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정여울의 문학이 필요한 시간
⑥ 그때 비로소 보이는 아름다운 것들
카우이 하트 헤밍스의 소설 <디센던트>는 조지 클루니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바 있다. 아내 조애니가 보트 경주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져 소생 가능성이 없어지자, 남편 맷은 죽음의 날만 기다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억장이 무너져내린다. 이십세기폭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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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순간, 오히려 환하게 떠오르는 생의 진실이 있다 모든 걸 잃어버릴 위기에 처했어도, 우리가 결코 잃지 말아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 희망의 조짐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잃지 말아야 할 마음의 화두는 무엇일까. 백척간두의 상황에 내몰린 민주주의의 앞날을 걱정하는 뉴스들을 매일 접하고, 서초동 일대를 가득 메운 검찰개혁 촉구 촛불집회의 인파 속에서 시민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고 걸으면서 내 안에서 아프게 솟아오른 질문이었다. 진보와 개혁을 위한 단 한 발자국을 내딛는 것조차 이토록 힘겨운 사회에서 평생 살아오며 간신히 배운 것이 있다. 고통의 한가운데를 통과할 때는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지만, 지금 가장 고통스러운 이 순간조차도 시간이 흐르면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큰 그림’의 일부였음을 깨닫게 된다는 점이다. 시시포스의 끝나지 않는 노동처럼 오직 참혹한 고통의 무한 반복으로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믿음.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단 1밀리미터의 진보’라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희망은 그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눈부신 축복이므로. 최악의 상황에서 발견한 최고의 가치 조지 클루니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카우이 하트 헤밍스의 소설 <디센던트>를 읽으면서, 나는 모든 희망이 다 끝난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 비로소 발견되는 생의 가치를 생각했다. 아내 조애니가 보트 경주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져 소생 가능성이 없어지자, 남편 맷은 두 딸아이를 홀로 보살피며 아내의 다가오는 죽음을 준비해야 할 위기에 빠진다. 며칠 전만 해도 환하게 웃으며 아직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던 아내가 병원 침대에 누워 오직 죽음의 날만 기다리는 모습을 바라봐야 하는 남편은 억장이 무너져내린다. 설상가상으로 큰딸이 폭탄선언을 한다. ‘엄마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을 알고 있다’는 충격적인 선언을 한 것이다. 오직 가족을 지킨다는 일념으로 일중독에 빠져서 살아온 평생의 시간이 한꺼번에 부정당하는 느낌, 그 현기증을 이 세상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다. 이 기막힌 아픔을 나누고 싶은 진정한 솔메이트는 오직 아내뿐인데, 아내는 존재에서 비존재를 향한 무참한 여정을 떠나버린 것이다. 아내가 사경을 헤매는 와중에도 맷은 깊은 질투심과 분노를 느낀다. 아내가 사랑한 다른 남자는 과연 누굴까. 맷은 작별인사조차 하지 못한 채 코마상태에 빠진 아내의 상태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아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했다는 또 하나의 무참한 진실과 대면해야 한다. 알고 보니 아내에게 다가간 남자는 맷이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엄청난 면적의 땅을 매각하는 일과 관련하여 맷을 통해 한몫 단단히 챙겨내려는 부동산업자, 브라이언이었다. 그는 계획적으로 맷의 아내에게 접근한 것이다.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땅을 투자자에게 매각하면 엄청난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 십중팔구 아름다운 하와이의 땅은 샅샅이 파헤쳐지고, 리조트나 위락시설이 세워질 것이다. 대대로 쌓아온 수많은 추억들 또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아내의 죽음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비로소 그동안 간신히 틀어막고 살았던 생의 빈틈들이 적나라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맷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 쏟으며 살고 있는 것으로 일중독을 합리화했지만, 어쩌면 가정이 아닌 일자리만을 지킨 것은 아닐까. 돈을 버는 일에 지쳐 남편으로서의 사랑, 아버지로서의 사랑, 삶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아내의 코마상태라는 엄청난 트라우마를 겪기 전에는 땅을 언젠가는 팔아야 할 재산으로 생각했다. 막대한 교환가치로 계산 가능한, 미래의 자산으로서만 그 땅은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다가오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그는 자신이 홀로 키워야 할 딸들의 미래, 그리고 자신이 아내 없이 살아가야 할 그 수많은 나날들이 전과는 다른 빛깔로 처연하게 반짝이는 것을 느낀다. 그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 최선의 가치를 발견해내야 한다. 그것은 아내가 죽어도 아내를 향한 사랑은 남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아내가 사라져도 아내의 분신, 딸들과의 소중한 미래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작품 초입에서 냉담하고 무미건조하게만 보였던 맷은 시간이 지날수록 매력적인 주인공이 되어간다. 그는 트라우마 이후에 오히려 더욱 깊고 성숙한 내면을 가진 존재로 성장하는 아름다운 주인공이 되어간다.
그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비로소 딸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운명이 자신을 놀래켰지만, 자신은 운명을 앞질러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삶을 살 거라고 결심한다. “삶이 나를 놀라게 했지만, 나 또한 삶을 놀라게 해줄 거야.” 이십세기폭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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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디센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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