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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30 18:28 수정 : 2019.07.01 09:29

이탄희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전 판사

후불은 비싸다. 할부에 이자가 붙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물건을 되돌려줘야 한다. 남의 집에 손님으로 사는 기분이다. 하루라도 빨리 상환하고 온전한 주인이 되는 게 좋다.

한국 사회에 ‘후불제 민주주의’라는 표제가 소개된 지는 꽤 되었다. 격변의 현대사, 크고 작은 시민들의 희생, 겨울밤을 수놓은 거대한 촛불의 물결.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물건값을 제법 치른 것일까. 그런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전히 고단하다. 고비용사회의 숙명인가. 대한민국의 비용절감 전략은 어디로 갔나.

법률가라면 누구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라는 두가지 상품에 익숙하다. 민주주의는 의사 형성의 원리이고, 법치주의는 권력 실행의 원리이다. 더 쉽게 말하면 이렇다. 민주주의는 지금 여기서 다시 정하는 것이고, 법치주의는 사전에 정해둔 대로 하는 것이다.

뭔가를 다시 정하려면 시간과 노력이 든다.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주권자는 평범한 다수의 사람들이다. 모든 것은 집단적 의사결정이다. 그래서 우리는 보다 편리한 방법을 먼저 찾는다. 미리 정해둔 절차부터 살핀다. 무턱대고 1인 시위부터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법치주의는 모두에게 비용이 덜 드는 해결책인 셈이다.

이렇게 우리는 법치에 의지한다. 저비용 해결책이 작동하면 고단함을 줄일 수 있다. 하버드 로스쿨의 필립 헤이먼 교수는 “신호등 없는 사거리 가운데에 서면 초등학생도 권위가 생긴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수신호에 일단 따르고 본다. 바쁜 운전자들이 매번 실랑이할 겨를이 없다.

하지만 우리의 저비용 해결책은 처절하게 망가져 있다. 법원행정처 판사들이 작성한 파일이 드러나기 시작하고 2년이 지났다. 판사 사찰, 권력층 접촉, 재판 개입, 인터넷카페 잠입, 허위기사 작성, 한쪽 당사자 서면 첨삭…. 누가 봐도 타락한 요원들의 모습이다.

국민들은 판사를 믿고 재판을 받아왔다. 다른 누구의 개입도 단호하게 거부할 거라 믿었다. 직업윤리를 소중히 여길 거라 믿었다. 판사가 훌륭해서가 아니다.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치에 대한 믿음은 필요에 의한 믿음이고, 슬픈 믿음이다. 그런 믿음은 함부로 배신해선 안 된다. 원한을 사는 일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고대 페르시아의 왕이 괜히 타락한 판사의 가죽을 벗긴 것이 아니다. 파일이 공개된 바로 그 순간 관여된 자들의 판사로서의 생명은 끝났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여전히 법복을 움켜쥐고 있다. 전국에 흩어져 매주 수백명의 운명을 좌우한다. 그러는 사이 성 밖에선 원한이 쌓이고 있다. 2018년 한해만 법관 상대 진정·청원이 4600건을 넘었다. 2년 전의 3배가 넘는다.

그중 일부는 한발 더 나간다. 공직을 유용한다. 재판받을 땐 현직인 게 유리하다고 서슴없이 내뱉는다. 자신이 받은 압수수색이 부당하다고 법원 내부망에 글을 올린다. 사건 담당 판사들이 매일같이 접속하는 망이다. 유사 사건에서 1심 판결이 선고되자, 항소심 담당 법원 판사들에게 사전에 이메일을 보낸다.

그뿐인가. 법률용어를 오용하는 판사들도 등장했다. 언어가 오염되면 생각도 오염된다. 재판 독립을 의미하는 ‘사법권 독립’을 ‘사법부 독립’으로 바꿔 부른다. 재판의 공정성을 지키라고 했더니 사법부서의 울타리를 지키고 있다. ‘사법권은 법관들에게 있다’라는 헌법조항을 두고 사법행정권까지 보장한 것이라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면 사법행정권을 대법원장 1인에게 부여한 현행법도 위헌인가. 이것이 다 용어에 이익을 투사해서 생기는 일이다.

공직사회가 사람의 몸이라면 선출직은 두뇌에, 사법기관은 심장에 해당한다. 두뇌가 잠을 자도 심장은 계속 뛴다. 모세혈관을 통해 구석구석까지 법적 판단을 공급한다. 피에 물이 섞이면 몸이 썩어가듯이, 법적 사고에 판사 자신의 이익을 투사하면 공직사회 전체가 병이 든다.

이렇게 우리는 법치주의마저 후불이다. 판사의 이름을 외우고, 경력을 찾아보고, 판사의 언행과 판결의 의도를 의심해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고단하다. 바로 이 고단함이 우리의 할부금이다.

사실 나는 이 할부금을 왜 시민들과 젊은 법조인들이 치러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들은 죄가 없다. 세금으로 법대를 높이 세우고 그 밑에 별수 없어 조아렸을 뿐이다. 이제껏 영광은 누가 다 누렸는가. 설거지는 밥을 먹은 사람이 해야 맞지 않겠나.

물론 알고 있다. 그래도 결국 우리 몫인 것을. 어차피 그렇다면 하루라도 빨리 원금을 갚고 싶다. 사법선진국 수준의 법치주의, 우리는 그 온전한 주인이 되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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