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8.19 05:00
수정 : 2019.08.20 19:34
|
※ 그래픽을(이미지를) 누르면 확대됩니다.
|
[기술 독립, 상생 협력이 답이다] ① 한 협력업체의 ‘불공정 관행’ 폭로
대기업 납품사 ‘웨이퍼마스터스’
10년간 50여 차례 기술협력
SK, 9~10개월 무상 사용 뒤
“결과 다르다” 돌려보내
삼성, 기술협력 요구해놓고
계약 않고 컨설팅비도 안줘
대기업 ‘잠재적 구매처’ 이유로
온갖 기술적 설명·평가 무상 요구
‘대·중기 상생표본’ 공동개발 명분뿐
연구개발보다 장비 베끼기도 만연
실리콘밸리서 창업한 유 대표
“풍토 바뀌지 않으면 미래 없다”
|
※ 그래픽을(이미지를) 누르면 확대됩니다.
|
일본 수출규제 충격으로 국내 소재·부품·장비 업체들의 기술 한계가 그대로 드러났다. 20여년간 투자를 하고도 국산이 왜 일본산을 대체하지 못했는지 수많은 진단과 해법이 나오고 있지만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 사실이 있다. 강소기업 성장을 막는 대기업의 불공정거래 관행이다. 10년 동안 삼성전자·에스케이(SK)하이닉스와 거래해온 반도체 장비 제조사 ‘웨이퍼마스터스’의 사례는, 대기업의 ‘갑질 거래 관행’이 소재·부품·장비 국산화의 걸림돌이었음을 보여준다.
중소 업체 기술협력은 ‘공짜’
“10년 동안 대기업 웨이퍼만 700~800장씩 받아서 평가했습니다. ‘새로운 장비가 궁금하다’며 먼저 연락하더니 컨설팅과 웨이퍼 평가를 다 받은 후엔 연락도 없더라고요. 당연히 장비 구매도 없었고요. 그럴 거면 성능평가비용이나 자문료라도 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웨이퍼마스터스는 반도체 웨이퍼 열처리 장비와 반도체 기초물성 평가 장비를 제조하는 회사다. 개발된 장비 15종 가운데 10종 이상을 국내 대기업과의 기술협력과 공동개발(JD)에 사용했다. 주로 ‘재료평가를 어떻게 해야 하냐’, ‘새로운 공정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대기업 연구소 연락을 받고 유우식(56) 웨이퍼마스터스 대표가 자료를 건네주거나 컨설팅을 진행했다. 기술협력 횟수만 10년 동안 50여차례에 이르렀으나 실제 구매로 이어진 경우는 손에 꼽혔다. 1~2년 동안 무상으로 장비를 가져다가 평가한 뒤 ‘우리랑 안 맞는다’며 되돌려주는 식의 구매행태도 반복됐다. 수십억원에 이르는 연구개발비는 물론 성능평가비용·인건비·교통비 등 비용 일체를 받을 수 없었다.
2010~2015년 웨이퍼마스터스가 에스케이하이닉스와 진행한 기술협력은 57건에 이른다. 수억원을 들여 웨이퍼 평가를 하고 대기업의 질문사항에 응대했지만 이 가운데 비용을 지급받은 경우는 거의 없다.
‘대-중기 상생 표본’이라던 공동개발도 명분에 그쳤다. 원천기술을 처음부터 같이 개발하기보다는 거의 개발이 마무리된 장비에 공동개발 방식이 적용됐다. 게다가 “써보고 마음에 들면 쓰겠다”며 기한은 정하지 않았다. 9~10개월간 장비만 무상으로 사용하다 ‘처음 세운 가정과 결과가 다르다’며 반환된 경우도 두 차례였다. 수많은 실험 끝에 2012년 한 차례 판매에 성공했지만 납품비는 연구개발비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납품값 ‘후려치기’엔 전문가
삼성전자도 2011~2015년 시모스(CMOS) 이미지 센서 및 라만 분광법과 관련해 웨이퍼마스터스에 여러 차례 기술협력을 요청했다. 공정별 재료물성을 평가해 달라거나 웨이퍼 표면·계면 특성을 측정하는 기술을 자사 웨이퍼에 구현해 달라고 했다. 장비의 상세한 특징이 궁금하다며 외부 기관의 유료 자문 결과를 요청하기도 했다. 매번 장비를 도입할 것처럼 말했지만 한 건도 실제 계약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컨설팅 비용도 없었다.
“잠재적 구매처라는 이유로 온갖 기술적 설명과 웨이퍼 평가를 무상으로 요구하는데 자금력 좋은 장비 제조사는 버틸지 몰라도 작은 곳들은 감당하기 어려워요. 기술력 좋은 혁신 기업보다 영업자금 많은 회사가 오래 버티는 형국이지요. 같은 구매처라도 해외 기업들 가운덴 안 그런 곳이 더 많습니다. 최근 계약한 일본 웨이퍼 제조사 ㅅ사와 싱가포르 아이엠이(IME)는 한 차례 장비평가를 거친 뒤 곧바로 계약을 했어요.”
대기업은 중소기업이 개발한 기술 가치를 인정하는 데도 인색했다. 특히 가볍고 간단하게 구현된 기술일수록 ‘단가 조정’ 가능성이 높았다. 어려운 기술을 쉽게, 가볍게 만드는 데도 꾸준한 연구개발이 필요하지만 그 가치가 인정되는 경우는 드물다. 유 대표는 “대기업 간부들이 실험 현장을 찾아 ‘이 장비는 왜 이렇게 간단하냐. 작아서 돈도 얼마 안 들었을 거 같다’거나 ‘장비를 한번 측정하면 됐지 왜 모니터링을 해야 하냐’고 묻는다”며 “대기업 구매팀이 기술적 이해를 높이기보다 협력사 쪼는 데만 익숙해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장비 수리 비용도 구매처의 정규 예산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1년에 한두번씩 고장이 나는 장비는 해마다 수리 비용을 따로 책정하면서도 고장이 잘 안 나는 장비는 그해 예산에서 아예 빠지는 경우가 잦았다. 그러다 갑자기 고장이 나면 장비 제조사가 보수 비용을 전부 부담해야 했다. 이런 관행들은 협력업체의 채산성을 낮추고 그만큼 기술투자 여력을 잠식해왔다.
기술 아닌 인맥으로 얽힌 생태계
기술로 승부하기가 어렵자 접대와 인력 동원에 매달리는 중소 협력업체도 많아졌다. ‘저녁 6시부터 일(접대)하는 회사가 대기업 계약 따낸다’, ‘대기업 사우회를 열 수 있는 회사가 성공한다’는 말이 돌았다. 대기업 구매팀에서 퇴직자가 나오면 중소기업들은 임원이나 이사로 모셔가기 바빴다.
2016년 웨이퍼마스터스에도 비슷한 위기가 왔다. 에스케이하이닉스 연구소가 2012년부터 쓰던 반도체 공정 처리 장비의 추가 구매가 필요했고 웨이퍼마스터스는 같은 장비를 다시 납품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에스케이하이닉스가 ‘연구소 여론이 안 좋다’며 거절했고 자사 퇴직 임원이 취업한 다른 제조사 장비를 새로 발탁해 6개월 동안 사용했다. 에스케이하이닉스는 2년 뒤 “장비 평가를 해봤는데 좋은 결과가 안 나왔다”며 웨이퍼마스터스에 장비 재도입을 요청했다. ‘질이 안 좋다’던 장비를 왜 다시 쓰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대기업 퇴사자가 중소기업 임원으로 재취업하는 추세는 반도체 후방산업 중에서도 장비 제조사가 가장 강하다. 장비 선정 및 주문량을 결정하는 권한이 전적으로 고객사에 있어서다. 관행이 굳어질수록 대기업 구매팀과 장비 제조사 사이의 친분도 두터워졌다. 실제로 <한겨레>가 올해 분기보고서를 기준으로 국내 반도체 장비 제조사 매출 상위 10곳의 등기·미등기 임원 현황을 파악한 결과 5곳이 임원 30% 이상을 삼성전자·에스케이하이닉스 퇴직자로 채웠다. 임원 가운데 대기업 출신이 80%, 이사는 100%인 제조사도 있었다.
연구개발보다 ‘베끼기’ 만연한 업계
무늬만 국산화인 ‘재포장’ 회사도 많았다. 2016년 반도체공학 전공자인 ㄷ교수가 웨이퍼마스터스의 문을 두드렸다. 스트레스(제품 내구성) 측정에 관심 있다는 한 업체가 협업을 요청한다고 했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들은 질문은 ‘핵심 부품을 공급해줄 수 있느냐’는 거였다. 이미 주요 고객사에 영업을 다 해놨으니 핵심 부품을 모아 조립(패키징)만 하겠다는 취지였다. 업체가 직접 확보한 원천기술은 없었다. 새로 문을 연다는 ㄹ사도 “돈은 많은데 비즈니스를 하고 싶다. 기술을 주면 사겠다”고 제안했다. 타사 장비 내부를 뜯어 내용물을 파악한 뒤 비슷한 제품을 새로 만드는 업체도 있었다. 이른바 ‘장비 베끼기’였다.
|
웨이퍼마스터스 유우식 대표
|
유 대표는 에이티엠아이(ATMI)·노벨러스시스템즈·램리서치 등 굴지의 반도체 재료·장비 업체에서 일하다 1999년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이 회사를 창업했다. 에스케이 쪽은 “우리 라인에 중요한 베이스가 되는 장비 납품 회사”라고 밝혔다. 그는 최근에도 에스케이와 새 장비 도입에 관한 논의를 하고 있지만 실명으로 인터뷰하겠다고 했다.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국내 대기업에 의존하지 않아도 회사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도 자신감으로 작용했다.
그는 “한국 대기업들이 항상 쓰던 기술과 거래처를 찾고, 성능보다 인맥에 의존하고, 푼돈 아끼겠다고 2~3년씩 성능평가만 한다”고 안타까워했다. “정부에서 수십가지 대책을 내놨지만 시장에 만연한 부당 거래 관행을 바꾸지 않으면 도루묵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중소기업들이 기술로 승부할 수 있도록 완전히 새로운 ‘판’을 만들어줘야 할 때입니다. 이번에 변화하지 않으면 한국 반도체 산업의 미래는 담보할 수 없습니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삼성·SK “기초평가·개발 비용, 장비업체 부담이 원칙”
국내 반도체 소자 대기업들은 장비제조사 웨이퍼마스터스의 기술을 적절한 보상 없이 사용했다는 <한겨레> 기사와 관련해 “거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입장에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우선 웨이퍼마스터스에 50여차례 무상 기술협력을 받은 데 대해 삼성전자와 에스케이(SK)하이닉스는 “기초평가·공동개발 단계에서 발생하는 비용은 장비사가 부담하는 게 맞다”고 대응했다. 장비업체 선정 과정에서 기초평가를 하는 경우 일일이 비용을 지급할 의무는 없다는 것이다.
에스케이하이닉스는 웨이퍼마스터스가 장비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부품 가격을 알려달라고 요구한 데 대해 “장비를 납품받을 때 부품 가격까지 코드화해 관리하는 게 내부 방침이며, 모든 장비 구매계약 때 거치는 과정”이라고 했다. 또 “웨이퍼마스터스 장비는 차세대 공정 라인에 매우 중요한 베이스가 되는 장비”라며 “일방적으로 배제하려 한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2012년부터 쓰던 웨이퍼마스터스 장비를 내보내고 6개월간 다른 업체 장비를 쓰다 다시 웨이퍼마스터스에 재계약을 요청한 사례에 대해서는 “내부 평가가 엇갈렸으나 새 공장을 빨리 열어야 해서 어쩔 수 없이 (웨이퍼마스터스의 장비를) 쓴 것”이라고 했다.
삼성전자는 “2011~2013년 웨이퍼마스터스 장비를 갖고 일부 기초평가를 한 것은 사실”이라며 “우리가 원하는 것과 기술이 달라 공동개발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했다”고 밝혔다. 비용을 지급하지 않고 평가만 수차례 진행한 데 대해서는 “구매 가능성을 따져보는 기초평가 비용까지 낼 이유는 없다”고 했다.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 Weconomy 홈페이지 바로가기: http://www.hani.co.kr/arti/economy◎ Weconomy 페이스북 바로가기: https://www.facebook.com/econohani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