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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12.28 18:49 수정 : 2007.12.28 18:49

박수정/르포작가

삶의창

두 달에 한 번씩 나오는 잡지가 있다. 첫 호가 나온 게 1998년 1월이다. 서울 구로에서 노동문학,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 몇이 모여 시작한 일이다. 외환위기로 구조조정이 실행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거리에서 한뎃잠을 자는 일이 벌어졌던 때다. 어디서고 희망을 찾기 어려운 때에 돈도 없이, 아니 돈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잡지가 나온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 ‘진보생활문예’를 내세운 잡지가 얼마나 오래갈까 걱정하는 눈길도 있었지만 2008년 1월이면 60호가 나온다. <삶이 보이는 창>이라는 잡지다.

이 잡지에 글을 쓰는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하는 일이 다양해 다 적을 수도 없다. 중국집 배달 노동자, 건설일용공, 봉제사, 금형공, 교사, 노점상 …. 휴대전화로 해고된 노동자, 복직투쟁하는 노동자, 감옥에 갇힌 노동자도 있다. 노동·여성·인권·아동·평화·생태·문화 등 다양한 현장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스님, 목사님, 신부님 글도 있다. 논밭에 농사짓는 이야기에서 아스팔트에 농사짓는 이야기까지 펼쳐진다. 시인·소설가·화가·만화가·사진작가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빈곳을 채운다.

살아온 길도, 지금 사는 모습도 다 다른 사람들이 쏟아놓는 이야기를 읽다보면 어느 대목에서는 껄껄 웃다가, 울다가, 화나다가, 속이 아리다가, 안타깝다가, 쓸쓸하다가 그런다. 배달할 물건이 생겨 사무실에서 같은 지역에 있는 40명에게 동시에 무전을 치면 0.1초 사이에 통화버튼을 먼저 누른 사람이 일을 딸 수 있다고 한 퀵서비스 노동자, 원청에서 다음 일감을 얻으려면 산재 발생률이 아예 없어야 하기 때문에 두 손가락이 잘리고도 산재 처리를 못 받은 동료 이야기를 한 하청업체 건설노동자,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공장살이를 시작했던 내게 아침이면 가야 할 곳이 없다는 것은 뭐라 표현하기 힘든 슬픔이다’라고 한 명예퇴직을 당한 50대 중반 노동자 이야기. 텔레비전 드라마, 라디오 청취자 사연, 가판대에 놓인 작은 잡지들이 담아내지 못하는 그 무엇이 이 잡지에는 있다.

이 잡지가 10년을 이어온 데는 무엇보다 사람 힘이 크다. 읽는 이, 글쓴이, 엮은이 모두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은 따지지 않았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나아졌지만 처음엔 원고료도 상근비도 없이 시작한 일이다. 돈도 명예도 이름도 없이 그저 뜻과 마음이 가 닿아 모인 이들이다. 첫 책을 만들 때 종잣돈 300만원은 구로동 신흥정밀에서 일하다 노동삼권 보장을 외치며 산화한 고 박영진 열사 추모사업회가 노동법 교실을 하려고 모아두었던 돈이라고 한다. 그 뜻을 잃지 말자는 뜻에서 사주를 두지 않는 공동체 운영과 이곳에서 나오는 모든 유무형의 성과는 민주주의와 민중운동 발전을 위해서만 쓰고, 어떤 실무자도 사리사욕을 갖지 않는다는 원칙을 두었다고 한다. 자본 축적이 모든 가치를 삼켜 버리는 세상에서 작지만 아름다운 일 아닌가.

예전 책을 들추다 보니 창간 6돌을 맞으면서 당시 편집인이었던 어느 시인이 쓴 글이 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하면서 생각한 방향이라는데 옮겨보면 이렇다. “… ‘늘 푸르른 생명의 나무’인 평범한 이들이 사는 현장에서 다시 배우기 … 이념이라는 근엄함에 눌려 사는 사람들의 생존을 향한 몸부림은 너무도 구체적이다. 그 몸부림과 모색 속에 새로운 희망이 싹틀 거라 생각했고, 아직은 희망의 싹조차 보이지 않는 암흑이라 해도 우리가 설 곳은 늘 천대받고 배제당하는 생활인들 곁일 거라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다시 ‘삶에서, 평범한 이들한테서, 일하는 사람들한테서 배우자’였다.”

10년을 지나온 힘이었던 이 말은 앞으로 다시 10년을, 20년을 가는 길에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어느 자리에서 누구와 함께 어떻게 희망을 싹틔울 것인가.

박수정/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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