만의 잘못은 아닌 경우가 많아. 나 자신도 환자에게 늘 좋은 간호사는 될 수 없었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 걸 (함께) 말하면서 목소리는 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
최원영 간호사가 2016년 10월 1일 병원 성과급제 도입 지침에 대해 개인 페이스북에 올린 글은 수천 건의 ‘좋아요’와 공유를 기록했다. 촬영 황금비 기자
최원영 간호사가 처음 목소리를 낸 건 2016년 박근혜 정부가 공공기관 성과급제 권고지침을 내렸을 때다. “나는 서울대병원 간호사다”라며 개인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화제가 됐다.
“병원은 환자를 치료하는 곳인데 성과를 내고 수익을 창출하라니…비싼 검사나 시술을 많이 받는 환자, 돈 되는 환자를 많이 유치하고 환자에게서 더 많은 돈을 받아내라고 권하는 건가?”
그의 단호한 발언은 수천 건의 ‘좋아요’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서울대병원 간호사의 첫 월급이 36만원에 불과하다는 걸 고발했다. “2011년에 입사한 저는 31만 2000원을 받았다. 그 땐 그게 최저임금법 위반인지도 몰랐다”고 했다. 공론화가 되고 나서야 병원은 신입 간호사 대상 미지급 임금을 지급했다.
―병원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고발을 자주 하는데, 부담스럽거나 두려운 건 없어?
하나둘씩 알리다 보니 (오히려) 겁이 없어졌어.
‘인생 뭐 있나?’
‘내가 (인터뷰를) 한다고 나를 뭐 암살이라도 하겠어?’ 싶어ㅎㅎ 차라리 ‘나를 못 자르게 (인터뷰를 해서) 더 유명해져 버리자’란 마음도 있고ㅎㅎㅎㅎㅎ 부당해고 당하면 병원 비리를 폭로했다가 잘렸다고 또 인터뷰를 해 줄거지? 이렇게 인터뷰를 하면서 더 확실하게 (일자리를) 보장받는 느낌이야.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면 조용히 제거될 수 있으니 (앞으로도) 꾸준히 (인터뷰를) 할 거야(!)
최원영 간호사는 간호·의료업계 안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오히려 “겁이 없어졌다”고 했다. “차라리 나를 못 자르게 인터뷰를 더 해야겠다”며 웃음을 터트렸다. 촬영 황금비 기자
#2. “내 인생이 ‘망작’은 안 될거야.”
유달리 낙천적인 성격이라고 했다. 업무 외 시간에 언론 인터뷰에 시달리는 건 적잖이 스트레스를 받을 법한데도 천연덕스럽게 웃어 넘긴다. 불이익을 먼저 걱정하기 보다 “더 큰 불행에 견주면 이 정도는 작은 불행일테니 괜찮아”라고 자신을 다독이는 편이다. 지금껏 살아온 삶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어렸을 때부터 ‘반골정신’은 있었던 것 같다”고도 했다. 고등학생 땐 학교에서 갑자기 “귀밑 10센티미터까지 머리를 자르고 오라”란 단발령이 떨어졌는데 “안 된다”고 목소리를 열심히 냈단다. 어렸을 때 친척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에서도 소심한 반항(?)을 했다. 여자들만 부엌에서 일을 하고 남자들은 안 하는 게 이상하다고 느껴 안방에 누워버린 것이다. 자신에게 좀 더 믿음을 가지게 된 건 2015년 메르스를 겪으면서다.
―어쩌다 이렇게 ‘불의를 말하는 사람’이 됐는지 궁금해. 나의 가치관이나 삶의 방향에 영향을 끼친 순간이 있어?
메르스 때야. 그 때 투석실에 근무했었는데 메르스 증상 중에 신장이 안 좋아지고 투석을 해야 하는 것도 있거든. 자원할 간호사를 찾는다는 공지가 내려왔을 때 ‘내가 가는 게 제일 낫겠지?’싶어 고민하다가 지원했어. ‘내가 제일 젊고, 딸린 가족도 없고 하니 내가 가야지’라고 생각한 거야. 물론 감염될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 그런 일을 겪어야 한다면 그나마 (메르스에) 걸릴 확률이 적은 (젊고 건강한) 사람이 가는 게 불행한 일이 발생할 확률이 가장 적을 거라고 생각했어.
짧은 기간 일했지만, 그 선택을 했을 때 나 자신이 어떤 이해득실만을 따지기 보다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확인할 수 있게 된 기회였어. 옳은 일을 선택했을 때 나오는 엔돌핀도 있는 것 같아. 그런 엔돌핀에 중독되는? ㅎㅎ 이후에도 내 선택을 믿고 행동해도 되겠다는 느낌을 받았어. 살면서 이런 경험을 쌓아가면,
내 인생이 최소한 ‘졸작’이나 ‘망작’은 안 되지 않을까 생각해ㅎㅎㅎ
별 일 아닌 양 너스레를 떨며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의 답 중간중간엔 환자의 생명을 지키는 간호사로서의 직업 윤리나 근무 환경에 대한 오랜 고민이 묻어났다. 가장 힘들다는 ‘내과 중환자실’에서 병원 생활을 시작한 그다. 서울아산병원 내과 중환자실에서 일하다 ‘태움’과 과로 등으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박선욱 간호사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이 철렁했다. “나일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내가 해야 한다고 배운 일은 100가지인데 내게 주어진 시간에 100개를 다 할 순 없어 도망가고 싶을 때도 많았거든. 출근하는 게 무섭고 힘든 시절이었어.”
지난 2월 중남미 여행 중 최원영 간호사는 고 박선욱 간호사 사망 1주기 집회 참석을 독려하기 위해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에서 ‘아산병원 사과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사진을 찍은 뒤 에스엔에스(SNS)에 올렸다. 사진 최원영 제공
박 간호사의 죽음은 긴 싸움 끝에 산재로 인정받았지만, 인력이 상시적으로 부족한 병원의 구조적인 문제는 바뀌지 않았다. 같은 비극은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건강권 실현을 위한 행동하는 간호사회’ 활동을 시작하고, 부조리한 구조에 더 많은 목소리를 내는 이유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오래 전부터 신념이 있었다기보다 이런 사건들을 겪으면서 스스로 답을 찾는 과정인 것 같아. 간호사가 자살할 정도의 환경은 환자들에게도 결코 좋은 게 아니거든. 제대로 된 매뉴얼대로 (일을) 하지 못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쫓기며 일하다 보면 환자의 존엄성도 잘 지켜지지 않아.
나 자신도 인간으로서 중요한 어떤 걸 잃어가는 느낌이 들었어.
또 병원 안에선 급박하게 생명을 다루는 곳이란 이유로 소리를 지르거나 폭언을 하는 게 용인되는 부분이 어느 정도 있거든. 노조 상근자로 일하며 막상 한 발짝 떨어져 (병실을) 바라보니 (그제야) 비로소 이상하다는 걸 깨닫게 됐어. 누군가 그건 옳지 않다고 깨줘야 하는 것 같아.”
최 간호사는 응급중환자실에 근무하다 지난 2월부터 서울대병원 노조 상근자로 일하고 있다. 2017년 7월~2018년 2월에 이어 두번째 노조 근무다.
#3. 간호사는 ‘아가씨’가 아니다 ―최근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에 “간호사는 ‘아가씨’가 아니다”란 글을 기고한 걸 인상깊게 읽었어. 실제로 ‘여초’인 간호사 직군의 노동은 그 가치가 평가절하되는 것 같아. 간호사란 직업이 성적인 이미지로 종종 소비되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고.
간호사가 성적인 이미지로 소비되는 건 아무래도 젊은 여성이 많다 보니 그런 듯 싶어. ‘할머니 간호사’가 없잖아? 그건 일이 그만큼 힘들어 평균 근속 연수가 5년 내외로 짧기 때문이야. 여성이 많은 건 ‘돌봄노동’을 여성의 일이라고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고.
대개 여성이 많은 직군의 일은 ‘대단한 일이겠어’, ‘뭐 얼마나 힘든 일이겠어’라고 깔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그래서 근무환경 개선이 안 되는 악순환이 생겨. 아무 ‘아가씨’나 데려다 놓고 하는 일인 것처럼 전문성이 없는 일로 비춰지고,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하니 실제로 필요한 만큼의 인력이 충분히 투입된다거나 (현장에서) 필요한 전문성을 더 기를 수 있는 교육도 잘 제공되지 않아. ‘그냥 환자보고 혈압 재고 약이나 주는 일’처럼 여겨지는 거지. 사실 환자 사망률에 간호사 인력 상황이 큰 영향을 끼친다는 연구 결과도 있는데 말이야.
“간호사가 하는 일은 때론 위험하고, 때론 지저분하고, 때론 힘들다.” 그는 기고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간호사는 거구인 환자의 몸을 들거나 옮겨야할 때도 있고, 중환자실 환자의 대변을 받아내기도 하며, 환자의 시신과 마주하는 순간도 있다. 환자들로부터 성희롱이나 불쾌한 신체접촉을 당하기도 한다. 간호 수가가 의료 수가에 견줘 매우 낮은 것도 근무 환경을 열악하게 만든다. “병원 입장에선 간호사를 많이 고용할수록 이익이 안되고 인건비만 많이 나가는 상황이 되다 보니, 환자의 치료에 영향을 미치는데도 간호사의 역할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최 간호사는 설명했다. 간호사의 업무는 종종 ‘친절함’을 기준으로만 평가받기도 한다. 누군가 자신을 “아가씨”라고 부르면 그는 “아가씨 아니다. 아무 아가씨나 데려와서 하라고 해보라”고 맞받아치곤 한다. 그는 “간호사들이야말로 페미니즘의 선봉에 서야 한다”며 웃었다.
―일하면서 어떤 불쾌한 말을 들어본 적 있어? 반말을 하는 환자를 만나거나 하면 어떻게 대응하는지 궁금해.
‘아가씨’나 ‘언니’라는 말을 듣는데 그냥 ‘팩트’로 받아치는 거지. “저는 환자 분보다 23살이나 어립니다. 간호사라고 부르세요.” 이렇게ㅎㅎ 다짜고짜 반말하면 “환자 분, 반말하시면 어떡해요. 반말은 어린 애들이나 하는 거예요. 다 큰 성인이고 사회생활도 하신 분이 반말 하시면 안 되죠.” 이런 적도 있고ㅎㅎ 의사가 반말하면 “왜 반말하세요? 저랑 친해요?”라고도 했어ㅎㅎ
시원시원하게 정곡을 찌른다. ‘최원영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4. 페미니스트 ‘최원영’이 꿈꾸는 것―최원영의 페미니즘을 정의한다면 어떤 거야?
나의 페미니즘은 ‘내 마음’이라고 생각해. 페미니즘을 처음 공부한 건 대학에 들어와서 관련 학회를 하면서야. 하지만 어떤 거창한 이론을 떠나 내가 (여성으로서)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는 것, 싫은 일을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나의 페미니즘 아닐까 생각해. 예를 들어 요즘 ‘탈코르셋’(탈코)을 많이 하는데 물론 (그 방향이) 맞는 부분이 있지. 하지만 스스로 해방감을 느끼며 신나게 (탈코르셋) 시도를 할 수는 있어도 반대로 ‘탈코’를 안 한 사람에게 ‘넌 아직도 억압돼 있어’라고 손가락질 하는 건 아닌 것 같아.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뭐야?
비록 잘못된 사회화라고 하더라도 오랜 시간 동안 그 사회 안에서 길들여지고 교육을 받은 거잖아. 스스로 (자신을) 한꺼풀 벗겨내서 변화하는 건 모르겠지만 남이 갑자기 확 변하라고 해서 하는 건 해방은 아닌 것 같아. ‘민낯’을 하든 ‘노브라’를 하든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모두가 해방된 세상이 아닌데 누구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고 할 순 없는 거잖아.
본인이 감당할 수 있고, 즐겁게 할 수 있는만큼 페미니즘을 추구하면 되는 것 같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그걸) 잘 하고, 그래서 행복한 존재라고 생각해. 여자라서 또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걱정이나 작은 불안은 꾹 눌러버리고 하고 싶은 걸 했으면 좋겠어. 즐기는 사람이 가장 잘 한다는 말도 있잖아. 좋아하는 일을 즐기며 했으면 좋겠어. 그럼 또 행복해지니까? ㅎㅎ
“여성이 즐기고 행복하길 바란다”고 최원영 간호사는 말했다. 촬영 황금비 기자
그는 ‘여성 노동자’로서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개척하고 바꿔나가는 과정이 있으면 좋겠다고도 덧붙였다. “페미니즘은 모든 곳에서 공기처럼 스며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동운동과 별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터에서 ‘여성 노동자인 나의 권리’를 보장받는 것이 곧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개선되는 일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최 간호사는 덧붙였다. 신규 간호사를 위한 노동법 상식을 알리고, 선배의 ‘꿀팁’을 전하는 일에 앞장서며 간호업계의 판을 바꾸고 있는 그다운 말이라고, 다시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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