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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0.08 17:44 수정 : 2018.10.08 19:08

오항녕
전주대 교수·역사학

“네 일이나 잘해라!” 쉽게 냉소를 담아 내뱉곤 하는 이 말이 범상치 않을 때가 있다. 제 몫을 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깨달을 때다. 역사학자가 되어 사료 하나 변변히 못 읽으면 답답하고, 교수가 되어 앞날을 걱정하는 제자를 챙겨주지 못하면 미안한 법이다.

집이든 학교든 사회든 마찬가지이다. 교사가, 군인이, 환경미화원이, 대통령이 제 몫을 못 하면 사회의 어떤 부문 또는 전체가 정신이 없어진다. 우리 삶은 촘촘히 얽혀 있기 때문이다.

제 몫은커녕 요즘 이 사회와 국민을 심란하게 만드는 집단을 꼽으라면 단연 사법부가 1등이다. 사법농단이라는 말조차 무색한 짓을 했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추종 판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김명수 대법원장의 무능과 법원 종사자들의 무감각은 거의 절망적이다. 내가 보기에 이들의 잘못은 크게 두가지이다.

첫째, 자신들에게 위임된 권한을 악용하고 억울한 사람들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양승태는 멀쩡한 민주공화국의 대법원에서 고의로 강제징용 재판을 지연시킴으로써, 나라 잃은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였다. 양승태와 추종 판사들은 케이티엑스(KTX) 여승무원의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소송, 긴급조치 손해배상 소송, 전교조 법외노조 소송, 콜트콜텍 사태 등 유독 이 사회의 힘없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그 대가로 ‘상고법원’과 활동비, 자리 보전이라는 사리사욕을 챙기려 하였다.

양승태 등은 이런 추악한 독단을 비판하는 특정 판사들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동향을 감시하고 인사 불이익을 주려 하였다. 개인적인 성향, 동향은 물론 재산관계까지 감시했다. 또 법원 노조의 집행부 성향, 현수막 및 집회 등을 사찰하였다. 양승태와 법원행정처가 법을 왜곡하여 만들어낸 억울함은 사법부 안팎을 가리지 않은 것이다. 4천년 전 요순 시기를 다룬 <서경>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실수로 지은 죄는 가급적 용서하되, 의도적으로 반복해서 지은 죄는 사형에 처한다.’

둘째, 사법부는 잘못을 알고도 고칠 줄 모른다는 점이다. 말로는 수사에 협조하겠다는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면서, 법원행정처는 검찰의 자료 요구를 거절했다. 최근 허경호 영장전담판사는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는데, 그 틈에 유해용은 수사에 필요한 자료를 폐기하였다.

21세기에 벌어진 중대한 삼권분립의 붕괴에 대해, 법원의 공식 역사서인 ‘사법연감’에는 스쳐가듯 단순하게 기술하였고 양승태를 미화하는 듯한 표현이 담겼다는 말도 들린다. 이번 사태를 두고 ‘전대미문의 위기’라고 했던 김명수 대법원장의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이다. 하긴 이런 상황이 오기까지 그가 무슨 리더십을 발휘했던가? 감당할 수 없으면 맡지 않는 게 도리이다.

사법부는 타락의 임계점에 온 듯하다. 국민들이 어떤 방식으로 모욕을 줄지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국회 연설에서 국회의원 3분의 1의 발의와 과반수의 찬성으로 판사를 탄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 일은 시작에 불과하다. 반성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권력에 취해 있는 사법 기술자들이 내 말쯤이야 귓등으로 흘려버릴 테니, 맹자가 2천년 전에 했던 말을 한마디 덧붙이겠다. 권력 없는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좀체 억울한 일을 당할 일 없는 위정자들에게는 여지없이 들어맞는 말이다. ‘인간은 스스로 타락한 뒤에 남들이 모욕하는 법이다.’(人必自侮然後人侮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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