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23 18:21
수정 : 2020.01.05 14:59
김율 ㅣ대구가톨릭대 교수(철학)
올해부터 교육부는 에이스, 특성화, 코어, 프라임 등 기존의 수많은 대학재정지원사업을 대학혁신지원사업이라는 단일한 명칭으로 통합해 대학 140여곳을 지원하고 있다. 투입되는 예산은 5600억원이 넘는다. 필자는 이 사업에 선정되어 재정지원을 받는 대학의 교원으로, 교육 현장에서 느끼는 문제를 지적하고 향후 교육부 재정지원사업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촉구하려고 한다.
얼마 전 회의에서 있었던 일이다. 대학혁신지원사업 예산으로 지원하는 비교과 프로그램을 홍보하는 행사를 열었는데 참석자가 적었으니, 수업에 들어가 학생 서명을 더 받으면서 홍보를 적극적으로 해보자는 제안이 나왔다. 대학혁신사업단의 지시도 아니고 그 서명이 증빙으로 사용되지도 않았다지만, 그것은 교육부의 재정지원 행사장으로 전락한 무수한 한국 대학들의 구차한 현실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였다. 여러 교원이 참여를 홍보했음에도 참석률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그 행사는 특강도, 공모전도, 체험학습도 아니었다. 그저 대학혁신지원사업 아래 어떤 행사가 열리는지 설명하고 학생들의 참여를 권하는 행사였을 뿐. 비교과 프로그램의 참여율을 높이기 위한 홍보의 필요성은 인정하더라도 학기 중에는 이런 행사에 많이 참여한 학생을 따로 뽑는 행사를 연다거나, 학기가 끝나면 그동안 어떤 행사를 했는지 보고하는 행사를 또 열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
대학 교육의 관료주의적 황폐화는 교육부 대학재정지원사업의 고질적 부작용이다 . 교원과 학생을 행사 기획 요원과 동원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는 가운데 , 재정사업의 논리는 충실한 수업과 연구라는 대학의 본연적 기능을 방해하고 있다 . 나는 이 부작용을 극복하기 위해 세가지 조처가 시급하다고 본다 . 첫째, 대학재정지원의 초점을 학생 장학금 확대와 강사 처우 개선에 맞춰야 한다. 등록금 부담에 휘청이며 불확실한 대학 생활을 보내는 청년에게 지금의 국가장학금 제도는 너무 부족하다. 대학 교육의 한 축이되 신분 보장과 임금에서 철저히 차별당하는 강사의 희생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장학금과 강사 환경 개선비라는 예산 항목을 형식적으로 편성해놓기는 했으나, 현실의 대학혁신지원사업은 어렵게 공부하고 가르치는 대학 내의 학생·강사들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것과는 거의 상관이 없다.
둘째, 사업 지원에서 대인 지원으로의 방향 전환과 더불어, 연구재단이 교육부를 대리하고 다시 각 대학의 사업단에 하청을 주는 복잡한 지원 구조를 바꿔야 한다. 대학에서 벌어지는 각종 편법은 사실 교육부 관료의 관리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것으로 인정받으려는 대학들의 애처로운 몸짓이다. 교육부의 마름이나 다름없는 연구재단은 이 편법을 결코 걸러내지 못한다. 대학이 아니라 대학의 구성원을, 서류가 아니라 교육을 지원하라.
셋째, 예산 집행 내역의 투명한 공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예산을 어디에 얼마나 쓰는지를 대외비로 숨기는 대학의 태도는 교육부의 무책임한 방조 때문에 가능했다. 공기업 직원의 회식비도 시민에게 공개되는 세상에, 대학이 교육부에서 받아다 사용하는 엄청난 혈세의 세부 내역은 왜 내부 결재 라인을 벗어나지 못하는가. 관료 몇명이 보고서를 확인하는 작업으로 공공의 검증 시스템을 대신하려 해서는 안 된다.
학문을 통해 사회를 이끈다는 근대 대학의 이념이 21세기 한국 대학에 살아 있다고 믿는 이는 거의 없다. 한국 대학은 투자 자본 대비 손익의 논리가 지배하는 일종의 산업이다.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1990년대 과잉 투자의 후유증과 인구구조 변화로 인해 필연적으로 축소될 ‘사양산업’이다. 외환위기 직후 대기업에 대한 천문학적인 공적 자금 수혈을 연상시키는 대학재정지원이 시장 윤리의 관점에서 과연 올바른 것인지는 따로 따져봐야 한다. 그러나 백번 양보해 이 질문을 접어두더라도, 현재 대학재정지원사업이 최소한의 합리성과 효율성조차 갖추지 못한 채 진행되고 있다는 지적은 미룰 수가 없다. ‘사업 수주’ 광고탑을 세우지 못하면 생존경쟁에서 도태될지 모른다는 오너들을 위한 것 말고, 국민 세금으로 아무도 읽지 않는 총천연색 자료집 더미를 만들어 빈 강의실에 쌓아두었다 알뜰히 폐기처분하는 오랜 관행이 대학의 활로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대로라면 대학혁신지원사업은 교육부발 4대강 사업과 다를 바 없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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