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1.25 05:00
수정 : 2019.11.25 17:52
텔레그램에 퍼지는 성착취① 숨어버리는 피해자, 왜?
자책감 시달리고
생활고 탓 검은 유혹 넘어갔지만
합법적 일 아니라 도움 요청 꺼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범인 잡히긴 할지…
‘국외 서버’ 텔레그램 추적 어려워
가해자 “신고해라” 수사 비웃어
6명 정도 신고했지만 진척 더뎌
협박에 끌려다녀
얼굴·주소 등 신상정보도 유출돼
불특정 다수 남성들이 ‘2차 가해’
피해자는 겁에 질려 잠적 등 도피
“막상 경찰서에 가서도 말을 못 하겠는 거예요. 조사받아본 적도 없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런 알바가 합법적인 일은 아니니 그것도 두렵고요. 괜히 범인은 안 잡히고 일만 더 커져서 유포만 더 될 것 같기도 하고….”
여성들에게 성착취의 고통을 안기고 있는 텔레그램 비밀 대화방 개설자 ’박사’에게 협박당해 사진과 동영상을 뺏기고 박사의 ‘노예’로 전락한 한 여성 피해자의 말이다. 박사의 범죄는 취약한 상태에 놓인 여성을 추려내고 약한 고리를 옥죄어 항거 불능 상태에 빠뜨리는 방법으로 피해자들의 적극 대처를 틀어막는 수법을 쓴다.
<한겨레>가 확인한 피해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자신의 신상을 숨긴 채 만남을 찾거나 혹은 급전이 필요해 일거리를 찾던 여성들이었다. 성범죄 피해 여성들을 조력해온 전문가들은 “이렇게 취약한 여성들은 범행 대상이 되더라도 죄책감에 도움을 쉽게 요청하지 못하고 협박에 질질 끌려다니게 된다”고 지적한다.
박사는 성착취물을 유포할 때 항상 피해 여성들의 신상을 함께 공개한다. 생년월일과 집 주소는 기본이고 때때로 전화번호도 포함한다. 그래서 순식간에 박사에게 성착취를 당한 피해 여성들의 공포는 사실 그다음 과정에서 더 커진다. 누군지 알 수 없는 불특정 다수의 남성들이 자신을 추적하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실제로 성착취물을 본 남성들은 공개된 피해자의 주소와 함께 집단 성폭행을 암시하는 댓글을 달았고, 공개된 피해자 집 주변 가게에 왔다며 인증샷을 올리기도 했다. 공포에 짓눌린 여성들은 이 남성들을 피해 잠적하거나 에스엔에스를 탈퇴하는 소극적인 방법으로 대처하게 된다.
박사는 수사기관을 업신여기는 행태도 저질렀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또 다른 피해자는 박사에게 피해를 입은 뒤 어떤 이의 권유로 수사기관에 피해 사실을 신고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어떤 이’가 바로 박사였다. 박사가 다른 아이디로 접근해 신고를 주문하고, 피해자에게 수사기관 내부를 찍어 오게 조종한 것이다. ‘나는 신고해도 잡히지 않고, 수사기관도 별것 아니다’는 허세를 피해자와 관람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수법이었다. 경찰도 전례를 찾기 힘든 대담한 범죄 양상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해하고 있다.
취재 과정에서 <한겨레>가 확인한 박사의 피해 여성만 최소 20명 이상이다. 실제로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열흘 가까운 취재 기간 동안에만 10여명의 피해 여성이 더 늘기도 했다. 박사는 “하루에 2명씩 노예를 생산하고 있다”고 과시한다. 입장료가 100만원이던 박사의 고액방은 취재 기간 동안 150만원으로 가격이 올랐다. 박사의 피해자 가운데 수사기관에 신고한 이는 6명 정도로 추정된다. 서울, 일산, 인천, 강원 등 박사의 범행은 지역을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아직 속 시원한 수사 결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서버를 국외에 두고 있는 텔레그램 수사의 어려움 때문이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서승희 활동가는 “가해자는 특정이 안 되고 피해자도 인지할 방법이 없어 누굴 수사해야 하는지 한계가 발생하는 것이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의 핵심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박사를 비롯한 텔레그램 내 범법자들은 ‘텔레그램은 추적 불가능한 안전한 공간’이라는 맹신을 갖고 있다. 피해자 협박과 사진·동영상 공유, 심지어 결제에 이르기까지 텔레그램을 벗어나지만 않으면 신원이 특정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박사의 피해 여성들을 도와 수사기관 신고를 도운 한 관계자는 <한겨레>와 만나 “피해자들이 느리게 움직이는 법이나 수사기관보다 박사의 실시간 협박에 굴복하게 되는 이유”라며 안타까워했다.
특별취재팀
hankyoreh1113@protonmail.com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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