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전 판사 이상은 결핍에서 온다. 허전한 마음에 찬바람이 불면 가슴이 시리다. 다시 따뜻하게 데우고 싶어진다. 그 욕구를 올바른 가치와 연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소속감’ ‘강화’ ‘만족지연’ ‘승화’와 같은 행동주의 심리학 용어들이 다 그런 뜻이다. 올해 초 법관을 사직하고 한동안 국외여행을 했다. 도중에 마주친 분이 있었다. 사직 이유를 물어왔다. 해오던 대로 설명했다. “그러면 판사직을 잃은 건가요, 버린 건가요?” 훅 들어온 질문에 나도 모르게 반응했다. “자발적으로 잃었죠.” 형용모순이다. 그동안 쓰린 순간이 왜 없었겠는가. 나는 아직도 그 표정을 기억한다. 2017년 2월의 어느 날, 나는 양형실장 사무실의 탁자에 앉아 있었다. 오른쪽 대각선 책상에 놓인 업무수첩이 눈에 띄었다. 그와 나는 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다. 사실 대화라기보다는 내가 설명을 주로 듣는 쪽에 가까웠다. 한참 설명을 이어가던 그는 결국 기획조정실이 판사들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말을 꺼냈다. 순간 내 표정이 굳었다. 기획조정실은 그럴 법적 권한이 없다. 양형실장과 눈이 마주쳤다.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띄엄띄엄 말을 이어갔다. 이제는 내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그는 눈을 찡그리며 문장을 맺었다. 진심으로 부탁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 말투도 기억한다. 법원행정처 근무를 거부하고 사직서를 제출하자 행정처 차장이 전화를 해왔다. 나는 업무의 불법·부당성을 설명했다. 돌아온 것은 하소연이었다. ‘하소연’은 그와 나의 관계에 어울리는 표현이 아니다. 차장은 대법관 0순위였고, 나는 3000명의 판사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의 태도를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과장되게 애처로운 말투였다. 다른 심의관 자리를 제안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도 가끔 그 말투가 귓가를 맴돈다. 마음이 불편하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의 설명에 따르면 조직생활은 집단적인 역할극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대면한 상대의 태도에 맞춰 자아를 ‘연출’한다. 상대가 바뀌면 태도도 바뀐다. 양형실장과 차장도 한때는 재판의 이상을 좇았던 젊은이였다. 사법관료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기 위해 자기 안의 좋은 판사의 자아를 죽여 없앴을 뿐이다. 내가 내 명예를 지키겠다고 나서자 일시나마 그들도 죽은 자아를 소환해냈다. 나는 그날 이들이 꾹꾹 숨겨온 수치심을 보았다. 자아는 ‘무대’의 영향도 받는다. 무대가 바뀌면 규칙도 바뀐다. 한쪽의 ‘은밀한 관행’이 더 큰 무대에서는 ‘천인공노할 일’이 되기도 한다. 나는 행정처 발령이 철회되어 일선 법원으로 돌아왔다. 그곳엔 업무수첩 대신 법정이 있다. 법정은 재판이 이뤄지는 곳이다. 판사에게 부여된 헌법적 사명이 피부로 느껴지는 곳이다. 공적인 가치를 함부로 뭉개지 못하는 곳이다. 비밀주의가 무너지고, 책략보다는 규범이 중시되는 곳이다. 그곳으로 복귀하고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소집될 때까지 100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세상 자체가 그냥 하나의 큰 무대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법대에서 내려다본 세상과 평지에서 올려다본 세상은 다르다. 지난 주말, 변호사로서 동자동 쪽방촌에 갈 일이 있었다. 재판하면서 열악한 주택을 한두번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때는 누구도 내게 속살을 다 보여주지 않았다. 평지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있다. 이들의 이익이 공적 가치의 뿌리다. 주권재민사상을 표방하는 나라에선 그렇다. 공직사회는 그 가치에 자신을 끼워 맞춰야 한다. 반대로 가치를 자신의 이익에 끼워 맞춰서는 안 된다. 분노를 사는 길이다. 보르도지방법원 판사였던 몽테스키외는 10년의 법관 생활을 정리하고 20여년간 유럽을 떠돌았다. 그리고 <법의 정신>을 저술했다. ‘법률과 판결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억압’이 가장 큰 문제라고 썼다. 프랑스에서 바스티유 감옥이 불타기 얼마 전, 그의 사상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 필라델피아에 모인 55명의 대표들에게 전해졌다. 사법권 독립을 처음 성문화한 미국헌법이 탄생한 배경이다. 두개의 자아, 두개의 무대, 두개의 세상. 이것은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다. 문제는 선택이다. 좋은 선택만이 우리의 결핍을 채워줄 것이다. 지난주부터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선택을 잘하려면 일단 둘을 구별해낼 수 있어야 한다. 세포가 분열하듯이, 모든 새로운 세상은 개념의 분화에서 시작된다. 천지창조의 시작은 어둠과 빛을 가른 일이다. 재판을 지켜보며 우리가 할 일이다. ※공감(公感)은 ‘공적 감각’을 축약한 조어다. 필자는 우리나라의 시대적 과제가 ‘공적 영역에서 무엇이 가치이고 무엇이 몰가치인지’ 구별해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올바른 공적 가치를 세워야 한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그 가치와 실존적 감각의 연결고리도 찾아야 한다. 우리는 로봇이 아니기 때문이다.
칼럼 |
[이탄희의 공감(公感)] 두개의 세상 |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전 판사 이상은 결핍에서 온다. 허전한 마음에 찬바람이 불면 가슴이 시리다. 다시 따뜻하게 데우고 싶어진다. 그 욕구를 올바른 가치와 연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소속감’ ‘강화’ ‘만족지연’ ‘승화’와 같은 행동주의 심리학 용어들이 다 그런 뜻이다. 올해 초 법관을 사직하고 한동안 국외여행을 했다. 도중에 마주친 분이 있었다. 사직 이유를 물어왔다. 해오던 대로 설명했다. “그러면 판사직을 잃은 건가요, 버린 건가요?” 훅 들어온 질문에 나도 모르게 반응했다. “자발적으로 잃었죠.” 형용모순이다. 그동안 쓰린 순간이 왜 없었겠는가. 나는 아직도 그 표정을 기억한다. 2017년 2월의 어느 날, 나는 양형실장 사무실의 탁자에 앉아 있었다. 오른쪽 대각선 책상에 놓인 업무수첩이 눈에 띄었다. 그와 나는 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다. 사실 대화라기보다는 내가 설명을 주로 듣는 쪽에 가까웠다. 한참 설명을 이어가던 그는 결국 기획조정실이 판사들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말을 꺼냈다. 순간 내 표정이 굳었다. 기획조정실은 그럴 법적 권한이 없다. 양형실장과 눈이 마주쳤다.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띄엄띄엄 말을 이어갔다. 이제는 내가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그는 눈을 찡그리며 문장을 맺었다. 진심으로 부탁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 말투도 기억한다. 법원행정처 근무를 거부하고 사직서를 제출하자 행정처 차장이 전화를 해왔다. 나는 업무의 불법·부당성을 설명했다. 돌아온 것은 하소연이었다. ‘하소연’은 그와 나의 관계에 어울리는 표현이 아니다. 차장은 대법관 0순위였고, 나는 3000명의 판사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의 태도를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과장되게 애처로운 말투였다. 다른 심의관 자리를 제안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도 가끔 그 말투가 귓가를 맴돈다. 마음이 불편하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의 설명에 따르면 조직생활은 집단적인 역할극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대면한 상대의 태도에 맞춰 자아를 ‘연출’한다. 상대가 바뀌면 태도도 바뀐다. 양형실장과 차장도 한때는 재판의 이상을 좇았던 젊은이였다. 사법관료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기 위해 자기 안의 좋은 판사의 자아를 죽여 없앴을 뿐이다. 내가 내 명예를 지키겠다고 나서자 일시나마 그들도 죽은 자아를 소환해냈다. 나는 그날 이들이 꾹꾹 숨겨온 수치심을 보았다. 자아는 ‘무대’의 영향도 받는다. 무대가 바뀌면 규칙도 바뀐다. 한쪽의 ‘은밀한 관행’이 더 큰 무대에서는 ‘천인공노할 일’이 되기도 한다. 나는 행정처 발령이 철회되어 일선 법원으로 돌아왔다. 그곳엔 업무수첩 대신 법정이 있다. 법정은 재판이 이뤄지는 곳이다. 판사에게 부여된 헌법적 사명이 피부로 느껴지는 곳이다. 공적인 가치를 함부로 뭉개지 못하는 곳이다. 비밀주의가 무너지고, 책략보다는 규범이 중시되는 곳이다. 그곳으로 복귀하고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소집될 때까지 100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세상 자체가 그냥 하나의 큰 무대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법대에서 내려다본 세상과 평지에서 올려다본 세상은 다르다. 지난 주말, 변호사로서 동자동 쪽방촌에 갈 일이 있었다. 재판하면서 열악한 주택을 한두번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때는 누구도 내게 속살을 다 보여주지 않았다. 평지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있다. 이들의 이익이 공적 가치의 뿌리다. 주권재민사상을 표방하는 나라에선 그렇다. 공직사회는 그 가치에 자신을 끼워 맞춰야 한다. 반대로 가치를 자신의 이익에 끼워 맞춰서는 안 된다. 분노를 사는 길이다. 보르도지방법원 판사였던 몽테스키외는 10년의 법관 생활을 정리하고 20여년간 유럽을 떠돌았다. 그리고 <법의 정신>을 저술했다. ‘법률과 판결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억압’이 가장 큰 문제라고 썼다. 프랑스에서 바스티유 감옥이 불타기 얼마 전, 그의 사상은 대서양을 건너 미국 필라델피아에 모인 55명의 대표들에게 전해졌다. 사법권 독립을 처음 성문화한 미국헌법이 탄생한 배경이다. 두개의 자아, 두개의 무대, 두개의 세상. 이것은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다. 문제는 선택이다. 좋은 선택만이 우리의 결핍을 채워줄 것이다. 지난주부터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선택을 잘하려면 일단 둘을 구별해낼 수 있어야 한다. 세포가 분열하듯이, 모든 새로운 세상은 개념의 분화에서 시작된다. 천지창조의 시작은 어둠과 빛을 가른 일이다. 재판을 지켜보며 우리가 할 일이다. ※공감(公感)은 ‘공적 감각’을 축약한 조어다. 필자는 우리나라의 시대적 과제가 ‘공적 영역에서 무엇이 가치이고 무엇이 몰가치인지’ 구별해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올바른 공적 가치를 세워야 한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그 가치와 실존적 감각의 연결고리도 찾아야 한다. 우리는 로봇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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