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9.07.31 20:35 수정 : 2019.07.31 20:49

인도 동물 화장터를 지켜주는 신의 형상. 사진 작은미미 제공

작은 미미의 인도살이

인도 거주 후 회춘한 냥이 17살 땅콩이
한국 온 어느 날 땅콩이 사망 소식 접해
유골 갠지스강 뿌리려고 했으나 벌레 때문 포기
신기한 인도 화장터 구경하다 똥 밟아
묘한 뭉클함에 빠진 나 “땅콩이는 아직 내 맘에”

인도 동물 화장터를 지켜주는 신의 형상. 사진 작은미미 제공

17년 동안 키운 ‘땅콩이’라는 고양이가 있었다. 주머니에 들어갈 만한, 땅콩만큼 작았던 땅콩이는 무럭무럭 자라 어느새 킹콩이 되었고, 이문동, 낙원동, 누하동, 상도동, 합정동을 누비는 ‘외출냥이’로 살며 몇 번의 가출과 몇 번의 폭력사태를 거쳐 나름 파란만장한 묘생을 보내다 난데없이 인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으니, 그때의 땅콩 나이 어언 15살. 사람 나이로 치면 76살 정도라 하니(주변 사람들은 “영감님”이라고 부르며 어느 순간부터 존칭을 쓰기 시작했다), 말년에 이게 웬 날벼락인가.

인도에 가기 위해서 땅콩이는 수십 종류의 백신을 맞았고, 동물병원 원장 선생님의 장문 확인 서류도 받았다. 체중이 6㎏ 가까이 되는지라 나와 같이 승객 칸에 타지 못하고 화물칸으로만 이동이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차가운 화물칸 안에 어찌 우리 ‘영감님’을 홀로! 라고 격분했지만 2㎏ 이상 다이어트를 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였기에 나는 진정제를 먹이고 땅콩이와 공항에서 눈물의 이별을 해야 했다. 약 12시간 뒤 인도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에서 다시 건네받은 땅콩이는 잔뜩 웅크린 채 떨고 있었고,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 온몸에서 오줌 지린내가 났다. 그런데도 고양이가 흔치 않은 인도라 공항 직원들과 인도 사람들은 땅콩이를 귀엽다고 한 번만 만져보자고 난리였다. 그래요, 우리 영감님은 76살, 좀 동안이에요, 많이 귀엽죠. 하하. 하지만 그 손 치우라, 당장! 땅콩이를 꼭 안으며 진정시켰지만, 인도 집에 와서도 일주일 넘게 땅콩이는 침대 밑에서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땅콩이는 점차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는데, 조금 신기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땅콩이는 햇빛 잘 드는 창가에 누워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는데, 푸석푸석하고 잘 빠지던 털은 한창때의 모질처럼 윤기가 흐르기 시작했고, 항상 시커멓게 끼던 눈곱도 어느 순간 보이지 않으며 눈에는 총기가 돌기 시작했다. 결석과 신장염이라는 지병을 가지고 있었기에 배가 빵빵해지는 걸 신경 써 왔는데, 인도에 와서는 신기하게도 배가 항상 말랑했다. 그렇다, 땅콩이는 회춘하고 있었다. 고온건조한 인도의 날씨는 고양이에게 최적의 조건이었다.

그렇게 인도에 산 지 2년째. <우리, 자연사 하자> 후속 작업으로 한국에 있을 때였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로 기억한다. 큰미미와 나는 그날 오후에 라디오 녹음이 있어서 한창 변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인도에 있는 남편에게서 보이스톡이 왔다.

“어, 왜.”

“잘 지내냐.”

“어, 왜. 바쁜데.”

“...어떡하지.”

“뭘 어떡해.”

“...땅콩이.”

“왜?”

난 덜컥 땅콩이가 가끔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혈뇨를 보거나 갑자기 토를 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남편은 한참 뒤에야 답을 했다.

“...땅콩이가 떠났어.””

나는 순간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옆에서 큰미미가 날 잡아주지 않았다면 바닥에 그대로 쓰러졌을 것이다. 땅콩이는 항상 잠을 자던 내 침대 위에서, 좋아하던 극세사 이불 속에서 혼자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일주일 뒤에 귀국인데, 좀만 기다려주지. 원망할 시간이 없었다. 남편은 아파트 관리인을 불렀다. 정장을 입은 관리인이 나름 애도를 표하더니 땅콩이를 쓰레기봉투에 넣으려고 했다. 잠깐, 그건 아니잖아. 나는 재작년에 반려묘를 보낸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다. “한국에선 반려동물 화장터가 있는데, 인도에도 있는지 모르겠네요.” 나는 델리와 구르가온에 사는 사람들의 모임에 글을 올렸고 서너 명이 델리에 있는 동물 화장터를 추천해줬다.

그리운 땅콩이. 사진 작은미미 제공

일주일 뒤에 같이 장례를 치르자는 내 말에 남편이 분노했다. 그럼 그동안 땅콩이는 어떡해? 일주일 동안 냉동실에 넣어둬? 소고기랑 돼지고기 옆에? 그게 네가 원하는 땅콩이 마지막 모습이야?

방도가 없었다. 남편은 그길로 바로 델리 동물 화장터로 달려갔다. 극세사 이불에 꽁꽁 싸맨 땅콩이를 안고 차로 두 시간을 갔다. 화장터에 도착하고 내게 페이스북 톡을 켰다. 큰미미 품에서 질질 짜고 있던 나는 온갖 힌두교 신들로 가득한 동물 화장터를 보고 순간 웃음이 터졌다. 과연 종교의 나라답다, 영감님은 인도의 신들이 잘 지켜주겠구나.

그렇게 땅콩이는 힌두신들의 비호 아래 세상을 떴고, 유해는 작은 항아리에 담겨 왔다. 인도에 돌아오고 한 달 뒤, 우리는 땅콩이를 데리고 바라나시로 향했다.

바라나시,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자, 힌두교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생각하는 곳. 성스러운 갠지스강에서 재를 뿌리면 전생과 이생에 쌓인 업이 씻겨 내려간다는 곳.

남편은 인도에 2년 넘게 사는 주제에 그동안 바라나시 가기를 꺼렸다. 걸을 때마다 소똥이 밟힌대. 공기도 최악, 강에는 시체가 둥둥. 그런 그를 바꾼 건 땅콩이였다. 우리는 땅콩이의 유골을 갠지스강에 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라나시에 3주 정도 다녀온 한 친구는 매일 아침 화장터로 나가서 온종일 화장하는 것만 보고 왔다고 했다. “누나, 그거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열흘 정도 있었던 다른 친구는 강가에서 주운 사람 뼈 사진을 보내주기도 했다. “대나무로 시체를 계속 내리쳐서 깨더라. 리얼의 세계였어.” 환상을 가지고 바라나시로 갔다가 이틀 만에 도망쳐 나온 사람도 있었다. 나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돌아올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땅콩이를 갠지스강에 뿌리지 못했다.

바라나시 풍경. 사진 작은미미 제공

내 눈엔 강물이 너무 더러워서 그 속에 유골을 뿌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아. 나는 이렇게나 믿음이 부족한 인간이다. 이 성스러운 물 앞에서 고작 눈앞에 보이는 벌레와 쓰레기와 형체를 알 수 없는 불순물들에 굴복하고 말았다.

바라나시에 간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술집에서 몰래 파는 500루피(한화로 8000원 정도)짜리 맥주를 못 참고 벌컥벌컥 마셔댔다. 술김에 가본 화장터에서는 어딘가 익숙한 고기 냄새가 났다. 어떤 친구는 쥐포 냄새라고도 했었는데. 멀찌감치 앉아서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그저 모두 각자의 일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화장터 불 앞에서 소 두 마리가 싸우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웃으면서 휴대전화로 촬영을 했고, 어떤 사람은 시체를 치던 작대기를 들어 소를 쳤다. 나는 다음 생을 기약할 수 없는 땅콩이를 안고 옆에서 하염없이 대마초를 피우던 구루를 바라보았다. 머리카락이 100년쯤 된 나무뿌리 같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구루의 대마초를 한 번씩 피우고 갔다. 술김에 구루에게 “이 유골을 안 뿌리고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라고 물어봤지만, 구루는 영어를 못하는 것 같았다. 내게도 대마초를 권하기에 고개를 저었다.

밤에 거행되는 종교의식(Pooja). 사진 작은미미 제공

숙소로 돌아오는 길. 좁은 골목 가득한 인파와 소와 쥐와 지린내와 소똥으로 가득했다. 눈에 불을 켜며 소똥을 피해 다녔지만, 결국엔 지뢰를 밟고 말았다. 아X. 똥 밟았다! 근데 기분이 이상했다. 이상한 뭉클함이 들었다. 소똥은 아주 따끈하고 푹신했다. 이럴 수가, 소똥에게 위로를 받는 날이 오다니. 그 아찔한 느낌에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곧 들이닥치는 힌두교인들 무리에 휩쓸려 다시 앞으로 가야 했다. 그들은 모두 맨발로 걷고 있었다.

여전히 땅콩이는 우리 집 피아노 위에 놓여 있다. 땅콩이가 쓰던 화장실도, 먹이를 먹던 밥그릇도, 그대로다. 그래서 그런지 인도에 놀러 와 내 방에서 자는 친구들은 종종 꿈에서 땅콩이를 보기도 한다. 땅콩이는 집 주변을 맴도는 건가. 나는 다시 바라나시를 가게 될까?

작은미미(뮤지션·작가)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ESC : 작은 미미의 인도살이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