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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진먼섬 상륙작전에 나섰다가 패퇴한 중국 인민군의 지휘소가 잠시 머물렀던 구닝터우 마을의 ‘북산양루’가 집중 폭격을 받아 처참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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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한겨레 공동기획
[DMZ 현장보고서] ⑦ 양안의 평화교류
지뢰·포탄 공방 진먼-샤먼 공동생활권 복원
포탄 쏘던 다덩섬에는 대규모 국제공항 건설
양안 정부 무역·우편·화물 교류 합의 뒤 급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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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진먼섬 상륙작전에 나섰다가 패퇴한 중국 인민군의 지휘소가 잠시 머물렀던 구닝터우 마을의 ‘북산양루’가 집중 폭격을 받아 처참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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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섬’인 대만 진먼섬(금문도)이 ‘평화의 섬’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중국과 대만의 교류가 지속적으로 확대되면서 평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중국 본토와 가장 인접한 이 섬은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퇴한 국민당이 중국 본토에서 대만으로 물러나면서 본토를 되찾고 공산당을 방어하기 위한 최전방 군사기지로 삼은 곳이다. 주민들은 오랜 시간 이 냉전의 섬에 고립돼 군사적 긴장 상태를 겪어야 했다.
최근 이 섬에는 급증하는 중국 관광객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대형 면세점과 쇼핑몰, 고급호텔이 줄줄이 들어섰다. 진먼과 중국 푸젠성 샤먼을 오가는 여객선도 30분 간격으로 운행한다. 국공내전을 거치면서 냉전 시기 섬 곳곳에 설치된 진지와 참호, 용치, 확성기 등 군사시설물과 수십년간 포격을 주고받았던 탱크, 박격포, 포탄 등은 평화시대로 바뀐 뒤 섬의 관광자원으로 변모했다.
진먼섬은 인천 백령도의 약 3.3배(151㎢) 크기다. 등록인구는 13만명이지만 상주인구는 6만여명이다. 지금은 대만에 속해 있지만, 대만 본섬에서 200㎞ 이상 떨어져 있고 중국 샤먼과는 불과 8㎞ 거리여서 오랜 기간 샤먼과 같은 생활·경제권을 형성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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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먼섬 구닝터우 마을 해안에 섬 상륙 방지용 쇠말뚝이 박힌 군사시설물인 용치 수천개가 설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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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교류로 활력 되찾은 ‘냉전의 섬’ 진먼섬
지난 18일 샤먼의 고층빌딩이 아른거리는 진먼섬 서북단 구닝터우(고령두) 마을 해안에 설치된 거대한 확성기에서는 가수 덩리쥔(등려군)의 노래 ‘첨밀밀’이 흘러나왔다. 중국 사람들 사이에서 ‘낮엔 라오덩(노등·덩샤오핑·등소평)을 듣고, 밤엔 샤오덩(소등·덩리쥔)을 듣는다’는 말이 나올 만큼 냉전 시기에도 중국인의 가슴을 설레게 한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구닝터우 마을의 ‘북산양루’는 마치 강원도 철원의 ‘노동당사’처럼 폭격을 당해 처참한 모습으로 관광객을 맞고 있었다. 이곳은 1949년 진먼섬 상륙작전에 나섰다가 패퇴한 중국인민군의 지휘소가 잠시 머물렀던 곳으로, ‘양루’란 19세기 중반 이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에 진출해 부를 축적한 화교들이 서양식 건물을 본떠 지은 집을 말한다.
구닝터우 모래해변은 한국 접경지역과 닮은 모습이었다. 섬 상륙 방지용 쇠말뚝이 박힌 군사시설물인 용치 수천개가 촘촘히 설치돼 있었고, 암벽을 이용한 참호 속에는 대포가 웅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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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8·23 포격전’부터 1978년까지 20년간 중국군이 쏜 포탄 90만발이 수거돼 칼로 재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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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8·23 포격전’부터 1978년 중-미 수교일까지 20년 동안 ‘홀숫날은 쏘고 짝숫날은 쉬는’ 포격전을 벌였던 중국군의 수백만발에 이르는 포탄은 음식을 만드는 칼로 재활용되고 있었다. 중국군이 쏜 20㎏짜리 포탄 1개는 40~60개의 칼로 재탄생된다. 3대에 걸쳐 칼을 만들어온 우쩡둥은 “포탄 90만발을 수집해 칼을 만들고 있는데, 관광객들의 반응이 좋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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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푸젠성 다덩섬에서 대만 진먼섬을 향해 설치된 세계 최대의 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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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전 대결 앞장선 진먼-샤먼 ‘형제의 섬’ 진먼섬 반대쪽
중국의 샤먼공항에서 30㎞ 떨어진 샤먼 다덩섬(대등도)에는 섬 절반 크기의 대규모 국제공항 건설이 한창이었다. 덤프트럭이 쉴 새 없이 오가며 바다를 메우고 있는 다덩섬에는 세계 최대 크기의 확성기를 비롯해 포격전 때 사용했던 박격포 등이 전시돼 있었다.
샤먼과 진먼은 청나라에 저항한 명나라 장수인 정성공이 ‘반청복명’ 운동의 거점으로 활용할 만큼 명나라 때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꼽혀왔다. 두 섬은 짧게는 1.8㎞밖에 떨어지지 않아 생활, 문화, 혈연으로도 분리될 수 없는 ‘형제의 섬’인 셈이다.
형제의 섬은 냉전기의 혼돈 속에서 ‘이산의 섬’이 되었다. 1949년 10월17일 아침에 샤먼에 가서 일하거나 장을 보고 오후에 돌아오려던 진먼 주민 7천여명은 이날 배를 타지 못해 중국에 남게 됐다. 이들은 군사진지로 변한 선착장과 지뢰밭으로 변한 해안을 원망하며 가족 상봉을 위해 38년을 기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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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샤먼시 다덩섬 해안에 설치된 ‘일국양제 통일중국’ 표지판과 기관포가 바다 건너 진먼섬을 겨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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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먼섬이 냉전의 섬이 된 것은 2차 세계대전 뒤 자유-공산 진영의 투쟁 때문이다. 1949년 중국 공산당군이 난징, 상하이, 우한, 창사를 공략하고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하자 장제스는 국민정부를 대만으로 옮겼다. 공산당군 2만명은 여세를 몰아 대만의 길목인 진먼섬에 상륙해 전투를 벌였으나, 후롄(호련) 장군의 국민당군에 참패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로 공산당은 주력부대를 한반도로 보내 양안 간 전쟁은 더 퍼지지 않았지만 진먼과 샤먼의 전투는 중-미 수교 전날까지 30년간 계속됐다.
냉전의 섬에 고립된 진먼섬 주민들은 자위대에 편성돼 군사훈련과 참호 건설 등 군사지원 임무를 떠안아야 했다. 마을과 집마다 지하 벙커를 만들어 섬 전체가 군사기지로 변했고 주민의 일상생활은 엄격히 통제됐다. 설상가상으로 국외의 가족이 보내준 송금마저 끊기자 생활고에 시달리는 노인들의 자살이 잇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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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먼섬 수이터우(수두)마을의 도로변 벙커 위로 ‘금문고량주’ 홍보 조형물이 우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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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문고량주 생산으로 대만 본섬과 연결
중국과 대만에서 고립된 변방의 섬 진먼섬이 대만 본섬과 연결되고 대만의 국민경제에 통합된 것은 ‘금문고량주’ 생산이 결정적이었다. 진먼을 통치하던 군부는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진먼에 주둔하던 군인들을 위해 만든 58도짜리 금문고량주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고, 수익금을 섬 주민들을 위해 썼다. 이 술은 대만 본섬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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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량주 생산으로 물이 부족한 진먼섬은 중국 푸젠성에서 상수관을 연결해 물을 사용하고 있다. 정수장 앞에 ‘양안은 한 강물을 마신다’는 뜻의 표지석이 설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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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미 수교 뒤에도 권위주의적 통치방식을 고수한 국민당 정부는 국민적 저항에 부닥쳐 1987년 계엄령을 해제했다. 하지만 최전방인 진먼·마쭈(마조)섬에 대해서는 안보상의 이유로 계엄령을 유지하고 군사시설을 확충했다. 두 섬의 주민들이 타이베이 시민들과 연대해 끈질기게 저항하자 1989년 대만 본섬으로 민간전화가 허용되었고, 1990년 출입허가제가 폐지돼 주민들의 대만 출입이 자유로워졌다. 1992년 7월 마침내 진먼과 마쭈의 계엄령이 해제되면서 진먼에 주둔하던 10만명 규모의 군대가 본격적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진먼은 군대 철수에 따른 지역경제의 침체를 극복하고자 관광업 육성에 나섰고 1996년 민간 항공기 운항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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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화교들이 동남아 상가를 본떠 만든 진먼섬의 상가에 중국과 대만의 국기가 나란히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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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삼통’ 정책으로 평화교류 급물살
중국과 대만의 접경인 진먼이 긴장과 갈등의 장소에서 평화와 교류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은 2001년 두 정부가 합의한 샤먼과 진먼 사이에 무역, 우편, 화물의 직접 교류를 허용하는 ‘소삼통’ 정책에 힘입은 바가 크다. 소삼통의 시행으로 진먼과 샤먼은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과거처럼 공동생활권이 복원됐다. 특히 진먼은 관광객과 금문고량주 판매량이 늘면서 주민들의 생활수준도 나아졌다. 2008년까지 진먼의 가구 절반 이상은 샤먼에서 부동산을 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진먼섬 출신으로 서울대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은 우쥔팡(40)씨는 “대만의 변방이던 진먼이 소삼통을 통해 양안 교류의 교두보가 되면서 양안의 통일에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며 “대만의 50대 이상 세대와 국민당은 통일을 주장하는 반면, 50대 이하와 민진당은 ‘대만은 중국이 아닌 대만’이란 생각이 강해 세대 간 의식 차이와 마음의 장벽을 좁히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했다.
진먼섬을 둘러싼 평화교류 사례를 남북한이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박명규 서울대 교수(사회학)는 “양안 관계는 역사적으로 단일 공동체로 존속하던 국가가 근대화 과정에서 이념적으로 분열했고 두 체제로 분단된 뒤 동아시아 냉전체제의 한 축으로 존속해온 점 등 남북관계와 유사점이 많다. 양안 사례는 점진적 교류 정책의 전망과 잠재적 긴장을 예측하게 하는 반면교사로도 의미가 있다”고 했다.
샤먼(중국)·진먼섬(대만)/글·사진 박경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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