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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9.20 18:18 수정 : 2018.09.21 13:31

이수형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대외전략연구실장

2018년 한반도에 위대하면서도 담대한 지정학의 대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한반도를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평화와 번영의 터전으로 만들겠다는 남북 정상과 8000만 겨레의 굳은 약속이 그것이다. 4월27일 판문점 선언이 지난 시대 적폐의 한반도 정치를 종식시키겠다는 첫발을 내디뎠다면, 이번 9월 평양공동선언은 한반도 평화번영을 향해 퇴로가 없는 담대한 여정을 실천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남북이 평화롭게 공존공영할 수 있는 한반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남북한 평화 프로세스와 북-미 비핵화 프로세스라는 두개의 관문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한다. 두개의 관문을 지나가는 방법은 크게 세가지가 있다. 하나는 남북관계와 비핵화 프로세스가 선순환으로 작동하여 이를 동시적으로 통과하는 것이다. 둘째는 남북관계의 획기적 진전을 통해 지체되는 비핵화 프로세스를 견인하는 것이다. 셋째는 비핵화 프로세스에 남북관계의 진전 속도를 맞추는 것이다. 6·12 북-미 공동성명에도 불구하고 비핵화 협상이 교착 국면에 처해 있는 현재의 상황을 고려했을 경우,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남북관계와 북-미 비핵화 프로세스가 같이 갈 수 있는 해법을 찾는 것 이상으로 남북관계의 진전을 통해 교착 국면에 처해 있는 비핵화 프로세스를 견인하는 것이다. 이번 9월 평양공동선언의 내용이 담고 있는 메시지도 이러한 맥락에 있다고 판단된다. 9월 평양공동선언의 내용을 실천할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이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9월 평양공동선언의 내용을 흔들림 없이 실천해 나가야 한다. 향후 북-미 비핵화 프로세스에서 불협화음이 날지라도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잘 관리하면서 남북한의 평화 프로세스를 진척시켜 나갈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 대목에서 역사적 사례와 교훈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냉전시대 독일은 우리의 입장과 처지가 비슷한 분단국가였다. 서독도 처음에는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는 그 어떤 국가(소련은 제외)와도 외교관계를 맺지 않겠다는 할슈타인 독트린을 동독정책의 근간으로 삼았다. 그러나 할슈타인 독트린은 서독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기보다는 변화하는 시대흐름에 서독을 뒤처지게 만들고 미국과 소련이 구축한 냉전구도의 희생물이 될 개연성만을 높여줄 뿐이었다. 이에 서독은 할슈타인 독트린을 폐기하고 소련, 동독, 루마니아, 폴란드와의 새로운 관계 개선을 위한 초당적 합의에 기초한 동방정책을 수립하여 이를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서독이 동방정책을 추진할 당시의 환경과 여건은 결코 서독에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국내외적으로 많은 난관과 어려움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음에도 서독은 평화를 향해 과감하게 나아갔다. 서독의 동방정책은 냉전의 유럽을 화해협력의 유럽으로 진입시킨 헬싱키 프로세스의 전주곡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향후 독일 통일의 튼튼한 발판이 되었다.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가 깃들기 위해서는 남북관계와 북-미 비핵화 프로세스가 동시적으로 작동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이 연출되지 않더라도 평화를 향한 담대한 여정은 지속되어야 한다. 우리는 과거 서독의 경우처럼 남북관계의 진전을 통해 비핵화 프로세스를 견인해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체제의 뿌리를 내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9월 평양공동선언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인 것이다.

다만,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초당적 합의에 기초한 한국판 동방정책을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번 9월 평양공동선언을 계기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위한 한국의 동방정책이 구축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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