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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9.30 17:00 수정 : 2019.09.30 18:55

김지혜
강릉원주대 다문화학과 교수

연세대학교가 ‘연세정신과 인권’이란 교양과목을 필수로 지정했다가 한달 만에 선택으로 바꿨다. 일부 보수기독교 단체의 학교 앞 시위와 민원, 기독교 신문의 보도가 전개된 뒤의 일이었다. 이들은 강의 주제 중 ‘젠더’와 ‘난민’을 문제 삼아 “동성애를 옹호하고 난민 포용을 조장한다”고 공격했다. 수업 내용이 학생들에게 공개되기도 전에, 이렇게 비논리적이고 인류애에 반해 혐오와 배척을 종용하는 주장을 앞세워 수업에 반대했다. 안타깝게도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이 이런 반지성적인 주장에 맥없이 손을 들었다.

대학만의 일은 아니다. 거의 같은 주장으로 지방자치단체의 인권 관련 조례 또한 유보 혹은 폐기되고 있다. 최근 부천시의회에서는 ‘부천시 문화다양성 조례안’이 철회되고, ‘부천시 인권보장 및 증진에 관한 조례’ ‘부천시 민주시민교육 조례’가 부결되었다. 2007년 처음 발의되었던 차별금지법도 같은 이유로 10여년이 지나도록 제정되지 않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국제기구와 학계에서 통용되는 지식이자 공통 가치인 젠더, 성평등, 심지어 인권이 공격받고 있다. 멀리서 찾지 않아도 헌법의 근본정신인 평등과 차별금지를 실현하는 일이 이렇게 힘겹다.

연세대학교 보직자와 직원들은 지난 한달간 이 수업에 반대하는 조직적인 항의 전화와 이메일에 시달렸다고 한다. 최근 부천시의회도 그렇고 그간 많은 국회의원, 공무원, 교육자, 시민단체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을 테다. 누군가가 오랜 시간 인권 증진을 위해 애써 일구어놓은 자리에, 무리의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 나타나 부수고 망가뜨린다. 인권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몇 사람을 표적 삼아 공격하고, 귀를 닫고 상대를 위협하며 업무를 마비시킨다. 이런 행위가 정말 의견이며 민원일까? 적어도 무례함이거나 더 정확히는 괴롭힘이 아닌가.

불평등이 익숙한 사회에서는 차별이 잘 보이지 않고 의도치 않게 차별에 가담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더 성찰해야 하는 것이지, 그렇다고 평등과 차별금지의 원칙 자체를 부인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기독교 정신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성소수자와 난민에 대한 적대감은 잘못된 정보로 주입된 공포의 문제일 뿐, 가장 낮은 곳에서 소외된 이들과 함께했던 예수의 정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많은 역사의 순간에 그러했듯 수많은 기독교인은 소수자를 위해 누구보다 앞장설 수 있는 사람들이라 믿는다.

그럼에도 2019년 한국 사회에서 ‘인권에 반대한다’는 말을 이토록 당당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개탄스럽다. 그 결과, 뭐든 빠르게 변화하는 한국 사회에서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법과 제도는 도무지 발전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인권에 반대하는 의견을 수용해서라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인권은 모든 사람이 인간이기에 갖는 보편적 권리다. 평등, 차별금지, 존엄성은 헌법적 명령이고 양보할 수 없는 권리다. 어떤 경우에도 타협할 수 없다는 뜻이며,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단호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누가 이 말을 할 수 있을까? 만일 권력을 가진 이가 인권침해를 목격하고도 아무것도 안 한다면 그건 중립이 아니다. 인권침해를 계속해도 된다는 승인이다. 더구나 인권침해를 계속하게끔 도와달라는 요청을 들어준다면 그 자체로 인권침해에 가담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그동안 성소수자나 난민 등 소수자와 그 지지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의 현장을 수없이 목격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이 소수자 차별을 옹호하는 이들의 주장을 수용했고, 그렇게 차별을 도왔다.

대학 행정가, 교육자, 국회의원, 지방의회 의원, 공무원 등에겐 크든 작든 주어진 권력이 있고 그 권력을 정의롭게 사용할 의무가 있다. 민주사회에서 지도자의 권력은 약자를 억압하는 게 아니라 강자의 횡포를 막을 때 정당성을 갖는다. 소수자 배척에 동의하는 권력은 정당성이 없다. 다른 사람의 권리를 이해하고 존중하라고 말하는데 괴롭힘으로 화답하는 사람들에게 비겁하게 꼬리 내리는 부끄러운 일은 이제 그만하자. 늘 그래 왔듯 인권을 수호한다는 건 용기와 단호함이 필요하다. 더 이상 반인권적인 주장에 굴복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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