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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15 19:28 수정 : 2019.12.09 14:43

지난해 5월29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미투 관련 기자회견이 열렸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손해배상 청구 시한이 짧아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해왔지만, 손해배상 청구 시한인 10년이 지나도 성폭력 후유증에 대한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토요판] 친절한 기자들

지난해 5월29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미투 관련 기자회견이 열렸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손해배상 청구 시한이 짧아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해왔지만, 손해배상 청구 시한인 10년이 지나도 성폭력 후유증에 대한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거 같아요. 그런데 왜 현실 정책은 변하지 않는 걸까요?”

성폭력 범죄 피해를 언론에 공개적으로 밝히고 또 다른 피해자들을 도와온 테니스 코치 김은희(28)씨가 최근 가해자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 2심에서 어렵게 승소한 뒤 털어놓은 심정입니다.

안녕하세요. 성폭력 범죄 피해자가 손해배상 청구 시한인 10년이 지났더라도 성폭력 후유증에 대해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다는 법원 판단(<한겨레> 11월12일치 1면)을 보도한 사회정책팀 박현정입니다. 은희씨의 승소건은 성폭력에 따른 후유증에 대해 범죄 시점이 아닌 피해 진단을 받은 시점부터 손해배상 소멸시효를 계산해야 한다는 ‘이례적’ 판결이었습니다. 만약 피해자가 손해를 감수한 법정 투쟁을 이어오지 않았다면 이러한 법원 판단은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2018년 2월 토요판 기사를 쓰는 과정에서 이번 소송을 제기한 은희씨를 만났습니다. 유독 춥고 황량한 날, 강원도 춘천지방법원 앞에서 처음 만난 그는 웃는 인상이었지만 힘겨워 보였습니다. 2001년 7월부터 2002년 8월까지 초등학생 제자인 그를 성폭행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게 한 혐의(강간치상)로 기소된 테니스 코치가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뒤 항소해 2심이 진행되던 시기였습니다.

어린 시절 범죄 피해를 겪고, 그때 일이 범죄임을 뒤늦게 깨달은 뒤 2016년 말 가해자가 기소되기까지 무려 14년이 걸렸습니다. 2016년 5월 우연히 테니스 대회에서 옛 코치를 보게 되면서 은희씨는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받습니다. 피해 신고를 하지 않아 다른 피해자가 나오면 자신의 책임일 것만 같았다고 합니다. 그 무렵 찾은 병원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처음 받습니다. 가해자는 지난해 대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이 확정됩니다.

성폭력 범죄 피해자는 민사소송을 통해 가해자의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희씨의 경우, 승소 가능성이 매우 작았습니다. 어린이 성폭력 범죄 피해자 등은 피해를 겪은 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정신적 피해를 비롯한 여러 후유증을 겪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성폭력 범죄와 그로 인한 후유증 발생까지 10년이 넘는 시차가 있을 경우, 사건 발생일을 기준으로 소멸시효를 계산해 후유증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영화 <도가니>로 알려진 광주 인화학교 피해자들도 2012년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패소했습니다.

이러한 현실이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민사소송 제기를 망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송에서 질 경우 피고 쪽 변호사 선임 비용의 일부인 740만원(3심까지 패소하면 세배)을 부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도무지 권리 행사를 포기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소송에서 이겼지만 언론이 자신의 일을 반복적으로 보도하는 것이 반가울 리 없습니다. 기사 작성을 허락한 이유를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번 판결이 많이 알려지면 다른 피해자들도 정당한 권리 행사가 가능하다는 용기를 낼 수 있지 않겠어요? 나도 다른 사건을 보고 용기를 낸 것처럼 보답하고 싶어요.”

2010년 ‘조두순 사건’으로 인해 만 19살 미만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의 경우, 피해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 공소시효를 중지하는 법이 시행됩니다. 그보다 앞서 벌어진 성폭력 사건 중 공소시효가 남은 경우엔 새로운 법을 적용받게 됐습니다. 은희씨 사건 당시, 강간치상과 강간죄 공소시효는 각각 10년과 7년이었습니다. 강간죄 공소시효는 이미 끝났지만 강간치상죄는 시효가 남아서 가해자 처벌이 가능했습니다.

그동안 성폭력 범죄 공소시효엔 변화가 있었지만 민사 소멸시효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법원에 따라 소멸시효 해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므로 법 개정이 필요합니다. 피해자가 손해를 감수하고 법정 싸움을 하는 동안 국회엔 성폭력 관련 손해배상 소멸시효 기간을 확대하자는 취지의 법 개정안이 여러 건 발의됐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법안은 제대로 된 논의도 거치지 못한 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쌓여 있습니다. 올해 1월 더불어민주당과 정부가 체육계 성폭력 재발 방지를 위해 소멸시효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발표했지만 결국 말뿐이었습니다.

이번 판결 기사를 보고, 소송대리인인 김재희 변호사를 찾아간 한 여성은 수십년 전 성폭력 피해를 평생 잊을 수 없다며 상처를 치유할 마지막 길을 열어달라고 호소했다고 합니다. 언제까지 피해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피해를 구제받기 위한 지난한 싸움을 해야 할까요?

박현정 사회정책팀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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