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전 판사 민복기는 우리에게 엉뚱한 유산 하나를 남겼다. 제왕적 대법원장 체제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어 말을 번역하기도 어렵다. 그는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0년, 아버지 민병석이 일왕으로부터 작위를 받았기 때문이다. 민병석은 궁내부 대신이었다.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장이다. 그 직위를 이용하여 조선의 경찰권을 일본에 넘기는 각서를 체결했다. 사돈인 이완용과 한일병탄조약에도 관여했다. 일왕으로부터 공을 인정받아 10만엔을 받았다. 이후 조선총독부 자문역 등으로 일하며 천문학적인 부를 쌓았다. 유복하게 자란 민복기는 1937년, 도쿄로 건너가 일본국 고등시험 사법과에 응시했다. 이듬해 사법관시보가 됐다. 면접관에게 ‘일왕에 대한 충성심’을 검증받아야 갈 수 있는 자리였다. 1939년, 그는 경성지방법원 판사가 되어 ‘이와모토’라는 이름으로 근무했다. 광복 10년 뒤 은퇴했던 그는 5·16 군사정변으로 공직에 복귀한다. 3년5개월간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역대 최장수다. 돋보이는 시기는 1964년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한일청구권협정 추진을 반대하는 시위가 많았다. 중앙정보부는 배후에 북한이 있다고 발표했다. ‘인혁당 사건’이다. 서울지검 검사들이 항명을 했다. 기소하지 않겠다며 버텼다. 민복기의 법무부는 ‘기소 거부 시 인사조치 방침’을 내세워 구속기간 만료 직전 숙직 검사가 기소하게 만들었다. 정권으로서는 당시 법원도 신경 쓰였다. 처음에는 현역 대령을 법원행정처장으로 보냈다. 대법원장이 사직서를 내며 항의했다. 1968년,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새 대법원장을 임명할 기회가 왔다. 그의 선택은 민복기였다. 1972년 12월, 유신헌법이 공포됐다. 사실상 박정희의 영구집권이 가능해졌다. 민복기는 일주일 뒤 신년사에서 전국 법관들에게 ‘사법권의 존재양식을 유신에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두달 뒤 그는 대법원장으로 재임명된다. 유신헌법은 그에게 제왕의 권한을 주었다. 이전까진 법관추천회의가 있었다. 법관 4, 대통령 및 정부 3, 변호사협회 2 등 여러 세력이 위원들을 분점했다. 수많은 나라가 그렇게 한다. 유신은 법관추천회의를 없애버렸다. 민복기에게 대법관과 모든 판사에 대한 제청권을 몰아주었다. 그는 이 권한으로 대법관 9명과 전국 판사 10%를 갈아치우는 데 협조했다. 대법원장으로 재임명된 지 2주 만이었다. 1975년에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있었다. 민간인을 군사법원에서 재판하고 재판 도중 끌고 나가 폭행했다. 공판조서마저 변조했다. 민복기는 귀를 막고 8명에 대한 사형판결을 확정시켰다. 바로 다음날 사형이 집행됐다. 국제법학자협회는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 불렀다. 그에 대한 정권의 보답이었을까. 그해 법원조직법이 개정된다. 법원행정처 조직을 대법원이 원하는 대로 구성할 수 있게 해줬다. 법 시행 이듬해, 민복기는 행정처에 판사들을 대거 배치한다. 사법농단을 일으킨 ‘행정하는 판사들’의 등장이다. 민복기는 인사 외의 방법으로 법원을 지배할 단초를 만들었다. 이른바 ‘행정이 주도하는 사법’이다. 민복기는 그렇게 10년2개월을 대법원장으로 재직했다. 헌정사상 최장기다. 그뿐이 아니다. 민복기 퇴임 후 현재까지 41년 동안 그 체제가 유지되고 있다. 1987년 개헌 당시 법원 부분은 거의 손대지 않았다. 일각에서 ‘사법독립’이라며 목소리를 높이자 국회는 멈칫하다 시기를 놓쳤다. 민복기 체제는 우리 법조의 문화를 근대 이전 수준에 가둬놨다. 법원에는 대법원장을 아버지로 하는 가부장제와 고위법관 중심의 가족주의가 뿌리내렸다. 공사의 구별이 없다. 대법원 컴퓨터는 ‘일기장’이고, 직무행위에 대한 조사는 ‘사찰’이다. 대법원 정문은 개인의 기자회견을 위한 배경화면쯤 된다. 파견 판사, 행정처 판사의 청탁은 형제의 부탁이고, 전관예우는 시집간 딸이 친정에 내미는 손이다. 좋은 보직을 받으면 대법원장에게 엎드려 큰절한다. 다 집안일인 것이다. 이 체제를 바꿔야 한다. 이미 30년 전에 했어야 할 일이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은 모두 독재를 청산하며 사법행정을 회의체에 넘겼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위원은 법관 비중을 줄이고 여러 세력이 분점해야 한다. 최소한 유신 이전의 법관추천회의 수준은 돼야 한다. 그래야 가부장제와 가족주의를 극복하고 시민들을 위한 근대적인 법원을 만들 수 있다. 제도개혁은 국회의 몫이다. 국회가 또다시 멈칫하지 않기 바란다. 민복기가 뿌린 씨앗이 양승태라는 열매를 맺었듯 양승태가 뿌린 씨앗도 언젠가 다시 열매를 맺을지 모른다.
칼럼 |
[이탄희의 공감(公感)] 일본국 사법관 민복기가 남긴 유산 |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전 판사 민복기는 우리에게 엉뚱한 유산 하나를 남겼다. 제왕적 대법원장 체제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어 말을 번역하기도 어렵다. 그는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0년, 아버지 민병석이 일왕으로부터 작위를 받았기 때문이다. 민병석은 궁내부 대신이었다.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장이다. 그 직위를 이용하여 조선의 경찰권을 일본에 넘기는 각서를 체결했다. 사돈인 이완용과 한일병탄조약에도 관여했다. 일왕으로부터 공을 인정받아 10만엔을 받았다. 이후 조선총독부 자문역 등으로 일하며 천문학적인 부를 쌓았다. 유복하게 자란 민복기는 1937년, 도쿄로 건너가 일본국 고등시험 사법과에 응시했다. 이듬해 사법관시보가 됐다. 면접관에게 ‘일왕에 대한 충성심’을 검증받아야 갈 수 있는 자리였다. 1939년, 그는 경성지방법원 판사가 되어 ‘이와모토’라는 이름으로 근무했다. 광복 10년 뒤 은퇴했던 그는 5·16 군사정변으로 공직에 복귀한다. 3년5개월간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역대 최장수다. 돋보이는 시기는 1964년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한일청구권협정 추진을 반대하는 시위가 많았다. 중앙정보부는 배후에 북한이 있다고 발표했다. ‘인혁당 사건’이다. 서울지검 검사들이 항명을 했다. 기소하지 않겠다며 버텼다. 민복기의 법무부는 ‘기소 거부 시 인사조치 방침’을 내세워 구속기간 만료 직전 숙직 검사가 기소하게 만들었다. 정권으로서는 당시 법원도 신경 쓰였다. 처음에는 현역 대령을 법원행정처장으로 보냈다. 대법원장이 사직서를 내며 항의했다. 1968년,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새 대법원장을 임명할 기회가 왔다. 그의 선택은 민복기였다. 1972년 12월, 유신헌법이 공포됐다. 사실상 박정희의 영구집권이 가능해졌다. 민복기는 일주일 뒤 신년사에서 전국 법관들에게 ‘사법권의 존재양식을 유신에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두달 뒤 그는 대법원장으로 재임명된다. 유신헌법은 그에게 제왕의 권한을 주었다. 이전까진 법관추천회의가 있었다. 법관 4, 대통령 및 정부 3, 변호사협회 2 등 여러 세력이 위원들을 분점했다. 수많은 나라가 그렇게 한다. 유신은 법관추천회의를 없애버렸다. 민복기에게 대법관과 모든 판사에 대한 제청권을 몰아주었다. 그는 이 권한으로 대법관 9명과 전국 판사 10%를 갈아치우는 데 협조했다. 대법원장으로 재임명된 지 2주 만이었다. 1975년에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있었다. 민간인을 군사법원에서 재판하고 재판 도중 끌고 나가 폭행했다. 공판조서마저 변조했다. 민복기는 귀를 막고 8명에 대한 사형판결을 확정시켰다. 바로 다음날 사형이 집행됐다. 국제법학자협회는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 불렀다. 그에 대한 정권의 보답이었을까. 그해 법원조직법이 개정된다. 법원행정처 조직을 대법원이 원하는 대로 구성할 수 있게 해줬다. 법 시행 이듬해, 민복기는 행정처에 판사들을 대거 배치한다. 사법농단을 일으킨 ‘행정하는 판사들’의 등장이다. 민복기는 인사 외의 방법으로 법원을 지배할 단초를 만들었다. 이른바 ‘행정이 주도하는 사법’이다. 민복기는 그렇게 10년2개월을 대법원장으로 재직했다. 헌정사상 최장기다. 그뿐이 아니다. 민복기 퇴임 후 현재까지 41년 동안 그 체제가 유지되고 있다. 1987년 개헌 당시 법원 부분은 거의 손대지 않았다. 일각에서 ‘사법독립’이라며 목소리를 높이자 국회는 멈칫하다 시기를 놓쳤다. 민복기 체제는 우리 법조의 문화를 근대 이전 수준에 가둬놨다. 법원에는 대법원장을 아버지로 하는 가부장제와 고위법관 중심의 가족주의가 뿌리내렸다. 공사의 구별이 없다. 대법원 컴퓨터는 ‘일기장’이고, 직무행위에 대한 조사는 ‘사찰’이다. 대법원 정문은 개인의 기자회견을 위한 배경화면쯤 된다. 파견 판사, 행정처 판사의 청탁은 형제의 부탁이고, 전관예우는 시집간 딸이 친정에 내미는 손이다. 좋은 보직을 받으면 대법원장에게 엎드려 큰절한다. 다 집안일인 것이다. 이 체제를 바꿔야 한다. 이미 30년 전에 했어야 할 일이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은 모두 독재를 청산하며 사법행정을 회의체에 넘겼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 위원은 법관 비중을 줄이고 여러 세력이 분점해야 한다. 최소한 유신 이전의 법관추천회의 수준은 돼야 한다. 그래야 가부장제와 가족주의를 극복하고 시민들을 위한 근대적인 법원을 만들 수 있다. 제도개혁은 국회의 몫이다. 국회가 또다시 멈칫하지 않기 바란다. 민복기가 뿌린 씨앗이 양승태라는 열매를 맺었듯 양승태가 뿌린 씨앗도 언젠가 다시 열매를 맺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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