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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4.11 17:44 수정 : 2019.06.11 09:45

이본영
국제뉴스팀장

여자 최고권력자라는 말은 아직도 낯선 감이 있다. 역사적으로 ‘여자’와 ‘최고권력자’의 결합은 서늘한 느낌을 주는 경우조차 있었다. 가령 중국에는 ‘3대 여걸’이 있다. 한고조 유방의 아내 여후, 당의 측천무후, 청말의 서태후다. 각각 너무 잔인했고, 아들의 권좌를 빼앗고, 제국의 종말을 재촉한 이들이다. 3대 악녀라고도 한다. 서양사에도 ‘블러디(피투성이) 메리’로 불린 잉글랜드의 첫 여왕 메리 1세 등이 있다.

‘악녀 시리즈’는 극도로 부당한 편견을 만들었다. 똑같이 이상한 짓을 해도 타자와 소수자에 훨씬 집중하는 사고 행태와 남자들이 독점한 역사 기록이 합세한 결과다. 정직하게 말하면 인류가 흘린 피의 99% 이상이 남자들 탓일 것이다. 여자들은 그들의 정치력을 평가받을 기회를 거의 완전히 박탈당해왔다. 여성 참정권 시대가 열린 지 100여년이 흐른 지금이 그런 기회의 시점이 될 수도 있다.

여기 두 여자 최고지도자가 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다. 메르켈은 난민을 너무 많이 받아들였다가 궁지에 몰렸다. 반발 여론에 한발 물러섰으나 배타적 민족주의의 재림을 막겠다는 투지는 여전하다. 아던은 무슬림 65명의 목숨을 앗아간 테러 뒤 히잡을 쓰고 유족을 위로하며 아랍어 인사를 건넸다. 명성을 갈망하는 테러범의 이름을 부르는 것 자체가 그를 도와주는 꼴이라며, 자기 입으로 그 이름을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테러범을 완벽한 루저로 만들었다.

이들의 행동이 공명을 일으키는 것은 성숙한 역사의식과 보편적 인간애 때문이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단호함도 갖췄다. 메르켈은 우파 정치인이긴 해도, 지울 수 없는 집단범죄를 저지른 자민족에 대한 회의를 깔고 있는 전후 독일 정치의 전통에 따라 포퓰리즘에 맞서기로 작정했을 것이다. 독일의 ‘원죄’를 언급하며 민족주의와 포퓰리즘에 맞서자고 거듭 호소하고 있다. 아던은 자신은 감정이입이 잘 되는 사람이라면서도 “난 자비로운 동시에 강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다. 뉴질랜드 의회는 10일 아던의 호소에 반자동소총 금지 법안을 압도적 표차로 통과시켰다. 그는 스스로 말한 대로 연민과 단호함을 동시에 보여줬다.

이들에 비해 과거 미국과 북한 지도자의 핵단추 자랑은 어떤가? 성 대결을 조장하자는 게 아니다. 훌륭한 남자 지도자들도 숱하다. 형편없는 여자 지도자들도 당연히 있다. 그러나 남자든 여자든 칼싸움 장난을 하며 자란 사람들과 역할놀이를 하며 큰 사람들의 정서와 심성은 다를 것이다.

이달 6일 주요 7개국(G7) 외무장관들이 낸 공동성명에는 “여성들이 평화협상에 유의미한 수준으로 참여하고 영향력을 발휘하면 평화협정의 지속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내용이 들어갔다. 한 자릿수에 불과한 여성의 협상 참여율을 남성과 동등하게 만들어 평화의 가능성을 높이자는 주장이다. 분쟁의 처참한 희생자들인 여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자는 얘기인 동시에 이들의 갈등 조정 능력을 이용하자는 취지다.

메르켈과 아던은 건강한 민주정의 리더십과 포퓰리스트 리더십이 왜 다른가도 보여줬다. 민주주의의 다른 말인 여론 정치에는 명암이 있다. 덮어놓고 목소리가 큰 쪽 편만 들면 포퓰리즘으로 간다. 다수를 우선 존중하되, 그 의견과 요구가 정의롭지 않다면 설득해야 한다. 때로는 거기에 맞서는 용기도 필요하다. 다수가 원하는 길이 모두의 불행으로 이어질 수도 있음을 여러 사건이 증명했다.

세계적으로 배타주의의 탁류가 밀려오는 때에 이런 지도자들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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