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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7.18 07:57 수정 : 2019.07.18 08:04

폭력조직인 도강파 보스를 제거하는 임무에 실패한 조필(송강호)은 부하 셋과 함께 피나는 훈련을 하며 복수를 노린다.

[한겨레-CJ문화재단 공동기획]
33)넘버3
감독 송능한(1997년)

폭력조직인 도강파 보스를 제거하는 임무에 실패한 조필(송강호)은 부하 셋과 함께 피나는 훈련을 하며 복수를 노린다.
지식인 카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난리법석을 친 적이 있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구조주의와 기호학은 새로운 과학의 자리를 차지했고, 마르크시즘을 조롱했으며, 정신분석과 언어학은 불장난을 벌였으며, 거의 암호에 가까운 개념들이 잡지에서 제목으로 뽑혔다. 송능한은 장난질에 가까운 태도로 이걸 되는대로 가져다 쓰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보고 싶었음에 틀림없다. <넘버3>는 ‘아싸’와 ‘인싸’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도 양쪽 모두를 가볍게 조롱하는 패러디의 ‘킹왕짱’이다.

어떤 패러디? 무시무시할 정도로 폭력적인 말의 잔치. (당시의 유행을 빌려 말하자면) <넘버3>는 모든 대사에서 기표들은 기의와 아무 상관 없이, 혹은 기의를 미끄러져 나와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한다. 송능한은 경쾌하게 비틀고, 고의적으로 왜곡하고, 닥치는 대로 인용하고, 종종 문장 속에 자리한 단어의 앞뒤를 살짝 바꿔서 다른 뜻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걸 등장인물들은 천연덕스럽게 읊어댄다. 왜냐하면 그 대사를 하는 ‘넘버3’들은 그 말의 기의가 무언지 모르기 때문이다. 단지 그 말이 멋있어서 하는 말이다. 그래서 말은 황당무계해지고, 대화는 어처구니없으며, 그 말을 하는 상황은 우습지만 공허해진다. 텅 빈 공허. 조폭 보스들이 마주 앉아 사자성어를 써가며 대화를 나누지만 화면에 함께 따라 올라오는 한자들은 대부분 틀렸거나 오해하고 있는 말들이다. 이때 기의들은 가끔 반격하듯이 관객을 공격하기도 한다. 살인청부업자가 낙장불입(落張不入)을 고사성어처럼 사용할 때 누군가는 박장대소하고, 누군가는 웃지 못한다.

조폭조직 도강파의 뜨내기였던 태주(한석규)는 하극상 쿠데타에서 기지를 발휘해 보스를 구해내고 조직의 넘버3가 된다.
게다가 이 잔치를 활기 넘치게 만드는 송강호, 한석규, 최민식, 이미연, 방은희, 박상면, 안석환, 박광정이 서로 마주치는 순간마다 대결처럼 펼치는 애드리브는 사방팔방 영화의 모든 대목을 명장면으로 만든다. 송능한은 이야기를 거의 수습할 수 없는 지경까지 몰고 간 다음 갑자기 마지막 장면에서 아직 오지도 않은 21세기로 건너뛴다. ‘넘버3’들, “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일부 패러디) 송능한의 큰 웃음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오는 것만 같다.

정성일/영화평론가

※한겨레·CJ문화재단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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