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동네대학교 교수·경제학박사 지난 17일 정부는 확대경제장관회의에서 내년도 경제정책 방향을 발표하였다. 일부에선 소득주도 성장이 후퇴하고 경제 활성화로 선회한 것이 아닌가 진단하지만, 집권 3년 차를 맞아 단기적인 성과와 구조적 변화를 병행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포용국가를 내걸며 포용경제를 추진하는 기조엔 변화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경제가 문재인 정부의 발목을 잡는 듯한 형국이다. 사실 늘 문제는 경제에 있었다. 경기가 너무 좋으면 물가상승과 부의 분배를 둘러싼 갈등이 문제였고, 경기가 안 좋아지면 대중의 고통이 문제였다. 시장을 믿고 모든 것을 맡겼다간 자본의 생리에 따라 독점적 상황이 초래되고 노동의 위치가 초라해지게 마련이었다. 정부가 이를 조정하기 위해 나서면 시장이 경색되고, 집권을 생각하는 정치집단의 단기 부양책이 자칫 통화량 조절에 실패하고 부채를 높여가기에 문제였다. 우리 경제의 문제 양상은 더욱 복잡하다. 그저 경기가 좋지 않다는 말로 불충분하다. 문제의 뿌리는 훨씬 깊다. 최근 들어 역대 대통령 재임 5년이 지나면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어김없이 떨어져 박근혜 대통령 재임 기간에는 3%대도 지키기 어려웠다. 일하지만 저소득인 노동자들이 넷 중 한명꼴이다. 99% 비중의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이들의 임금은 나머지 1% 대기업의 절반에 그친다. 전체 노동자 세명 중 한명이 비정규직인 상황에서 이들의 임금 수준은 정규직의 절반이다. 여성의 임금도 남성의 절반 정도 수준이다. 동네에 가게를 열면 3년 내에 망할 가능성이 절반에 이른다. 반면 부유한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부의 쏠림은 아시아 최고 수준이다. 상위 1%가 받는 급여는 하위 30%가 받는 급여 총액과 맞먹는다. 상위층의 소득집중도는 불평등국가의 표본인 미국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상위 1% 전체가 보유한 주택은 시가 200조원을 넘는다. 기업소득은 지난 20년간 급증해 국민소득의 25% 수준이 되어 다른 선진국에 비해 월등히 높다. 불평등이 그 뿌리에 엉켜 있는 것이다. 눈을 밖으로 돌려보면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다른 국가들은 이 불평등의 해결에 집중하였다. 선진국 경제의 방향타를 잡는 국제통화기금(IMF)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내놓은 ‘포용적 성장’이 대표적이다. ‘임금 없는 성장’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직시하고 불평등이 성장을 가로막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노동자와 중산층 이하에 더 많은 몫을 분배하는 것이 결국 사회안정과 경제성장의 두마리 토끼를 잡는 길이라 보았다. 신자유주의의 득세 이후 시장이 배제해왔던 계층을 ‘또다시’ 생산과 분배의 주체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우리도 시계추의 방향을 바꿀 때이다. 경제가 문제라는 다급한 인식에 밀려 담대한 전환을 하지 않고 그간의 방식을 적당히 땜질한다면, 경제성장률이 2%대에서 1%대로 하락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노동자의 절반이 저임금 계층이 되고 그나마 자영업조차도 선택지가 될 수 없는 더욱 잔인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인구는 대책 없이 더 줄어들고 지역경제는 쇠잔해져 인구소멸 지역이 곧 현실화된다. 4차 산업혁명에 필요한 창조적 인재는 육성되기도 전에 거꾸러지고, 한국 기업의 인적 기반은 중국이나 인도로 옮겨갈 것이다. 몇몇 재벌의 후진적 경영시스템에 한국 경제의 운명을 맡기는 위태로움도 지속될 것이다. 포용성장. 성장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성장의 방식을 경제주체 모두가 살아나는 방식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지금 바꾸지 않으면, 이 ‘배제적 성장’의 끝에서 희망을 찾지 못할 것이기에.
칼럼 |
[시론] 경제는 포용적일 수 없는 것인가 / 이태수 |
꽃동네대학교 교수·경제학박사 지난 17일 정부는 확대경제장관회의에서 내년도 경제정책 방향을 발표하였다. 일부에선 소득주도 성장이 후퇴하고 경제 활성화로 선회한 것이 아닌가 진단하지만, 집권 3년 차를 맞아 단기적인 성과와 구조적 변화를 병행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포용국가를 내걸며 포용경제를 추진하는 기조엔 변화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경제가 문재인 정부의 발목을 잡는 듯한 형국이다. 사실 늘 문제는 경제에 있었다. 경기가 너무 좋으면 물가상승과 부의 분배를 둘러싼 갈등이 문제였고, 경기가 안 좋아지면 대중의 고통이 문제였다. 시장을 믿고 모든 것을 맡겼다간 자본의 생리에 따라 독점적 상황이 초래되고 노동의 위치가 초라해지게 마련이었다. 정부가 이를 조정하기 위해 나서면 시장이 경색되고, 집권을 생각하는 정치집단의 단기 부양책이 자칫 통화량 조절에 실패하고 부채를 높여가기에 문제였다. 우리 경제의 문제 양상은 더욱 복잡하다. 그저 경기가 좋지 않다는 말로 불충분하다. 문제의 뿌리는 훨씬 깊다. 최근 들어 역대 대통령 재임 5년이 지나면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어김없이 떨어져 박근혜 대통령 재임 기간에는 3%대도 지키기 어려웠다. 일하지만 저소득인 노동자들이 넷 중 한명꼴이다. 99% 비중의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이들의 임금은 나머지 1% 대기업의 절반에 그친다. 전체 노동자 세명 중 한명이 비정규직인 상황에서 이들의 임금 수준은 정규직의 절반이다. 여성의 임금도 남성의 절반 정도 수준이다. 동네에 가게를 열면 3년 내에 망할 가능성이 절반에 이른다. 반면 부유한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부의 쏠림은 아시아 최고 수준이다. 상위 1%가 받는 급여는 하위 30%가 받는 급여 총액과 맞먹는다. 상위층의 소득집중도는 불평등국가의 표본인 미국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상위 1% 전체가 보유한 주택은 시가 200조원을 넘는다. 기업소득은 지난 20년간 급증해 국민소득의 25% 수준이 되어 다른 선진국에 비해 월등히 높다. 불평등이 그 뿌리에 엉켜 있는 것이다. 눈을 밖으로 돌려보면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다른 국가들은 이 불평등의 해결에 집중하였다. 선진국 경제의 방향타를 잡는 국제통화기금(IMF)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내놓은 ‘포용적 성장’이 대표적이다. ‘임금 없는 성장’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직시하고 불평등이 성장을 가로막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노동자와 중산층 이하에 더 많은 몫을 분배하는 것이 결국 사회안정과 경제성장의 두마리 토끼를 잡는 길이라 보았다. 신자유주의의 득세 이후 시장이 배제해왔던 계층을 ‘또다시’ 생산과 분배의 주체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우리도 시계추의 방향을 바꿀 때이다. 경제가 문제라는 다급한 인식에 밀려 담대한 전환을 하지 않고 그간의 방식을 적당히 땜질한다면, 경제성장률이 2%대에서 1%대로 하락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노동자의 절반이 저임금 계층이 되고 그나마 자영업조차도 선택지가 될 수 없는 더욱 잔인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인구는 대책 없이 더 줄어들고 지역경제는 쇠잔해져 인구소멸 지역이 곧 현실화된다. 4차 산업혁명에 필요한 창조적 인재는 육성되기도 전에 거꾸러지고, 한국 기업의 인적 기반은 중국이나 인도로 옮겨갈 것이다. 몇몇 재벌의 후진적 경영시스템에 한국 경제의 운명을 맡기는 위태로움도 지속될 것이다. 포용성장. 성장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성장의 방식을 경제주체 모두가 살아나는 방식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지금 바꾸지 않으면, 이 ‘배제적 성장’의 끝에서 희망을 찾지 못할 것이기에.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